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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Oct 15. 2021

비건 지향인으로 1년 반 동안 살아 본 후기

처절한 실패, 그럼에도 다시

비건 지향인으로 1년 반 동안 살아 본 후기

9.8     



내가 처음 채식을 하기로 결심한 날이 정확히 몇월 며칠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기후위기에 대해 조금씩 배우고 있었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지구가 처절하게 파괴되고 있는 건 오래전부터 알았지만 정말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는 없었다. 더 배우고 더 알아가다 내 미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지구가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가장 효과적인 것은 채식이라고 했다. 기후위기에 시점으로 비건을 살피다가 동물권과 종차별주의라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내 몸뚱이가 비인간 동물의 고통으로 빚어졌다는 진실을 인정했다. 나와 사람들과 동물들과 지구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나는 채식을 하기로 했고, 열심히 했다.

처음부터 내가 완전 비건을 할 수는 없을 거로 생각했다. 학교에 다니고 있고, 학교에 비건 메뉴가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어패류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처음 비건 지향을 결심하고는 정말 고기도 달걀도 우유도 먹고 싶지 않았다. 부위별로 쪼개지기 전 살아있었을 동물이 떠올라서 불편하고 거부감이 들었다. 어쩐지 물고기들은 소, 닭, 돼지보다 마음이 덜 쓰였기 때문에 어패류는 먹기로 했다.

처음에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생각보다 채식하기가 더 어려웠다. 비건 식당은커녕 비건 메뉴가 있는 식당도 없었고 고기와 달걀을 빼달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깜빡했다. 편의점에서 파는 거의 모든 것들에는 고기, 우유, 달걀 중 하나가 꼭 들어가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채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완고한 편식쟁이였다. 내가 채식을 한다니까 주위에서도 놀라워했다. 내 편식은 내가 만났던 어떤 선생님도 고치지 못한 것이었다. 어린이집을 다닐 때 내 편식을 고치려고 내가 남긴 파와 양파를 내 입에 쑤셔 넣고 삼킬 때까지 앉혀놓은 선생님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폭력적인 방법이다. 그 선생님은 내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나는 아빠가 나를 데리러 오는 퇴원 시간까지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그것들을 삼키지 않았다고 한다.

편식은 유치원에서도 초등학교에서도 중학교에서도 지속돼 고등학교에서도 나는 잔반 없는 날을 두려워했다. 그랬지만 나는 나를 믿었다. 나는 한다면 하는 여자라며 사람들에게 큰소리치고 다녀버렸고, 저것들을 다 먹지 않고는 정말로 굶어야 할 수도 있었으므로 나는 채소를 먹기 시작했다.

채소를 멀리하던 버릇을 고치고 두부와 버섯으로 만든 음식을 섭렵했다. 비건 식당을 찾아다니며 감탄하고 직접 요리도 했다. 내 손으로 처음 비건 피자를 구운 날, 나는 정말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굉장히 뿌듯했고 내가 이런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나는 할 수 있었다.

채식을 결심한 그 날 가족들 앞에서 뜬금없이 앞으로 비건을 지향하며 살 거라고 선언했다. 가족들은 나를 존중해주고 내가 지향하는 가치에 공감했다. 가족은 함께 채식해 줬다. 집에서는 물론 내가 없는 곳에서도 고기를 먹지 않기로 한 모습에 찐하게 감동하고 나는 참 존중받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친구들을 만날 때도 양해를 구하고 최대한 채식 식당으로 갔다. 내게 고기를 강요하는 사람은 없었다. 편식쟁이로 유명하던 내가 채식을 한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나는 콩밥을 정말 싫어했지만 이제는 맨밥이 아쉽고, 깐풍가지와 버섯 꿔바로우와 두부튀김을 사랑한다. 죄책감도 불편함도 없이 즐겁게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나는 물살이만 먹다가 물살이도 안 먹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마카롱을 먹을 때 방울토마토를 먹었고 급식에 갈비찜이나 감자탕이나 선짓국이나 돈가스나 생선가스가 나올 때 식당 뒤편에서 구운 두부와 김을 꺼내 먹었다. 반 친구들이 둘러앉아 치킨을 먹을 때는 엉덩이 한 걸음 뒤에서 혼자 샌드위치를 먹었다. 그런데 샌드위치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허기가 졌다. 배는 불러서 터질 것 같은데 뭘 먹은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실천하고 있었고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눈치가 보였다. 박탈감이 들었다. 외로웠다. 점점 더 많이 그랬다. 점점 더, 더, 더 많이.

