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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드러머 May 03. 2022

기사는 소설처럼, 에세이는 기사처럼

어느 순간 나의 글쓰기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인터뷰 기사는 소설처럼 쓰고 에세이와 같은 개인적인 글쓰기는 기사처럼 쓰고 있다. 


인터뷰를 글로 정리하다보면 많은 부분이 빈다. 대체로 구어체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말할 정도다. 본인도 모르는 말을 정리해야 하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게다가 나는 처음 듣는 얘기다. 전문 용어가 나오면 정신이 없다. 그렇다고 그것을 일일이 물을 수도 없다. 대충 적어놓고 나중에 찾아본다. 거기에 인터뷰는 바로 정리하는 일이 없다. 얼마간 시간을 두고 정리하게 되는데 시간적 차이로 인해 기억력에 공백이 생긴다. 그렇다보니 생각보다 빈 공간이 많이 생긴다. 이 빈 공간을 채우지 않고서는 글을 쓸 수가 없다. 이때 필요한 게 소설적 상상력이다. 그러니까 A와 C라는 소재(문단) 사이에 B라는 개연성을 상상력을 통해 넣어준다. 소설 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게 개연성이다. 이야기가 그럴듯해야 한다. 물론 거짓 팩트를 넣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완성된 글을 인터뷰이에게 줬을 때 대부분 만족하는 걸 보면 나의 소설적 상상력이 괜찮은 모양이다. 혹시 독자중에 소설적 상상력이라는 용어에 거부감을 느낀다면 그것을 사회학적 상상력으로 바꿔도 괜찮다.(C. Wright Mils는 사회학적 상상력을 "개인적인 경험과 보다 넓은 사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인식"으로 정의했다)


반면 나는 일상적인 글은 기사처럼 쓴다. 누가 내 글을 읽고 너무 팩트만 깔끔하게 정리한 것 같다고 말하곤 한다. 그럴 때면 나는 내가 존경하는 조지 오웰과 헤밍웨이식 글쓰기라고 설명한다. 괜히 문장을 늘리거나 쓸데없는 비유를 들거나 글의 내용이 없이 장황한 수사를 늘어놓는 것을 나는 싫어한다. 거기에 오랫동안 기사를 써 온 탓에 기사 쓰기가 자연스럽게 체화됐다. 그래서 최대한 군더더기를 없애려고 하고 불필요한 수사가 없는지 검토한다. 긴 문장을 하나의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지 계속해서 찾아본다. 길게 설명한 어떤 것을 하나의 명사와 동사, 또는 형용사나 부사로 표현할 수 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의 이런 글쓰기에 대해 나는 그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에세이나 문학적 글쓰기를 하는 사람은 그것만 쓰고 기사 등 상업적인 글을 쓰는 사람은 상업적인 글만 써서, 문학적 글쓰기는 난잡하고 기사는 너무 단조롭게 쓰는 경향이 있는데 반면 나는 이 두 가지 글쓰기가 서로 영향을 받으면서 문학적 글쓰기는 간결하고 가독성이 높으며 기사는 풍부하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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