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트 실패기
그건 곧 끊어질 듯 팽팽한 고무줄 같던 다이어트의 끝에서 시작되었다.
어릴 때 나는 심한 편식과 밥 먹는 속도 때문에 혼나곤 했다. 내가 하도 늦게 먹으니 유치원 선생님이 조건을 걸었다. 내가 빨리 먹으면 반 친구들 모두 점심시간에 놀러 나갈 수 있지만, 내가 시간 안에 먹지 못한다면 그날 점심 놀이는 없었다. 나는 내 책상을 둘러싼 아이들의 아우성을 들으며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했다.
어떤 선생님은 내 편식을 고치겠답시고 내가 남긴 음식들을 내 입에 억지로 쑤셔 넣고 삼킬 때까지 자리에 앉혀놓았다. 나는 굴복하지 않았다. 해가 지고 아빠가 나를 데리러 올 때까지 입에 물컹물컹한 야채들을 물고 있느라 침을 뚝뚝 흘렸다고 한다. 편식은 꼭 고쳐야 하는 일일까? 나는 그런 괴로운 일들을 겪으며 편식이 이렇게 탄압받을 일인지 의문을 가졌다. 어쨌든 나는 빨리 먹는 것에 늘 실패했고, 초등학교에 들어와서도 잔반 없는 날에 벌벌 떨고 배고픔을 모르겠다고 말하는 쪼그마한 애였다.
밥시간마다 혼자 남겨져서 욕을 먹었던 나는 빨리 먹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쯤부터 빨리 먹는 것을 넘어 거의 흡입하듯이 음식을 목구멍에 쑤셔 넣을 수 있게 됐다. 빨리 먹는 법을 배움과 동시에 먹는 것에 중독된 듯이 군것질을 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기숙사 학교에 다녔는데, 먹을 것을 탐하기 시작하고부터 집에 갔다가 학교에 올 때마다 캐리어 구석구석 과자를 잔뜩 숨겨서 들어왔다. 그때부터 점점 살이 올랐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통통해지며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다 ‘진짜’ 다이어트를 하기로 결심했다. 학교를 다닐 때도 친구들과 매일매일 다이어트를 외치고 다녔지만 진지하게 해본 적은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그맘때는 있는 게 시간이었는데, 나는 그 시간의 대부분을 다이어트에 쏟아부었다. 나는 나 자신이 무엇이든 하겠다고 진심으로 결심하면 정말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엄청난 자기 확신을 다이어트 따위에 발휘한 것이다. 그때 갖고 있던 자신감을 다른 곳에 쏟아봤으면 어땠을까? 지금에서야 그런 후회를 한다. 그 다이어트를 시작으로 내 남은 평생을 함께할 것 같은 폭식이 찾아왔으니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때로 가겠다고, 또 후회한다.
다이어트를 하기로 하고 자료조사를 열심히 했다. 어떻게 하면 가성비 있게, 효과적으로 감량할 수 있을까. 나는 음식 몇 가지를 골랐다. 토마토, 고구마, 해동한 닭가슴살, 그리고 오이 조금이 내 주식이었다.
나는 내가 먹는 모든 음식의 칼로리를 계산했다. 고구마와 닭가슴살을 저울에 올리고 계산기를 돌렸다. 하루 세 번 칼로리를 계산한 식단 말고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가족과 식사를 함께하지 않고 따로 먹는 일이 잦았다. 하루에 1000칼로리는 먹었던가? 그 음식들은 맛이 별로 없었다. 요리같은것도 전혀 하지 않고 맛있는 닭가슴살같은 식품을 사먹을 생각도 못했다. 그래도 먹을 수 있다는 것 자체는 행복한 순간이었는데, 그 순간도 3분이면 끝이었다.
