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을 믿지 않았다. 책을 믿었다. 어쩌면 작가도. 내게 책은 복음과 같았다. 모든 책은 옳았다. 책은 소중히 여겨야 하는 물건이었다. 우리 집 책이나 내 책이 아니라도, 도서관 책이나 학교 책이더라도 책을 함부로 다루는 것은 신성모독에 가까운 일이었다. 책을 볼 때는 처음 펼쳤을 때와 동일한 상태로 덮어야 했다. 줄도 동그라미도 치지 않았고, 책장을 접는 것은 절대 금물이었으며, 책날개로 책갈피를 대신해서 구부러지게 하는 것도 못 견뎠다. 내가 규칙을 지키는 건 당연했고 남이 막 다루는 모습도 못마땅했다. 신앙심이 최고를 달했던 초등학생 때는 누가 책을 베고 자는 것도 몰래 흘겨볼 정도로 유난했다.
책에 찍혀 있는 활자들이 무슨 이야기를 속삭이든 모두 백과사전같이 명명백백한 진실 같았다. 나이를 먹으면서 책에 적힌 이야기가 언제나 옳지는 않다는 것을 차츰 배웠다.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말도 여러 번 들으며 책이 언제나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작가 입장에서는 책을 구워 먹든 삶아먹든 일단 많이 사주는 게 좋다는 것도 이해했다. 책과 작가의 신도를 자청하는 것은 곧 그만뒀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책을 손상하는 건 싫어했다.
방금 책 한 권을 둘로 찢어서 반은 책상에 두고 반은 들고 밖에 나왔다. 문보영의 ‘일기시대’에는 책을 찢어서 들고 다니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한 번에 두꺼운 책을 들고 다니지 않고 그날그날 읽을 만큼 찢어서 둘둘 말아 들고 다니다 다 읽으면 버리는 것이다.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책을 찢어서, 밖에 들고 다니다가, 버린다니. 내겐 용납할 수 없는 일의 집합이었지만 계속 읽으면서 여러 이야기들 사이로 틈틈이 얼굴을 비추는 책 찢는 사람에게 친근해지고, 책을 덮을 때 쯤에는 그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딘가에는 있을 법 하지만 내게는 없을 일이었다. 책을 찢는 건 꿈속에서나 해볼 법한 일 같았다.
내가 책을 찢은 곳은 꿈속이 아니었다. 오후의 햇살이 희고 얇은 커튼 사이로 방을 비추는 내 방이었다. 헤드셋을 쓰고 마구 두드리는 드럼 소리와 기타 소리가 고막을 때리는 밴드 노래를 듣고 있었다. 머리를 일부러 소음으로 채우지 않았으면 책을 찢어볼까, 생각은 해도 진짜로 하지는 않았을지 모르겠다. 고요한 방 안에서 헤드셋을 덮어쓴 것은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갑자기 스트레스가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한 번에 관통해버리는 바람에 무슨 짓이든 해야 했다.
갑작스런 스트레스 꼬챙이가 불쑥 솟아나 날카롭게 나를 꿰뚫는 일이 한 번씩 일어난다. 이번에는 새로 산 비싼 키보드가 내 기대보다 구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아주 못 쓸건 아니고 못쓰겠다고 다른 것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좀 실망스럽지만 적응하면 될, 사소한 기분의 문제였는데 평소라면 참았을것을 스트레스가 불쑥 올라왔다. 나를 꿰뚫었다. 꼬챙이에 꿰여 꼼짝 못 하고 당장 모든 것을 부수고 싶어졌다. 나는 아직도 스트레스를 받을 때 어떻게 푸는지 모른다. 마구 먹어대는 것, 무언가 부숴버리는 것 같은 부정적인 방법 말고는. 홧김에 아무도 없는 집에서 과일을 손으로 으깨 버리거나 발로 벽을 차서 벽지에 발꿈치의 흔적을 남긴 적은 있지만 키보드를 으깰 수 없는 노릇이었다. 참아야 했다. 나는 내 시끄러운 정신을 덮을 수 있는 더 시끄러운 음악을 들어보기로 했다.
