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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Nov 23. 2021

얼마나 운이 좋은지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것

얼마 전까지 아르바이트 한 번 해본 적 없었다. 그런 내가 4주간 인턴십을 하고 와서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주 5일 출퇴근하는 직장인은 얼마나 대단한가’였다. 출근을 경험해보니 그저 놀라웠다. 어떻게 이 힘겨운 출근을 견디며 일을 할 수 있을까? 다음날 출근이 기다리고 있는 모든 직장인에게 절로 존경심이 들었다. 내 주변에 있는 어른들이 대단해 보이고 심지어 가엾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매주 당직 근무까지 하는 우리 학교 선생님들이라던가, 내 모부님이라던가.


나의 모부님은 공무원이다. 보건소와 소방서에서 일하는 그들은 말단 공무원이다. 우리나라 정부가 하는 일을 직접적으로 수행하는, 정부의 가장 아래쪽 손발이라고 할 수 있다. 십 년 하고도 수년간 주 5일, 때때로 주말 추가 근무까지 주 6일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했다. 그리고 얼마 전 코로나19로 가장 질병관리본부가 급박했을 때 우리 집 보건 공무원은 주 7일 출근하며 퇴근하지 못했다. 매일, 매주, 매달, 매년 그들이 일하는 게 너무 당연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내가 출근을 해보기 전까지는. 이 사람들, 지금껏 이 힘겨운 출퇴근의 시간을 어떻게 견딘 걸까. 내가 학교 가기 싫어~하고 외칠 때 출근하기 싫어~하고 외치던 아빠의 마음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기 싫어도 가야 한다. 왜냐? 내 아이스크림 사줘야 하니까.


나는 아득해졌다. 지금껏 이 힘겨운 하루하루를 견디며 나를 입히고 먹히고 재웠다니. 자기 입도 아니고 남의 입에 들어갈 음식, 남의 몸에 입힐 옷, 남이 다닐 피아노 학원을 위해 출근할 수 있는 건가? 이런 힘겨움을 감수하고 할 만큼 가치가 있는 일인가, 아이를 키운다는 건? 나는 그들이 내게 퍼준 사랑과 나를 위해 쓴 시간과 나를 위해 소비된 수많은 물건과 희생된 것들과 파괴된 환경만 한 가치가 있는가? 인간은 가치 있는 존재인가? 아이를 낳는다는 건 뭘까? 대체 어떤 마음으로 죽을 때까지 얽매일 존재를 만들 결심을 했을까? 어떻게 이 세상에 자아가 있는 한 사람을 탄생시킬 생각을 했을까?


나는 어릴 때부터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받는 모든 것들, 보살핌과 각종 물건, 당연히 사랑까지. 세상에 자의를 가진, 생각하고 말하고 행복을 느끼고 고통을 느끼는 인간을 만들어 내놓기로 했다면 그 인간의 행복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 그래서 선생님들이 내게 감사를 강요할 때마다 부루퉁했다.



부모님께 감사해야 해! 너를 낳아주셨고, 입혀주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수많은 것들을 하시잖니.

그건 당연한 것 아닌가요?

모든 부모가 너의 부모님 같지는 않단다.

그건 그 부모들의 잘못인데 어째서 제가 감사해야 하는가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니… 너는 운이 좋구나. 네 부모님은 너를 정말 사랑하시나 보다.

?



