미술관 오픈 시간은 11시. 우리는 이미 1시간 전부터 도착해서 건물 주변의 조각들을 둘러봤다.
그 중에서도미술관 건물 뒤편에 꼭 보고 싶었던 작품이 있었다.
대지미술 작가로 유명한 마이클 하이저 <Levitated Mass>.
그냥 돌이 아니다. 신석기 이후 최대 거석을 옮긴 것이라 하는데 340톤이나 되는 화강암을 10여 일에 걸쳐 옮기는 동안 이동 경로에 있는 가로수도 옮기고 신호등도 철거하기도 했다고 한다.
실제 저 밑에 가면 떨어질까 봐 무서운데 아이들은 복도 같이 긴 공간을 보면 질주 본능이 나오나보다.
사진을 찍는다고 하니 겨우 멈춰 포즈를 취했다.
오픈전 미술관은 한적하다.
드디어 메인 건물에 들어갔다.
제일 먼저 본 그림은 다리파의 작품들. 역시 강렬하고 날카롭고 그러면서 자유로웠다.
Erich Heckel <Sand Diggers on the Tiber>, 1909
Max Pechstein, <Sunlight> 1921
가운데 조각을 보고 아이들과 한참 얘기했다. 미술관에서만 친절한 엄마 발동. 이때를 놓지 않고 아이들은 경쟁하듯 끊이지 않고 얘기한다. 아이들이 얘기하고 싶은 작품을 선택하면 미술사조를 설명하기보다 같이 한참을 읽는다. 계속 들여다보고 질문하고 이야기를 만든다. 오래 본다. 못 보던 것을 찾아낸다. 그리고 어떤 마음인지 얘기한다. 겨를이 있으면 작품의 배경을 이야기해 준다.
Hermann A. Scherer, <Sleeping Woman with Boy>, 1926
딸이 이 작품을 먼저 보고 손짓하며 내게 오라고 했다. 같이 얘기하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조각 유리장 앞에 서서 작은 목소리로 조근조근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 엄마랑 아들이 누워있어. 근데 색을 보니까 자는 것 같지가 않고 죽은 것 같아."
"왜 그렇게 생각했어?"
"사람 몸이 초록색이고 파란색이잖아. 죽어서 그런게 아닐까? 무서워."
"아냐. 내 생각엔 한쪽만 색깔 칠한 거 보니까 뭔가 조명 같은 빛 때문이 아닐까?" 아들이 유리장을 한바퀴 돌며 보더니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입술이 빨건 것을 보면, 아직 피가 돌고 살아있다는 것 같아."
"그렇구나. 누워있는 자세는 어때?"
"뭔가 불편해 보여. 엄마가 팔이 뭔가 이상해. 팔이 꺾인 것 같아서 살아있는 몸 같지가 않아." 딸이 대답했다.
"그러네. 엄마랑 아들이 고요하고 편안하게 잠든 것 같지가 않네. 얘들아, 주변 그림들이랑 같이 볼까? 같은 공간에 같이 있는 작품들은 다 이유가 있을거야."
"주변의 그림이랑 비슷한 느낌이야. 뾰족하고 차갑고 거칠고 그런것 같아."
"맞아. 그림들도 조각처럼 날카롭지. 이 작품들은 독일 표현주의 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이 조각은 헤르만 쉐러라는 스위스 사람의 작품이야. 34살에 요절했는데 죽기 1년전에 만든 작품이래. 이 작품을 보니까 어떤 마음이 들어?"
"난 죽은 것 같아서 무섭고 슬퍼. 색을 왜 반쪽만 칠했나 궁금해. 그리고 나도 얼른 가서 눕고 싶어."
"엄마가 지켜줄 것 같아. 엄마 손이 크고 튼튼해보여. 나는 오늘 잘 때 엄마가 저렇게 안아주면 좋겠어."
아이들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또 따로 계속해서 작품을 관람했다.
언제 봐도 좋은 마크 로스코,
그리고 왼쪽은 미국추상표현주의 액션페인팅으로 유명한 프란츠 클라인의 작품이다. 저 거칠면서 명료한 붓질이 너무 좋았다.
스팸이다! 외치며 빠른 걸음으로 가서 본다.
팝아티스트 에드워드 루샤의 작품 <Autual size>.
상단의 스팸이라는 글자가 이미지로서 진지하고 생경하나, 작가는 그것이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스팸일 뿐이라고 짜잔 하며 등장시킨다.
실제 스팸 사이즈"Autual size"라고 연필로 메모가 있다. 이런 유머가 은근히 재밌다.
조지아 오키프 <분홍 장미가 있는 말의 해골>
르네 마그리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디에고 리베라가 그린 프리다칼로 초상화
디에고 리베라 <꽃>
한쪽 벽면을 차지할 만큼 대형 작품이다. 호크니는 영국 태생으로 LA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작가는 기억을 떠올리며 할리우드힐스 집에서 산타모니카 대로에 있는 스튜디오까지 가는 길을 그렸다. 저 길 따라 드라이브했을 그가 떠오른다. 재구성된 공간은 격자무늬를 가지고 거리감을 표현하고 시점이 독특하다. LA 정경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았는지 알 것 같다.