하루에 만 보는 무조건 걸었고 걷거나 자전거로 40분거리인 수영장에 가서 한 시간 죽어라 수영을 한 다음 돌아왔다. 새벽에 일어나 집 앞의 남산을 도는 산책로를 뛰었다. 매일매일 일주일에 5킬로가 빠진다는 유튜브 영상을 따라 했다. 땀을 눈물처럼 흘렸다. 너무 힘들었지만, 체중계에 올라가면 견딜 수 있었다. 조금씩 줄어가는 숫자만이 그 나날 중 단 하나의 기쁨이었다.
생리가 멈출 때까지 살을 뺐다. 생리가 멈추고도 계속 뺐다. 걱정하는 가족에게는 생리가 멈추니까 편하다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갖은 노력과 힘겨움 끝에 거울 속에서 비쩍 마른 나를 볼 수 있었다.
살을 빼니까 보기 좋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이 너무너무 기뻤다. 메달을 받은 것 같았다. 곧 너무 말랐다, 좀 쪄야겠다는 말도 들었다. 그건 트로피였다. 그것도 금으로, 아니 다이아몬드로 만든 트로피.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다이어트에 성공한 나에게 세상이 수여하는 자랑스러운 상패였다. 그렇게 다이어트에 성공했다. 성공한 줄 알았다. 나는 그 몸을 조금도 유지할 수 없었다. 폭식이 찾아왔다.
어느 날 뭔가 너무 먹고 싶었다. 욕구를 다스릴 수 없었다. 참을 수 없는 허기가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내 손과 발은 이성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먹을 수 있는 게 더는 없을 때까지 집안 곳곳을 뒤져 음식을 찾아냈다. 배가 찢어질 듯이 아플 때까지 먹었다. 그리고도 또 먹었다.
아무에게도 내가 폭식을 하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몰래몰래, 모두 잠든 밤에 자전거를 타고 편의점에 가서 음식을 잔뜩 사 왔다. 꾸역꾸역 먹었다. 배가 찢어질 것처럼 부풀어 올라 괴로웠다. 가장 괴로운 건 게워내고 싶었지만 게워 낼 수도 없다는 걸 알았을 때였다. 목구멍 바로 앞까지 음식이 들어차 있는데 아무리 목젖을 쑤셔도 나오는 게 없었다. 그래도 더 먹고 싶었다. 허기가 졌다.
그렇게 폭식을 하면 하루 만에 1킬로씩 다시 살이 쪄 있었다. 그럼 다시 다이어트를 했다. 몸무게가 줄면 안심했다. 그러다 또 허기를 느꼈다. 위 속에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구덩이가 있었다. 하루하루가 위태로웠다. 다이어트를 계속할 수 없었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더는 하루의 절반 이상을 운동에 쏟아붓고 몸무게에 일희일비하는 삶을 살 수 없었다.
거의 반년 만에 나는 다이어트를 포기했다. 운동을 모두 그만두고 침대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배가 찢어질 것 같을 때까지 먹는 것을 반복했다. 폭식은 주야장천 이어졌다. 매일 밤 폭식에 폭식을 거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 사람들이 내 몸의 변화를 알아챘다. 곧 다이어트를 결심하기 전보다 훨씬 살이 쪘다. 배와 허벅지에 튼 살이 잔뜩 생겼다. 주위에서 나를 볼 때마다 놀랐고, 심지어 못 알아보기까지 했다. 가족은 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나는 체중계에 올라가지 않았다.
아마 80kg쯤 나갔을 것이다. 가장 무거웠던 그때 체중계는 쳐다도 보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무게를 모른다. 그때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얼마나 살이 붙었는지 내 모습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 거울을 피했다.
나는 한동안 내 몸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즐겁게 먹었다. 폭식은 잊을 만 하면 다시 찾아왔다. 가족은 침대에서 움직이지 않고 먹기만 하는 나를 걱정했다. 다이어트를 하는 동안 못 먹었던 가공식품과 각종 군것질거리를 밥처럼 먹었다.
