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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Oct 07. 2021

같은 유두인데

같은 유두인데

6.12



브래지어를 하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5학년쯤이었다. 그즈음부터 유방이 조금씩 부풀어 올라 티 한 장만 입으면 가슴이 있다는 게 티가 났다. 사실 브라를 하고 손을 번쩍 들면 브라가 가슴에서 미끄러졌지만, 그래도 했다. 그렇게 브라를 하다가 중학교 3학년부터 하지 않기 시작했다. 페미니즘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브라가 코르셋의 변화된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브라는 심지어 건강에도 좋지 않았다.

한 번도 브라를 왜 하는지 의문을 가진 적이 없었다. 여자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건 줄 알았다. 브라를 하는 게 여자가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브라 안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가슴이 있는 여자라면 다들 브라를 했다. 잘 때도 브라를 하고 자는 친구들도 있었다. 우리는 자기 몸에 해로운 무언가를 해로운지도 모르고 당연히 해야만 한다고 교육받으며 자라고 있었다.

중력이 있는 지구에 살고 나이를 먹는 사람이라면 살이 처지기 마련이다. 가슴도 살이고 쳐지는 게 당연하다. 가슴 처지면 안 되는 이유가 뭔가. 왜 가슴이 예뻐야 하는가. 예쁜 가슴 모양은 누가 정했는가. 유두는 남자에게도 달려 있는데 왜 여자의 유두는 가려야 하는가. 왜 여자의 유두는 야한 것으로 취급되는가. 왜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가슴 처지지 않게 막아야 하는가. 왜 답답함과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가. 페미니즘이 내게 던지는 질문들은 너무도 타당했기 때문에 납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질문들을 다시 세상에 던지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브래지어를 할 이유는 없었고, 그래서 하지 않기로 했다.

브라를 벗음으로써 내 가슴은 편해졌다. 잘 모르겠지만, ‘여성 해방’에 한몫한 것 같은 뿌듯한 기분도 들었다. 내 어깨는 움츠러들었다. 겨울에는 두꺼운 옷 덕에 걱정할 일이 없었지만, 여름에는 티 너머로 유두가 비쳤다. 까만 런닝을 여러 장 사서 늘 런닝을 먼저 입고 그 위에 옷을 입었다. 세상 사람들 아무도 내 가슴에 관심이 없어서 쉽게 브라를 벗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랬지만 가끔 시선이 느껴졌다. 모르는 사람들은 크게 상관없었다. 다시 볼 사람들도 아니고, 노브라도 다니는 여자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기도 했다.

신경 쓰이는 건 아는 사람들이었다. 내게 브라를 하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놓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는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다면 좋았을 테지만, 신경이 쓰였다. 나는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서 유두만 가렸다. 처음에는 붙일만한 것을 찾지 못해 상처에 붙이는 밴드를 붙였다. 그냥 밴드는 두 개를 붙여도 티가 났다. 니플 패치를 사 봤다. 다이소에 갔더니 꽃 모양 여성용 니플 패치가 동그란 모양의 남성용 니플 패치보다 천 원 비쌌다. 나는 남성용을 샀지만 일회용 니플 패치를 맨날 쓰자니 돈이 아까웠다. 다회용 실리콘 니플 패치를 샀다. 착 붙는 느낌이 나쁘지 않고 여러 번 쓸 수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아쉽게도 땀이 나면 너무 잘 떨어졌다. 달리다가 발등에 툭 떨어진 니플 패치를 줍는 일이 한두 번 생기고는 실리콘 니플 패치도 버렸다.

걷기 여행을 갈 때도 브라를 하지 않았다. 밴드와 니플 패치를 몇 개 챙겨갔지만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았고 티가 많이 났다. 나는 어깨를 구부리고 옷을 잡아 빼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자원봉사로 우리와 함께 걸었던 선생님이 있었다. 우리가 인터넷과 거의 단절되어있었던 그즈음 설리의 노브라 셀카가 포털사이트를 달구고 있었다. 선생님은 남자든 여자든 남의 유두를 보고 싶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날 숙소에 도착한 뒤 찬물에 몸을 씻고 니플 패치를 떼어내며 남자의 유두 노출과 여자의 유두 노출은 같은가 고민했다.

그해 가을 설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사회적 타살에 유두의 지분이 얼마 정도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남자의 유두 노출과 여자의 유두 노출은 같지 않았다. 달랐다. 그 의미가 같았다면 어떤 여자가 셀카를 올렸는데 유두가 나왔다고 갖은 욕을 듣지도 역겨운 성희롱을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남자의 유두와 여자의 유두는 다르게 취급된다. 그래서 유두 노출의 의미도 다르다. 여자의 유두는 성적 대상화된다. 남자의 유두는 사람의 신체 부위지만 여자의 유두는 야한 무언가다. 19세 미만은 볼 수 없다. 그래서 모자이크 처리까지 된다. 남자의 유두 노출은 별일 아니지만, 여자의 유두 노출은 수치고 별일이다.

‘거꾸로 가는 남자’라는 프랑스 영화에서 몹시 마초적이었던 남자 주인공은 현실과 정반대의 성 역할이 부여된 세계로 떨어진다. 그곳에서는 여성이 운동할 때 상의를 벗고 남성이 다리털을 부끄러워한다. 영화에서 보이는 여성의 가슴은 하나도 야하지 않다. 어떤 섹슈얼리티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 영화를 보고 대상을 어떻게 보는가, 카메라에 담는 방식이 어떤가 가 얼마나 중요한지 느꼈다. 여자의 유두는 야하지 않다. 브라 하지 않는 여자는 문제가 아니다. 여자의 유두를 어떻게 보는지, 어떻게 대상화하는지가 문제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 년 동안 집에 있을 때 수영을 배우러 다녔다. 어느 날 탈의실에서 옷을 훌러덩 벗었는데 내 옆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던 분이 나를 보고 말을 걸었다.     

왜 브라를 안 해?     

처음으로 모르는 사람에게 내 브라의 유무에 대한 말을 들었던 순간이었다. 나는 건강에도 좋지 않고, 브라를 하지 않는 게 훨씬 편하며 브라를 꼭 해야 되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 그분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내 말을 듣더니 가슴이 처지잖아, 하고 말했다. 나는 그건 당연하다고 했다. 탈의실에서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던 다른 분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브라 안 할 수도 있지 뭐. 자기 마음이지 뭐.     

그분들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내게 왜 브라를 안 하냐고 물었던 분은 그런가, 하며 샤워실로 들어갔다. 그런 반응이야말로 당연한 것이고 필요한 것이었을 테다. 브라 안 할 수도 있지 뭐. 자기 마음이지 뭐. 설리가 브라를 하든 말든, 자기 마음인데. 안 할 수도 있는 건데.

여러 가지 니플 패치를 전전한 끝에 지금은 종이테이프를 쓴다. 종이테이프를 좀 길게 뜯어서 두세 번 다른 방향으로 붙이면 크게 티 나지 않는다. 다만 오래 붙이고 있으면 간지럽고, 뗄 때 조금 아프다. 아직은 이것보다 나은 방법을 찾지 못했다. 매일 아침 기숙사를 나가기 전에 화장실에서 테이프를 붙이는데 가끔 짜증 날 때가 있다. 그냥 유두 좀 보이면 어때서. 그러나 아직은 테이프를 붙이지 않으면 어깨가 움츠러든다. 당당히 가슴 펴고 다닐 그날이 언제쯤 올까. 브라 안 할 수도 있지 뭐. 자기 마음이지 뭐. 모두가 그렇게 말하는 날은 언제쯤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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