나는 이해를 못 했다. 아이를 낳으려면 그 정도 책임감과 각오는 당연한 것 아닌가. 생각을 할 수 있는 생명을 만드는 건데. 그러나 살다 보니 애완동물을 입양하는 것보다 가벼운 생각으로 아이를 낳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이를 낳아야 한다니까 낳은 사람들이 많았다. 혹은 선택조차 불가능한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내 생각에는 아주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고 있었다. 학대는 흔하고 존중은 드물었다. 사랑으로 아이를 키우라는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사랑을 줄 수 있을까. 사랑받지 못하고 어른이 된 사람들,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내 양육자들이 했던 조그만 실수들도 오래도록 곱씹으며 마음에 담아뒀다. 내가 처음으로 세상을 겪으며 이런저런 실수를 하듯 그들도 양육이 처음일 텐데 나는 용납하지 못했다. 그러나 수많은 양육자가 얼마나 많은 실수와 잘못을 하는지. 얼마나 무책임한지. 내 양육자같이 지난 실수를 후회하며 거듭 사과하는 사람은 얼마나 드문지. 어릴 때 친구들이 조심스레 꺼낸 내밀한 가족 이야기는 나를 경악시켰다. 친구의 양육자가 가하는 폭력과 친구가 느끼는 괴로움은 입이 떡 벌어질 만한 것이었다. 내 주변에 가정폭력이 존재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비슷한 이야기를 더 많이 들으면서 가정폭력이 얼마나 흔한지 깨달았다. 사회에서는 엄마와 아빠와 딸과 아들이 있는 집이 정상적이고 바람직하며 가장 행복한 것처럼 주입하지만 다 거짓말이었다. 나는 내가 친구를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무력감을 느꼈다. 친구를 고통 속에서 꺼내줄 수 없었다. 친구의 보호자로 인해 친구가 괴로워도 그건 그 집안의 사정이었다. 친구에게 모부님을 이혼시키라고 할 수도 경찰에 신고하라고 할 수도 어른이 될 때까지 우리 집에서 재워주겠다고 할 수도 없었다. 불가능하니까. 친구는 어른이 될 때까지, 혼자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먹고 자고 입고 공부해야 한다. 내가 해 줄 수 없는 일이었다. 입만 뻐끔거리다 위로를 건넬 뿐이었다. 선생님 말이 맞았다. 나는 운이 좋았다. 나는 겪지 않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친구에게 죄책감이 들었지만 내 모부님과 자꾸 비교하게 됐다. 내 양육자들은 그런 어른들보다 훨씬 나은 것 같아서 안도했다. 내가 받은 많은 것들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부터 내 양육자가 나를 아주 사랑하는 증거라는 선생님의 말을, 한참 후에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나의 보호자들이 내 행복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앞으로도 다 할 것이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는 내 보호자들을 믿는다. 그들은 나를 존중한다. 내 선택과 의지를 존중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한다. 나를 믿는다. 나를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나는 사랑받았으며 사랑받고 있다.


내가 비혼, 비출산을 결심했다고 말한 지 오래됐다. 결심은 날이 갈수록 단단해진다. 하루하루 살아가며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모두 내 결심을 더욱 확고하게 만든다. 나 자신을 위한 선택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 확고한 결심에 보호자들은 아쉬워한다. 자신들은 좋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면서. 내가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라고 하면 가능성은 열어두어도 괜찮지 않겠냐고 한다. 그들이 좋은 할머니와 좋은 할아버지가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나는 좋은 양육자, 좋은 보호자가 될 수 있을까?


아이를 낳는다는 것. 인간을 만든다는 것. 내 선택으로 자의를 가진 사람을 세상에 탄생시킨다는 것은 얼마나 무거운 의미인가. 나는 결코 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자신 없다. 내 아이에게 내가 받은 만큼 줄 자신이 없다. 상상만 해도 무한한 책임감이 느껴져서 엄두도 못 내겠다. 아니 하고 싶지 않다. 만약 내가 낳은 아이가 나처럼 생각한다면, 숨이 턱 막힌다. 내가 해 주어야 할 것이 너무 많고 내가 희생해야 할 것이 너무 거대해서.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누군가에게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본 순간 그 당연함의 무게를 체감할 수 있었다. 그 요구에 어떻게 부합할 수 있나.


나는 내가 운이 좋았다고 여겼다. 특권을 가졌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만약 내가 태어날 때 운이 좋지 않았다면 어떡하나? 어쩌다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는 가정을 가졌다면? 내 가정이 갑자기 무너진다면? 

내가 받은 사랑과 혜택들은 온전히 내 보호자의 책임이었을까. 아이를 키우려면 꼭 두 명의 보호자가, 꼭 아빠와 엄마가 필요한가. 꼭 엄마의 손에 자라야 하는가. 엄마는 필요한 일들을 모조리 해내야 하는가. 희생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나는 영원히 아이를 키울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

이것은 사회의 책임이기도 하다. 아빠와 엄마와 아이가 있는 ‘정상적인’ 가정이 언제나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정상 가족의 틀에서 사랑이 태어날지 모르나 괴로움 또한 태어난다. 훨씬 다양한 형태의 가정이 이미 있고, 그 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불행할 것이라고 선을 그어버리는 사회가 진정 아이를 불행하게 만든다.


세상에 태어난 아이는 모부가 누구든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상관없이 행복한 삶을 살 권리가 있다. 마땅히 사랑받고 부족함없이 자랐다고 믿을 권리가 있다. 그것이 운좋은 몇 명의 특권이어서는 안된다. 아이는 단 두명의 손에 온전히 맡겨져서는 안된다. 단 두명이 한 인간을 20년 +a의 시간동안 모두 책임져서도 안된다. 책임이란 이름 아래 방치와 지배, 학대의 함정이 아이를 위협 할 수도 있다. 아이를 키우는데 지원이 부족해 아이의 보호자가 아이를 부담스럽게 느낀다면 너무 슬프지 않은가.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아이를 책임지며 보호하고 끊임없이 관찰해야 한다. 아이가 성장 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국가와 사회와 그 안의 어른들이 함께 해야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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