나는 위태롭던 내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 애썼다. 우리 집 안에서 내 몸에 대한 어떤 언급도 용납하지 않았다. 아주 날카롭게 반응하거나 대답하지 않았다. 내 방에 틀어박혀 꼼짝하지 않았다. 산책을 가자 거나 장을 보러 가지 않겠냐는 물음에 대부분 싫다고 답했다. 오직 내가 먹을 것을 사러 갈 때만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극과 극을 달렸다. 운동만 하고 거의 먹지 않기, 움직이지 않고 먹기만 하기. 내 몸에 못 할 짓을 일 년 새에 다 해본 것 같다. 페미니즘을 배우며 깨달은 것과는 전혀 다른 행동이었다.
페미니즘은 다이어트를 결심하기 전부터 배우고 있었다. 예쁨에 대한 강박, 마른 몸에 대한 강박과 그것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내 몸을 혹사하며 다이어트를 하는 건 페미니즘이 설명했던 내 몸을 긍정하라는 메시지와 정반대였지만 무시했다.
마른 몸을 갖고 싶었다. 예뻐지고 싶었다. 엄마가 왜 살을 빼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결코 내가 예뻐지고 싶어서, 빼짝 마른 몸매를 갖고 싶어서 다이어트를 한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다. 부끄러웠다. 나는 내가 평소에 아주 잘못됐다고 굳게 믿는 사회적 ‘예쁨’의 틀에 갇혀 있었다. 아주 단단히.
몇 달간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운동은 하지 않으며 살았다.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새로운 사람들과 만났지만 내 몸을 다시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았다. 먹고 싶은 대로 먹어도 마음이 편했다. 내 모습은 내 삶과 크게 관련 없는 것 같았다. 뚱뚱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폭식은 꾸준히 내 곁에서 얼굴을 비췄다.
1학년 여름방학을 끝내고 돌아왔는데 오랜만에 본 친구가 어? 하더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고 했다. 그 한마디를 시작으로 나는 다시 거울에 비친 내 몸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하는 살 빼야겠다는 말은 나도 다이어트하는데 너는 뭐하냐는 말 같았다. 나는 거울을 들여다봤다. 내가 너무 끔찍했다. 내 몸이 너무 끔찍했다. 나보다 훨씬 가벼운 친구들도 다이어트를 하는데,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나?
저 밑바닥에 뿌리만 남아있던 마르고 싶다는 욕망에 물이 뿌려졌다. 물뿌리개는 비가 되고, 폭풍이 되고, 바다가 되었다. 밀물이 밀려왔고, 나는 한번 잠긴 적 있는 물에 다시 잠겨 허우적댔다. 가장 고통스러운 썰물의 시간이 올 때까지 앞만 보고 가는 항해가 시작된 것이다.
나는 절식을 했다. 나는 학교에서 자주, 집에서 가끔 일부러 조금만 먹었다. 매일 밤 잠들 때는 내일 먹을 음식을 계산하며 눈을 감았다. 한 끼를 배부르게 먹거나 과식을 한 것 같으면 다음 끼니를 먹지 않거나 조금 먹는 방법으로 나름대로 칼로리를 맞추려 했다. 칼로리, 그놈의 칼로리…. 고구마와 토마토와 닭가슴살만 먹던 지옥으로 자신을 몰아넣었다가 처절하게 후회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으면서 칼로리의 지옥에 다시 내 발로 기어들어 갔다.
일주일에 한 번씩 체중계에 올랐다. 체중계를 볼 때마다 내 몸무게를 확인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몸무게가 조금이라도 줄었으면 그동안 적게 먹고 배가 고파도 참았던 건 옳은 행동이었고, 계속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몸무게가 늘었거나 그대로면 나는 일주일 동안 잘못 산 것이었다. 옳지 않은 일이었고, 옳은 행동을 해야 했다.