채식은 힘들었다. 갈수록 힘들었다. 비건에 가까워지려고 애쓸수록 더욱 힘들어졌다. 비건은 에베레스트보다 더 높은 산꼭대기 같았고, 나는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전혀 힘들지 않은 척, 한 번도 미끄러지지 않은 척하고 있었다. 나는 한다면 하는 여자(...)라는 웃기지도 않는 큰소리를 뻥뻥 쳐 놓았으니(나는 나를 얼마나 믿었던가….), 사람들은 내가 채식을 계속한다는 것에 감탄했다. 나 이제 못하겠다고 고백할 수 없었다.

비건이 옳다고 생각한다. 옳은 일을 해야 한다. 과학적으로 밝혀졌듯이 문어의 지능은 개나 고양이와 비슷하고 감정도 느낀다. 땅을 걷는 동물도 물을 헤엄치는 물살이도 고통을 느낀다. 공장식 축산은 현존하는 지옥이나 다름없다. 여성의 투표권도 노예제도 폐지도 과거에는 소수만이 옳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그 소수의 말이 맞았다. 동물권도 기후위기도 똑같다고 확신한다. 몇 세기 후의 미래 사람들은 동물을 이토록 학대했던 21세기 인간들을, 기후위기에도 꿋꿋이 지구를 파괴하던 사람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몇 세기 후 인간은 다 얼어 죽거나 타 죽었을지도…?) 다 알고 있다. 모른 척할 수 없다. 뻔히 알고 있는데 모른 척하면 안 된다. 그러면 안 되는 거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옳은 길을 걷고 있는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스트레스는 하루가 다르게 쌓여갔다. 내 견고했던 결심은 서서히 흘러내렸다. 태양 아래 눈사람처럼 속절없이 녹았다. 나의 단단한 결심으로 만들어낸 겨울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폭풍의 계절이 왔다. 의지를 마구 뒤흔드는 욕망의 폭풍에 끼니마다 무너져내렸다. 내 믿음은 신기루처럼 간데없었다. 고기반찬을 보고 먹고 싶어 하는 나를 발견했을 때 내가 이제는 그저 버티고만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곧 완전히 주저앉았다.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먹는 것으로, 그것도 폭식으로 푸는 나쁜 습관이 있다. 어느 날 자제력을 잃었다. 음식에 고기가 있는 것을 똑똑히 알면서도 아구아구 먹었다.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날부터 밤마다 편의점으로 달려가서 고기 즉석식품을 잔뜩 사와 배가 터질 때까지 먹었다. 처음 며칠은 일탈이라고 여겼다. 내일부터 마음 단단히 잡고 다시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멈출 수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먹지 않았던 고기양을 만회하겠다는 것처럼 먹어댔다. 나는 정말로 실패했다. 끔찍하게 절망스러웠다. 이젠 어떡하나. 정말 어쩌면 좋은가.

몹시 부끄럽게도 나는 겉으로는 계속 채식을 하는 척했다. 멀쩡한 척.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척. 그냥 조금 뒷걸음친 척. 계속 채식하는 척. 고기를 먹는다는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척. 완벽한 척. 옳은 일만 하는 척.  

    

아아아아아, 정말로 돌이킬 수 없었다. 나는 좌절했다. 고기를 잔뜩 먹은 것도 모자라 뻔뻔하게 얼굴에 철판을 깔고 다녔다. 그토록 공감했던 동물의 고통은 다 어디 갔지? 종차별주의라는 단어를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충격은 고기에 싸서 같이 먹어버렸나? 이럴 수가. 이럴 수가! 해내지 못했다. 나는 해내지 못한 사람이었다. 실패했다. 장렬히 실패했다. 나는 실패자, 그것도 사람들을 기만하기까지 한 실패자였다.     

