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에세이
부단히도 풀어내고 싶지만 마음만큼 따라주지 않는 영역들. 그중 제일이던 게 사람과의 관계였다. 인간 관계가 건강치 못하다는 생각이 잊지도 않고 틈틈이 찾아온다. 이따금씩 헛삶에 대한 고민이 들 정도로 깊어지던 순간도 있다. 세월을 머금은 지층에 다채로운 퇴적층이 쌓이고, 나무가 겹겹이 나이테를 품어내듯 개인사에도 사람이 오간 흔적이 축적된다. 하지만 자연이 품어내던 넓은 품들과는 달리, 좁아져만 가는 내 모습에 주눅만 늘어만 갔다. 변화의 결과물로서 나날이 늘어나던 주름과는 반대로, 쪼그라드는 관계들을 곱씹다 보면 회의감이 밀려들곤 했다.
어렸을 때는 부러웠다. 축하 선물과 메시지를 끊임없이 받는 사람들이. 무리에 둘러싸인 주인공들이 빛나 보였다. 줄이는 법은 모른 채 '아는 사람'을 늘려가기에 바빴을 때, 친구 '숫자'가 스펙이라 여겼던 시기에는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런 게 주요한 인간관계 척도인 줄로 여겼다. 전화번호부의 밀도보단, 두께에 집중하곤 했던 이유다.
그러다 정작 내 편이 어디 있을까 하는 순간과 맞닥뜨린다. 살다가 한 번쯤은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 혼자 남겨질 때가 오고, 듣도 보도 못한 뒷소문이 나를 배제한 채 퍼져나가기도 하듯이. 카카오톡과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속 빼곡한 사람들 중에서 금방이라도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손에 꼽히지 않을 때, 지난 과거 속에 남겨진 빈 공간들은 허무해져만 간다.
줄어가던 주변을 보며 착각하던 날들이었다. 숫자의 감소가 두려웠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돌아보면 외려 그게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건반 위엔 그리도 많은 음이 있다지만, 세 손가락이면 충분한 건데. 세 손가락으로 짚은 3개의 음으로도 화음은 충분히 드러난다. 아무렇게나 3개를 모은다고 나지도 않는다. 서로의 빈 음정을 보완해주는 세 가지 음이 모여야만 발하는 소리니까 그렇다. 억지로 세 음을 눌러봤자, 듣기 싫은 불협화음만 발생하는 법이고. 음 사이사이는 빼곡해 보였지만, 적절히 지키던 은밀한 거리감이 있었다. 다단한 음계들 중에 황금률을 따르는 세 개의 거리감 말이다.
자석의 같은 극을 억지로 맞닿으려고 애를 써본들 그건 미련이다. 자성이 약한 자석이라면 잠깐은 기어코 붙여내겠지만, 지속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런 불가항력에 에너지를 쏟아낼 때, 사람은 한없이 나약함을 체감한다. 악의도 없는 멀어져 감에 억지로 이유를 붙여가며 자책한다. 내가 편협하고 약한 존재인가, 나는 주변 하나 보듬지도 못하는 작은 사람이구나 하면서. 숱한 멀어짐 속엔 나의 잘못, 나의 못남이 있는 건 아니다. 상대의 부족도, 상대의 탓도 아니다. 애당초 불가능한 일은 애써 해야 할 일이 아니다. 거리 없던 운집의 비애는 이미 모두가 목도했다.
그러니 애달픈 순간에도 전화 한 통이면 꾸밈없이 웃을 수 있는 두세 명이 있다면 족하다. 여러 사람의 축하와 위로보다, 그 전화 한 통에 깃든 진심 어린 한 마디에 다시 살아갈 힘을 얻어내곤 한다. 화음은 음이 많다고 해서 더 잘 나오지 않는다. 내가 어떤 소리를 내더라도 내게 필요한 음을 내어주는 사람. 여러 손가락으로 건반을 억지로 누르지 않는 까닭이다. 가장 편안하던 소리는 분명 세 손가락이 닿았을 때 나곤 했다. 그건 분명 우연이 아닌, 법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