나는 더 먹고 싶어 하는 나를 다독이며 운동과 식단 조절을 병행했다. 점점 몸무게가 줄었고, 살이 많이 빠졌다는 소리를 들었다. 과체중에서 평균 정도로 내려온 것 같았다. 당연하게도 멈출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운동에 대한 열정이 식었다. 운동하지 않으니 몸무게가 줄지 않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나는 마르고 싶었다. 계속 매 끼니 절식을 했다. 더 먹고 싶어도 꾹 참고 배부른 척을 하거나 입맛이 없는 척을 했고, 대답하기 영 곤란하면 아예 입을 다물었다.
학교에서는 사람들이 내 세 끼의 양을 꼼꼼히 신경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집에서는 곤란했다. 먹는 양이 줄었다는 말을 들어도, 일부러 그러는 거냐고 물어도 이를 꽉 깨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대충 얼버무리고 내 방으로 도망갔다. 제발 내게 신경을 꺼 줬으면 했다. 일부러 적게 먹냐는 질문, 그 질문은 너무나도 수치스러웠다.
나는 내가 다이어트 중이라는 것을 숨겼다. 한번 죽어라 다이어트를 하고 깨달았다며 다이어트 할 필요 없다고, 네가 왜 살을 빼냐고, 괜찮다고 친구들에게 말하고 다녔던 내가 몰래 다이어트를 한다는 것을 들킬 수는 없었다.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살을 빼려고 운동을 다녔지만, 근육을 단련하려고 한다며 거짓말을 했다. 몇 숟갈 먹지도 않고 배가 부르다고, 배가 고프지 않다고 거짓말했다. 내 외모를 신경 쓰지 않는 척했다. 부끄러웠다. 내가 절실하게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는 것, 내가 그만큼 절실하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덜 먹는 다이어트는 실패하기 마련이다. 한번 경험해서 똑똑히 알고 있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미련하게도 똑같은 일을 반복했고, 결국 똑같이 다시 부풀어 올랐다.
예정된 썰물의 시간이 되었을 때 나는 먹는 것에 돈을 무지하게 썼다. 평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을 가격이었지만 나는 이미 이성을 잃어있었다. 겉으로 멀쩡한 척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하루하루 1킬로씩 불어나고 있었다. 이 심각한 상황을 멈추려고 심지어 나는 변비약을 한 움큼씩 삼켰다. 너무너무 먹고 싶었지만, 너무너무 마르고 싶었다. 내 몸을 망치기만 하고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 그런 방법을 써서라도,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마르고 싶었다. 당연하게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동안 학교에서는 폭식이 잘 찾아오지 않았다. 주로 집에 왔을 때, 언제든 달려갈 수 있는 편의점이 근처에 있을 때 강렬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눈을 뜨고 있으면 허기를 느꼈다. 밥을 많이 먹고 배가 불러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았다. 학교에서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먹었다.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먹고도 참을 수 없어서 택배를 시켰다. 일반음식을 박스째 시키는 건 금지되었지만 몰래 주문했다. 내가 늘 먹고 있고 너무 많이 먹는다는 사실을 들키기 싫어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숨어서 먹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내가 너무 추하게 느껴졌고 자괴감이 들며 부끄러웠다. 그 모든 감정과 스트레스는 다시 먹고 싶은 욕망을 불렸다.
배가 찢어질 것 같이 불렀다. 괴로워서 다시 뱉어내고 싶었지만 늘 실패했다. 음식들은 내 위에서 고정된 것 같았다. 너무 먹어서 잠들 수 없었다.
앞자리가 7이 될락 말락 하자 폭식은 조금 잠잠해졌다. 나는 그 몸무게에 고정된 것 같았다. 내려가기 위해 아무리 애를 써도 고무줄처럼 제자리로 돌아와 버리는 몸.