노래를 들으며 멍하게 앉아있는데 내 눈에 곧 들고 밖으로 나가야 할 두꺼운 노르웨이의 숲이 보였다. 이제 겨우 반쯤 읽어가는데 두께가 보통 책 두 권 짜리라 무겁기는 어찌나 무거운지! 도서관에 반납 할 두꺼운 책 두 권과 또 다른 짐 등등을 더 들고 나가야 하는 입장으로 아주 꼴뵈기가 싫었다. 아주 유명한 책인데 반 권을 읽어도 기대에 못 미쳐서 또 못마땅했다. 그러나 한번 열어버린 책은 다 읽어치워야 한다는 내 굳건한 강박 때문에 들고는 가야 했고, 책을 찢어서 들고 다니는 사람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책도 작가도 조금씩 불신하는 법을 배우고 책에 연필 또는 볼펜으로 밑줄을 죽죽 긋고 페이지를 접어 표시하고 정 책갈피가 없으면 책날개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지만 책을 찢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라. 노래가 머리를 때리는 박자에 맞춰 거침없이 책상으로 돌진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심장이 쿵쿵거렸다. 읽은 부분까지 벌리고(마침 딱 반쯤 읽은 후였다) 힘을 주자 제본이 약했던 책은 저항 없이 찢기 좋은 모양새가 됐다. 한 번에 쭉 찢어 깔끔히 두 조각 내고 싶었는데 칼이 안 보였다. 가위로 애써 조금 잘라 힘으로 뜯어내자, 책등에서 나를 노려보던 무라카미 하루키 씨의 얼굴이 우지직 망가졌다. 나는 내심 기분이 좋아졌다. 무라카미 하루키 씨가 조금 꼴뵈기 싫은 눈으로 책등에 박혀있어서 책상에 앉으면 눈을 마주치지 않게 계속 눕혀놓고 있었다. (노르웨이 숲이나 하루키 씨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그냥 그때 들고 가야 할 책이 하루키였고…너무 두꺼웠고…음.)
두 개로 나뉜 책은 아주 다른 물건처럼 느껴졌다. 원래 이 두 개가 하나였다는 것을 믿지 못할 만큼 서로 다른 물성을 띄었다. 내가 마저 읽기 위해 가져가야 하는 건 당연하게도 뒤표지가 달린 부분이었는데, 뒤표지에 하루키 아저씨 얼굴이 하나 더 있었다. 이건 오려낼 수도 없고… 감안할 수 밖에. 일기시대의 책 찢는 사람은 책을 그날 읽을 분량만큼만 찢은 뒤 다 읽으면 버렸지만, 나는 책을 두 조각 내기는 했어도 더 많이 조각내서 버릴 엄두까진 나지 않았다.
뒷부분을 들고 나가 조금 읽고 돌아왔다. 책을 찢은 그날 저녁 퇴근한 엄마는 내가 부루퉁하게 읽고 있는 책의 앞표지가 없다는 사실에 숨을 헉, 들이마셨다. 내게 책을 깔끔히 다루는 교리를 가르친 것이 엄마다. 엄마의 손 아래에서 내 독서가 시작되었다. 볼펜으로 밑줄을 죽죽 긋고 때로 책장을 접는 데까지 온 나와 달리 엄마는 아직 연필만 쓰거나 작은 포스트잇을 쓴다. 내 배신에 엄마가 크게 충격받았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도서관 책을 자기 것처럼 다룬 흔적을 볼 때면 우리는 함께 분노하곤 한다. 어째서 도서관 책의 책장을 접는 것인가? 어째서 도서관 책에 동그라미를 치는 것인가??)
이후로 책을 더 찢는 일은 아직까지 없었다. 찢을 일이 더 생기진 않을 것 같다. 요즘은 달리기를 하고 있다. 누군가 말하길, 쓰는 것보다 괴로운 취미(예를 들어 달리기)를 만드는 것이 좋다고. 읽는 것, 쓰는 것과 비슷하게 달리기 또한 달리는 그 한 순간 외에는 끔찍하다. 달리기로 결심하기까지가 모든 달리기의 과정 중 가장 어렵다. 달리기 또한 엄마로부터 영업 당한 것이다. 엄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에 대한 에세이를 읽고 있다. 에세이가 소설보다 낫다고 한다. 확실히 노르웨이 숲은 별로였다. 그 책이 아니었으면 스트레스 꼬챙이에 꿰뚫린 상태였어도 책을 찢을 생각까지는 안 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