사람들이 이렇게 꾸준히 채식하다니, 대단하다고 했다. 손뼉을 쳤다. 나는 그냥 딱 죽고 싶었다. 눈을 꼭 감았다. 제발 내게 아무 말도 하지 말아주세요. 채식 그까이꺼, 별거 아니라고 해주세요. 제발 채식 얘기 그만해 주세요….

‘나무는 채식해서 이거 안 먹어.’ 맞는 말인데 남이 그런 말을 하니까 왜 이리 불편하고 부담스러운지 알 수가 없었다. 친구에게 이제는 물살이를 먹는다고 말했다. 아니, 물고기는 먹는다고. 친구는 잘됐다고, 이제 좀 더 편하겠다고, 물고기까지 안 먹는 건 말도 안 된다고 했다.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가장 가까이에는 나를 존중해주고 내 식사를 존중해주고 나를 믿고 응원하는 사람들 뿐이었다. 그래서 정말 딱 죽고 싶었다. 내가 대단하다고 말해주는 사람들밖에 없었다. 그래서 몹시 절망스러웠다. 너무 부끄럽고 미안했다. 내가 실패했다는 것도 몹시 부끄러웠지만, 그 사실을 숨기고 한 점 부끄럼 없이 사는 척한 게 정말정말정말 부끄러웠다. 나는 내가 실패했다는 것을 들키기 싫어서, 내가 사람들을 기만했다는 것을 들키기 싫어서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다시 채식을 시작했다. 내가 수치스러울 정도로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 사람들을 기만하기까지 했다는 건 영원히 비밀로 하려고 했다. 답답한 가슴을 붙잡고 털어놓을까 0.5초 정도 고민했다가 다시 영원히 들키지 않기로 다짐했다. 전보다 세 발짝쯤 물러난 것만 내보였다. 그 전처럼, 비건에 가까운 정도로 다시 채식을 할 수 없었다. 다시 물살이와 유제품을 먹는 나, 뒷걸음질을 쳐도 한참 친 나를 보고도 사람들은 별말 하지 않았다. 고마웠다. 가끔 이제 다 먹냐고, 잘 됐다고, 전에는 불편해서 못 살았다는 친구를 만나면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어느 점심시간, 고기 음식을 보고 침을 꼴깍 삼켰다. 침 넘기는 소리가 너무 큰 것 같아서 심장이 내려앉았다. 누군가에게 들리지 않았을까 사방을 살폈다. 내가 고기를 보고 군침을 삼켰다는 것을 누가 봤을까봐 심장이 벌렁거렸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아니 다행이지 않았다. 그냥 차라리 발각되어 낱낱이 까발려지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나 이렇게 못난 사람이란 걸 절대 들키고 싶지 않으면서도, 그냥 들켜서 속 편하게 살고 싶기도 했다.      

글을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내놓기로 했을 때, 기후위기와 채식 이야기는 꼭 쓰려고 했다. 많은 사람이 하는 이야기지만 더 많이 이야기될 필요가 충분히 있는 주제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참 자리에 앉아있어도 나는 그 주제로 글을 쓸 수 없었다. 다른 주제들은 열심히 썼다. 기후위기에 대한 글을, 비건과 채식과 동물권에 대한 글을 유독 쓸 수가 없었다. 실패해버린 나를 내보일 용기가 없었다. 내가 이렇게 한심하고 추한 인간이라는 것, 사람들을 심하게 기만했으며 결국 해내지 못한 인간이라는 것을 드러낼 자신이 없었다. 이 진실을 숨기고 쓰는 글은 기만의 끝판왕이었다. 그것만큼은 할 수 없었고,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잘하고 싶었다. 진심으로 잘하고 싶었다. 동물의 고통을 소비하고 싶지 않았다. 기후위기에 이바지하던 과거를 청산하고 기후 위기를 막는 데 애쓰고 싶었다. 나 자신에게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살고 싶었다. 채식이라는 단어를 한 번 더 떠올리게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채식을 시도하는 사람에게 도움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꾸준히 채식해서 고기 먹은 지가 언젠지 기억도 안 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몸이 고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채식을 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실패자 말고.     