나는 절망했다. 정말 절망스러웠다. 이게 나라니. 이게 정말 나라니. 이 끔찍한 몸이 내 몸이라니. 나는 꿈을 꿨다. 매일 꾸는 꿈속의 나는 그 전의 나였다. 내 무의식이 인지하는 나는 아직 그 전의 나였다. 현실의 부풀어 오른 내가 아니라. 다 괜찮은 것 같다가도 꿈에서 깰 때마다 다시 비참해졌다. 꿈의 기묘하고 흥미로운 다른 어떤 내용보다 그 전의 내 모습이 가장 선명했다. 그 전의 나, 마른 나, 거울 앞에서 웃을 수 있던 나, 나의 몸이 아른거렸다.
나는 비참했다. 비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들쑥날쑥 늘었다 줄기를 반복하는 내 몸을, 결국 다시 부풀어 오른 나를 사람들이 어떻게 볼지 신경이 쓰여서 몸을 내놓고 다니기 싫었다. 감추고 싶었다. 문밖으로 나가기가 두려웠다.
나는 입을 바지가 없을 때마다 수치심을 느꼈다. 이제는 못 입게 된 옷을 볼 때마다 수치심을 느꼈다. 어느 곳 하나 헤진 곳 없고 바랜 곳도 없이 너무너무 멀쩡한 옷들. 비싸게 주고 산 옷들. 내 몸이 이 옷에 들어간다는 사실에 짜릿했던 옷들. 작아진 옷들. 아니 내가 커져서 못입게 된 옷들. 너무 부풀어 오른 내 몸을 끼워 넣을 수 없는 옷들. 차곡차곡 쌓인 그런 옷들이 입을 수 있는 옷보다 많은 것을 깨달은 날, 수치심 속에서 익사할 것 같았다.
차라리 정말로 그러길 바랐다. 내가 사라졌으면, 눈 녹듯이 녹아버렸으면 했다. 투명해졌으면 했다. 그냥 뿅 없어지면 이 고통을 더는 느끼지 않을 수 있을 텐데. 이렇게 괴로워질 바에야 그냥 사라지는 게 훨씬 나을 텐데…. 생각은 확고했지만 사라질 용기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였다. 다시 나를 받아들이고 사는 것과 다시 다이어트를 하는 것. 다시 그만큼 고통스러운 다이어트를 하기에는 힘이 없었다. 너무 지쳐버린 나는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수치스럽고 끔찍하고 추한 내 몸이 나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냥 살았다. 그냥 사니까 또 점점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죽어라 마르고 싶었던 이유는 하나다. 나는 사랑받고 싶었다.
나는 남의 말과 행동에 영향을 받는다. 누군들 안 그렇겠냐마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은 더 영향력이 강하다. 내 주변인뿐만이 아니라 내가 자주 보는 핸드폰의 콘텐츠들, 마른 사람들이 나오는 수많은 미디어는 눈앞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흔적을 남긴다. 마른 것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은 사랑받는다는 메시지를.
처음 다이어트를 결심하고 월경이 멈출 때까지 살을 뺐을 때도, 살 빼니까 보기 좋다는 말을 들었을 때가 가장 기뻤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랑받고 싶은 사람들이 내게 그렇게 말해주는 게 정말 정말 좋았다. 살이 점점 빠질 때마다 누군가 내게 한마디 더 해주길 바랐다. 살 빠졌네, 하는 한마디가 그렇게 듣고 싶었다. 내 수고를 알아주길 바랐다. 내게 관심가지길 바랐다. 마른 몸을 선망하는 건 남들이 나를 더 좋게 봐줬으면 했다. 사랑받고 싶었다. 내가 노력해서 다이어트를 한 만큼, 조금 더 마른 몸에 가까워진 만큼, 사람들이 더 사랑해주길 바랐다.