데이비드 호크니 <Mulholland Drive: The Road to the Studio>
가까이에서 보면 꼼꼼한 채색과 명도 높은 색들의 독특한 어우러짐이 눈을 즐겁게 한다.
알렉산더 아키펜코의 <Dance>.
아이들과 한참 얘기한 작품이다. 이래서 다음날 허리가 나갔을지도..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춤을 춘다. 하지만 완전치 못한 몸, 한 사람은 팔 한쪽이 없고 다른 사람은 다리마저 한쪽이다. 그래도 그들은 한 팔로 서로의 무게를 지탱하며 춤을 춘다.
조각은 더 직관적이라 아이들이 얘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아들은 이 작품을 보고 마음이 따뜻해진다고, 사람들이 참 기특한 것 같다고 말했다. 포기하지 않는 용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서로를 의지하며 춤을 추는 아름다움을 알아챈 듯했다.
장 뒤뷔페 <Head with strong chin>, 예전에 서울대 미술관에서 전시해설을 할 때 제일 좋아했던 작가인데, 요기서 비슷한 느낌으로 또 만나다니 반가웠다. 추한 것의 아름다움을 말하며 엥포르멜에 영향을 끼친 그는 거칠고 조약한 표현으로 원시성을 드러냈다. 표면도 시멘트, 자갈, 모래 등을 섞어 매우 거칠고 형태 또한 어린아이 그림, 정신병자의 그림에서 날 것 그대로를 발견하고 자신의 그림에 드러냈다.
리처드 세라의 <기울어진 호>. 책에서 도판으로만 보다가 이 공간에 내가 있다니 새삼 감격스러웠다. 저 사이를 오고 가며 붉게 녹슨 강판이 만든 공간을 감상했다. 아이들이 술래잡기할까 봐 미리 두 손을 꼭 잡고 다녔다.
LA 카운티 미술관이라 그런 걸까. 한국 작가 단독전에, 한국근대미술 특별전시까지. 놀라울 따름이다.
박대성 작가의 수묵 작품들을 보았다.
재밌니. 저 소처럼 매일 싸운다.
야외 카페에서 애들 아이스크림 하나씩 먹이고, 나는 커피 충전했다.
맛있니. 하나에 5달러, 7천원이다. 너무 비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분 보충을 해주어야 오랜 시간 미술관에서 버틸 수 있다.
왼쪽 박대성 전시, 오른쪽 한국근대미술 전시
박서보 <원형질>
박서보의 원형질 작품을 여기서 보고 눈물 날 뻔했다. 아들을 급히 불러 얘기했다. 엄마가 과천 현대미술관에서 도슨트 처음 할 때, 네가 뱃속에 있었고 이 작품의 전시의 첫 작품이었어. 너는 수백 번 들었을 텐데, 기억할 일 없겠지만. 그래도 너랑 같이 공부하고 말하던 작품이라 엄마는 너무너무 반갑다. 어두운 색감에 비정형적인 작품이라 태교로 괜찮나 생각했지만 나는 행복했으므로. 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
이쾌대, <지화상>
BTS RM 목소리를 들으며 이쾌대 <자화상>을 보았다. 아이와 그림 앞에서 대화를 나눴다.
먼저 그림 읽기.
"엄마, 중절모는 서양 복장인데 두루마기는 한국의 의상이라 뭔가 어색한 것 같아."
"또, 팔레트의 물감과 붓은 동양화가가 아니라 서양화가이고 뒤에 물동이를 이고 가는 여자나 밭, 산의 풍경은 한국적인 것 같아."
"와 진짜 잘 찾았네. 이 작품의 제목이 자화상이래. 작가 자신을 그린 건데 작가가 자신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엄마, 내 생각엔 눈도 크게 뜨고, 이렇게 정면을 바라보고 그림의 한가운데 주인공으로 있잖아. 나는 서양그림 그리는 한국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아."
"맞아, 입술도 꾹 다물고, 눈썹도 진하고 부리부리하네. 뭔가 의지에 차 있는 것 같다. 엄마는 이 작품에서 작가가 입은 두루마기의 푸른색이 눈에 띠어. 뒤에 붉은 치마와 대조가 되어 더 선명하고 힘찬 느낌을 주는 것 같아. 하늘도 푸르고, 옷도 푸르고, 물도 푸르고."
"응. 그러니까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만 같은 그런 그림이야. "
"너는 자화상을 그린다면 어떻게 그려볼래?"
"나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손에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릴 거야. 포켓몬 카드랑, 책이랑, 옥수수수염차랑.."
6시간쯤 보고 나오니 날이 개고 LA 바이브.
미술관을 나오며 아이들이 입장할 때 붙였던 스티커를 내 가슴에 붙여주었다. 딸은 스티커 색깔들이 가을 같다며 갑자기 감이 먹고 싶다고 했다. 감? 감은 미국에선 정말 구하기 어려운 귀한 과일인데. 캘리포니아 오렌지나 자몽이 떠오르진 않나 보다. 먹는 것을 보아하니 우리의 정체성은 확실히 한국인이다. 미국 미술관이지만 오늘은 왠지 한국을 많이 생각나게 하는 날이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 LA 한인식당에서 빨갛고 뜨거운 북창동 순두부를 먹으며 그리움을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