그러나 나는 실패했다. 그게 진실이었다. 나의 처참한 실패 사실을 들으면 함께 채식하는 사람들이 허탈해할 것 같았다. 그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 실망할 것 같았다. 채식은 실패하기 마련이라고 널리 알려지는 예시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숨겼지만, 꼭꼭 숨겼지만…. 더 이상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을 기만하고 싶지 않다. 나는 실패했다.

거짓말해서 미안합니다. 못 참고 고기를 먹었습니다. 실패했습니다. 나는 언제나 한다면 하는 여자가 될 수는 없었나 봅니다. 한다고 했던 모든 것을 성공시킬 수는 없더라고요.     


그렇다. 나는 실패했다. 그래도 채식이 하고 싶다. 비건으로 살고 싶다. 기후 위기를 막고 싶고, 고통받는 동물들을 해방하고 싶고, 종차별주의를 타파하고 싶다. 실패했지만 그래도, 다시 하고 싶다. 그래서 다시 한다. 산봉우리 몇 개 돌아온 곳에서 다시. 이러다 또 실패하는 게 아닌가 걱정스럽기도 하다. 내가 또 애쓰다가 또 실패하면, 시도와 실패만 반복되면 아무 소용 없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보고 결론을 내렸다. 아니다. 소용 있다. 나는 실패를 겪고 좌절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게 중요하다. 포기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내 발로 짓밟은 내 모습이 추해서 견딜 수 없었지만, 한다면 하는 여자는 못 되었지만, 다시 시도하는 여자다.

내가 왜 실패했는지를 곱씹어 봤다. 내가 실패한 원인 중 가장 큰 것은 나를 너무 채찍질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너 완벽한 비건이 되어라' 고 하지 않았다. 내가 그랬다. 내가 완벽한 비건이 되고 싶었다. 욕심이 너무 많았다. 나를 압박해서 나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줬다. 너무 힘들면 좀 물러나서 추스를 시간을 가졌어야 했다. 힘들다고 털어놓고 공감도 받고, 응원도 받고, 좀 더 괜찮은 방법은 없을지 살펴보다가 다시 발을 뗐어야 했는데 나는 그러질 못했다. 멈추면 안되는 줄 알았다. 안 멈추고 직진하다가 절벽에서 발을 헛디뎌 아주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게 가장 힘든 것인 줄 모르고.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이 말은 채식을 시작하며 읽었던 책과 영상에 늘 빠지지 않고 들어있는 말이었다. 많이 읽고 여러 번 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렇지, 완벽하지 않아도 되지. (나만 빼고.) 나는 시작부터 완벽한 비건을 할만한 요건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완벽주의에 빠져 결국 실패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니 다시 시작할 때는 나에게도 면죄부를 주기로 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내 주변에 나와 함께 해줄 사람이 많았다. 사람들은 나를 비난하지 않았다. 나를 존중하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내가 실패했다고 손가락질할 리 없는데, 지레 겁먹지 않아도 됐다. 쉬었다 가도 됐다. 뒷걸음질 쳐도 됐다. 아예 뒤돌지만 않으면 괜찮았다.

나는 감히 내가 비건 지향인이라 적겠다. 나는 비건이 정말 너무 진짜로 간절하게 되고 싶다. 그래서 충분히 쉬었다 가려고 한다. 마법처럼 뚝딱, ‘나는 이제부터 비건 얍!’ 할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나는 그게 안 되니까 천천히 갈 수밖에 없다. 다시 비건을 향해 산을 오르는 나의 다짐은 ‘절대 고기를 먹지 말자’가 아니다. ‘절대 포기하지 말자` 다. 포기하지 않다 보면 산을 낮아지고, 길은 탄탄해지고, 나와 함께 올라가는 사람들은 많아질 거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내가 이 글을 쓰는 사이 정말로 함께 채식하는 친구들이 더 생겼다. 이 친구들도 채식하다가, 포기했다가, 다시 하기로 한 친구들이다. 너무 멋지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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