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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명한 Oct 24. 2020

가해자의 것과 피해자의 것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리고 산 자는 말이 너무 많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범죄자는 피해자를 비난했다. 진심으로 피해자에게 속죄하는 범죄자는 매우 드물었다.

그러나 변명을 늘어놓는 범죄자와는 대조적으로, 범죄 피해를 입고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진술 분석을 하다 보면 범죄와 관련된 사람들의 말을 많이 접하는데, 그중 가장 어려운 것이 성범죄 피해자의 진술이다. 수사기관과의 접촉을 두려워하거나 심지어는 거부하는 경우도 있고 진술을 하더라도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왜 유독 성범죄 피해자만은 자신의 피해를 얘기하기 어려워할까. 왜 성범죄에 있어서는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수치심’을 느껴야 할까. 모텔에 가기 전에는 “진짜로 영화만 단둘이 오붓하게 보고 나오자”라고 했으면서 “너도 성관계를 동의했으니까 모텔에 들어간 거 아냐?”라고 말을 바꾼다. 성범죄 피해자가 얼굴과 신분을 공개하면 어떻게 피해자가 저렇게 당당할 수 있냐고 비난하며 외모를 평가하고, 신분을 공개하지 않으면 꽃뱀이라 켕기는 게 아니냐고 수군대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피해자에게 범죄의 책임을 전가하고 수치심까지 느끼기를 기대하는 범죄는 성범죄뿐이다.

“어제 지갑을 도둑맞았어”라고 주변에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고 말 수도 있다. “시비가 붙어서 몇 대 맞았어”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 면이 깎일지 모르겠지만 수치심을 느끼게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어제 길을 걷는데 누가 내 엉덩이를 만지고 도망갔어”, “회식 때 팀장님이 내 가슴을 만졌어”라는 말을 꺼내는 데에는 훨씬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피해자는 겪었던 피해를 사실대로 진술하면 그뿐 더 이상 아무 책임도 없다. 불쾌감, 공포심, 놀람 등 어떤 감정을 느껴도 되고 느끼지 않아도 되고, ‘성적 수치심’을 느낄 필요도 없다. ‘성적 수치심’이라는 단어는 부당하게 피해자를 위축시키고 주체성을 박탈한다. 피해자의 민감한 부분을 배려할 필요는 있으나 성적 수치심을 예단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기준으로 피해자를 평가하는 것은 굉장히 무례한 짓이다.  또한 피해자가 자신의 신상을 대중에 공개하고 성범죄 척결을 위한 투사가 될 필요도 없다. 피해자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는 오롯이 피해자의 선택이다.

성범죄 피해자가 목소리를 되찾는 여정은 그들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성범죄 피해자가 어쩔 수 없이 가해자와 결혼을 하던 시대는 지났다. 미래에는, ‘성범죄 피해자가 2차 가해를 겪던 시절이 있었다’고 현시대를 회상할 것이다. 끝내 피해 사실을 밝히지 못한 피해자들을 떠올리면 먹먹하다. 수사기관 종사자로서 피해자에게 진술을 권유하긴 했지만, 피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짐으로써 피해자의 삶이 흔들리는 현실까지 막아줄 수는 없었다. 그 무력했던 기억을 딛고 나아가려 한다. 피해자에게 ‘진술을 해도 당신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없을 것이다’고 단언할 수 있는 날이 오도록. 범죄로 인한 수치심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몫이라는 것이 상식이 될 것이다.



부산민예총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

http://www.openart.or.kr/bbs/board.php?bo_table=column&wr_id=280&sfl=wr_subject&stx=%EC%9C%A4%EC%A0%95%EC%95%84&sop=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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