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명한 Nov 14. 2020

폭력의 종식

어제는 누군가 혼자 길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살금살금 다가온 누군가가 그를 낚아채 세게 때리기 시작했고,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축 늘어졌고, 그를 때리던 이는 그의 팔을 뜯어내 길가에 던져버렸다.

오늘은 누군가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었다. 그의 몸이 붕 떴다가 쓰러졌다. 그의 육신은 도로에 누워있는데 차들은 빨리 어딘가에 가야 했다. 보드랍고도 단단했던 그는 아스팔트 위에서 점점 얇아져갔다. 마치 씹다 뱉은 껌이 눌어붙은 것처럼, 이제 그것을 치울 수도 없어져, 그저 갈려나가고 빗물에 씻겨나가는 수밖에 없다.


너무나 끔찍하고 반인륜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는 오늘도 몇십 몇백의 동물들이 죽어간 방식이다. 그들이 비인간 동물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런 상황은 용납된다.


약자의 범죄 피해는 너무 흔한 일이므로 사람들은 약자가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지 않는다. 덩치가 크고 인상이 험악한 사람이 소위 ‘묻지  폭행 피해자가 되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동물을 공격하는 것은 쉽고 안전하다. 슬프게도, 폭력은 발생 가능한 상황에서만 발생한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폭력은 없다. 폭력은 약자를 향한다. 그렇기에 약자에 대한 폭력의 종식은  모든 폭력의 종식이다*.


굶어도 도망칠 수 없고 맞아도 신고할 수 없는 가장 연약한 존재, 동물. 더 범주를 넓혀보자면 아동과 여성도 유사하게 폭력에 노출되기 쉽다. 동물학대와 가정폭력이 긴밀한 관계를 보인다는 수많은 연구 결과는 약자 폭력의 기제가 동일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실제 입건되는 동물보호법 위반 사건을 자의적으로 분류해보자면 경제적 이익을 위해 법령상 규제되는 행위를 하는 경우와, 폭력적 행위를 가하는 경우로 나눌  있을  같다. 개체 수를 따지자면 경제적 이익을 위해 희생되는 동물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겠지만 개별 동물의 피해는 폭력적 행위에서  크다. 그리고  유형 모두 진심으로 동물을 혐오해서보다는 동물학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된 경우가 많았다. 이런 유형의 사건들은 동물권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 감소하지 않을까 예상한다.


그러나 동물학대의 잔혹성을 잘 알기에 오히려 동물에게 폭력을 가하고 그것을 전시하려 하는 소수의 반사회적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동물을 고문하는 영상을 종종 온라인에서 접하는데 자그마한 동물들이 고통스러워하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대체 저 끔찍한 고통을 통해 가해자가 얻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저렇게 공들여 괴롭히는 이유가 무언가. 금전도 치정도 분노도 아닌 그저 본인의 감정적 유희를 위해, 절대적 우위를 점한 채 행해지는 폭력을 보고 있노라면 너무도 비겁하다는 말 밖에 할 수 없다.


모든 폭력은 추하다. ‘잘생긴 남배우가 천재적인 두뇌로 계획한 범죄 같이 악을 낭만화하는 것을 보면 헛웃음이 난다. 악이 쿨하고 멋진가? 폭력적 행동을 통해 본인이 강자라고 자위하고 싶은가? 오해하지 마라. 단언컨대, 악은 지질하다. 약자를 상대로 하는 폭력은 그중에서도 가장 비겁하고 지질하다.


* 클리프턴 P. 플린 지음, 『동물학대의 사회학』, 조중헌 옮김, 책공장더불어, 2018




부산민예총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

http://www.openart.or.kr/bbs/board.php?bo_table=column&wr_id=30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