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여자 풋살의 시대'에 탑승하다
아무리 TV가 죽었다 한들 미디어는 파급력은 역시 크다. 여성과 풋살이 연결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골 때리는 그녀들'이라는 프로그램이 흥행하면서 '여자 풋살'이라는 단어가 어색하지 않게 퍼져나갔다. 프로그램을 보지 않는 나에게도 누가 골을 넣었고, 누가 잘하는지에 대한 소식이 종종 들려올 뿐만 아니라 골때녀 출연자들의 신체적, 정신적 변화 소식까지 왕왕 들려왔다. 파급력은 둘째고, 출연자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걸 보면서 잘 만든 프로그램 하나의 파급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골때녀'의 파급력을 더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었던 건 주변 지인들에 있었다. 골때녀가 인기를 끌면서 풋살을 시작하는 여자 친구들이 많아졌고, 풋살에 발을 들이기 시작한 친구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꽤나 진심으로 몰입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긍정적인 반응을 보고 있으면서도 나는 이상하게 호기심조차 생기지 않았다. 남들이 재밌다 하는 건 꼭 호기심이 났던 내 기본값에서 풋살은 벗어나 있었다. '하는 축구'를 향한 이 거부감은 처음 축구 선수로 뛰었던 기억이 진득이 남아있던 탓이었다.
나에겐 그저 보는 스포츠였던 축구. 월드컵, 올림픽 등 큰 대회는 고사하고 남자애들이 흙먼지를 내며 공을 이리저리 주고받는 장면들이 아주 익숙했다. 축구를 종목으로 반대항이 일어날 때마다 골을 넣으라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게 나의 몫이었다. 아 물론 골을 넣을 때 가장 열렬한 환호를 질렀던 것도 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중학교 3학년 때 체육대회 종목으로 처음 '여자 축구'가 나왔다. 전무후무한 상황에 반 아이들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체육을 잘하는 친구들도 축구를 해본 경험은 손에 꼽거나 없다시피 한 상황이라 제법 운동 신경이 있는 친구들로 구성하는 게 우리의 최선이었다. 슬쩍 염탐한 다른 반도 상황은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렇게 구성된 '여자 축구 선수'들은 운동장 한가운데 모였다. 당시 우리 머릿속엔 단 한 가지 공식만이 존재했다.
공을 골대 안으로 넣는다!
축구 지식과 훈련 없이 형성된 단순한 공식은 우리를 한 곳으로만 모이게 했다. 모두가 공을 향해 불나방처럼 달려들었고 커다란 운동장 안 18명의 인원은 계속 공 주변으로만 밀집되었다. 니편내편 없는 니공내공 싸움에 패스도 슛도 엉성하단 말로는 부족했다. 모두가 공만을 쫓는데 시간을 쏟는 굉장히 직관적인 액션으로 경기가 진행됐고, 결과는 중요하지 않았는지 내 기억에서 말끔히 사라져 있다. 하지만 공을 보고 뛰는 모두가 '아 이거 뭔가 이상한데?'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음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언니, 우리도 풋살 해보자"
그 이상하고 어려운 추억의 발목을 푸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정공법이라고 하던가! 같이 운동하던 친구가 풋살에 관심이 생겼는지 원데이 클래스를 함께 하자고 물어왔다. 별로 내키진 않았지만 일정이 없어 거절하기가 애매했다. "어 응 그래그래" 하고 넘기려던 찰나, 언니가 까먹을까 걱정된다며 자기 눈앞에서 원데이 클래스를 결제하는 모습까지 보고야 마는 야무진 동생 덕에 '아휴, 그래! 한번 해보지 뭐!' 하고 신청하게 됐다. 사람이 바뀌려면 주변 환경을 바꾸라는 말이 있다. "하자하자"에 약한 나는 이렇게 흐르듯이 무언가를 시작할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긍정적인 경험이 더 많아 거절하지 못하게 되는 것도 있는 듯했다.
풋살 원데이 날. 같이 온 사람끼리만 삼삼오오 모여 있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수업이 시작됐다. 코치님은 축구와 풋살의 차이점부터 시작해 공이 오기 전에 잔발을 쳐야 하는 이유, 인사이드, 발바닥 쓰는 법, 공을 원하는 방향으로 차는 방법 등등을 알려주셨다. 2시간 수업 중 한 시간 반동안 생애 처음으로 스텝도 배워보고 패스 연습도 하고, 공을 다루는 흉내도 내봤다. 처음이라 어렵다는 걸 머리론 알면서도 공이 내 맘대로 되지 않을 땐 괜히 기가 죽고 의욕이 꺾였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공을 차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가는구나, 발에 힘을 빼야 공을 멈출 수 있구나를 알아가는 과정이 신기하고 재밌었다. 그저 공만 차는 공놀이에서 풋살로 한 단계 나아가는 느낌이었다.
수업 중 마지막 20분은 게임을 했다. 5명씩 3개 조로 나눠서 각 팀마다 3번의 경기를 뛰는 방식이었다. 공을 이제 막 다뤄본 사람이 한 시간 반 수업으로 모든 걸 체화할 순 없었지만, 배운 걸 조금이라도 써먹어보려고 했다. 그리고 그게 내 의도대로 흘러갔을 때 오는 희열감이 있었다. 승부욕 가득인 나와 친한 동생은 꽤나 전투적으로 게임에 임했다. 몸빵도 해보고, 중학교 운동장에 반도 안 되는 면적을 마치 리그를 누리는 선수들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비 오듯 나는 땀에 스스로 취하는 맛도 있었다.
결정적으로 풋살에 입문하게 해 준 가장 큰 공은 '골 맛'이었다. 얼떨결에 생애 첫 골을 넣었다. 처음엔 스스로도 놀라 얼떨떨했는데, 주변에 "와-아!" 하는 환호에 뒤늦게 밀려오는 뿌듯함을 감추느라 혼이 났다. 공을 넣어 박수받는 건 꽤나 즐거운 일이군. 으쓱이는 어깨와 씰룩이는 광대를 열심히 내리고 더 자신감 있게 공을 몰았다. 크로스핏과 역도로 다져진 딴딴한 몸은 몸빵에 유리했고, 러닝으로 다져진 스피드는 멀어져 가는 공을 쫓는데 아주 쓸모가 있었다. 한 골 더 넣으려고 쓸 수 있는 전력을 모두 쏟아냈지만 더 이상 골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경기가 끝나고 땅에 누워 숨을 몰아쉬니 개운함이 온몸을 가득 채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쏟아낸 상태에 만족하는 이 순간이 얼마나 귀한 시간인가. 그렇게 맛만 보려 원데이 클래스에서 공 맛에 흠뻑 빠져들어버렸다.
얻어걸린 성취감이 더 큰 성취감을 갈구했다. 공을 제대로 다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의도해서 정확한 패스도 해보고, 골도 더 넣어보고 싶고, 다른 팀이랑도 경기를 해보고 싶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욕구에 이 풋살이라는 운동을 오늘 하루만으로 만족하기 어렵겠다는 결론이 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같이 원데이를 한 동생에게 무진장 재밌었다며 감사한 마음을 표했다. 동생 역시 재밌었다며, 우리는 역시 이런 걸 해야 한다며 함께 정규반을 등록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땀냄새를 잔뜩 풍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더없이 시원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