알고 있었다. 겉모습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 중요한 건 속에 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사랑받으려면 먼저 내가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 내가 내 모습을 인정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페미니즘이 절절히 가르쳐 준 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이해일 뿐이었다. 애써봐도 마음은 계속 마른 몸을 갈망했다. 사회가 강요하는 여성성이 얼마나 끔찍한지 잘 알고 있는데도 내 가슴은 그런 ‘예쁨’에 두근거렸다. 아무리 페미니즘 책을 읽어도 내 욕망의 뿌리를 뽑을 수 없었다. 그런 내가 또 한심하고 부끄럽고 허탈했다.
지금은 다이어트를 할 엄두도 못 내지만, 내가 다시 힘을 충전하고 마른 몸을 갖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면 또 다이어트를 하게 될까? 그래봤자 지금 모습으로 돌아오게 되지 않을까? 나는 먹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 배부르게 먹어도 더 먹고 싶다. 먹는 것은 내가 삶을 살며 느끼는 행복 중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걸 포기하는건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고, 그렇게 하는 다이어트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지만, 또 다이어트를 결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괴롭고 미련한 일을 막으려고 이 다이어트 실패기(그것도 처절하게, 두 번이나….)를 기록하기로 했다. 다이어트 욕구가 불쑥불쑥 올라올 때마다 내가 정말로 고통스러웠고, 고통스러운 다이어트는 나의 심신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으며, 이전의 몸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 오히려 더 불어난다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나와 같은 실수를 하게 되는 여자들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록한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다. 여자 몸에 대해 그만 떠들어대라고 세상을 향해 일갈해야 한다.
사실 내 몸을 괴롭히는 게 세상을 향해 목소리 내는 것보다 훨씬 쉽다. 그래서 여자들이 그렇게 자기 몸을 바꾸려고 애를 쓴다. 얼마전에 친구를 만났다. 그 애는 약을 먹으며 굶고 있었다. 살쪘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살빼야겠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쓰러질 때 까지 굶고 있었다. 그 애는 지금도 굶고 있다. 단 한번도 건강상 다이어트가 필요한 몸이었던 적 없었지만 몸에 대한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쓰러져도 살을 뺀다. 정말로 무서웠다. 그 애가 길을 걷다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할까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제발 그만해달라고 빌었다. 그 애 또한 울며 답했다. 원하는 답을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지금 이 약이 목숨과 같다고. 그 애가 자기는 30살을 넘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을 때 우리가 발 딛은 이 땅이 지옥이라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내가 월경이 멈출때까지 다이어트를 했을 때 그 애는 내가 너무 예뻐보였다고 한다. 부러웠다고 한다. 나의 고통이 또 다른 고통을 만드는것에 이바지했다는 잔인한 진실이었다. 나는 네 몸을 신경쓰지 않는 사람들과 공동체도 있다고 했다. 네가, 우리가 100kg이어도 괜찮은 곳도 있다고 했다. 네 주위의 현실이 모든 현실은 아니라고 했다. 다른 현실도 분명 존재한다고. 그 애는 잘 믿지 못했다. 나는 네가 너무 소중하고 중요해서 걱정이 된다고, 나에게는 네 몸무게 따위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 애는 그런 말을 처음 들어본다고 했다. 아무도 그런 말을 해 준 적이 없다고. 나는 내 사랑하는 친구가 이토록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때까지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것 같아서 죽도록 미안했다. 우리가 심심풀이 삼아 다이어트 이야기를 하던 그 옛날이, 그저 웃을 수 있던 그때가 너무도 그리웠다.
나는 예뻐지면 사랑받을 수 있을거라 믿었다. 그 믿음이 또 다른 고통에 일조했다. 나는 친구가 마르지 않아도, 어떤 겉모습을 해도 사랑한다. 나의 진심이 그렇듯 친구 또한 그러리라. 그러니 사랑받기 위해 예뻐져야 한다는, 말라야 한다는 나의 믿음을 틀렸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우리 자신을 학대하는 일은 그만두자. 나 자신을 위해서, 내 옆의 여자들을 위해서, 나 이후에 올 여자들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