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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작가 Jun 03. 2024

집단 내 괴롭힘? 아니, 집단 내 간접적 살인 행위

이로 인한 우울증 그리고 자살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카자흐스탄을 거쳐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에 도착했다. 비슈케크에서 바로 이식쿨호수가 있는 촐폰아타로 향하는 중 떠오른 생각을 정리해보려 한다. 창문 밖을 보니 벌써부터 풍경이 너무 좋다. 이런 좋은 풍경을 보면서 든 생각이 이렇게 어두운 생각이라니 웃기다.


  꿈에 나를 괴롭힌 인간들이 나왔다. 아니 악마들이 나왔다. 한동안 뜸하더니 갑자기 다시 또 등장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마들의 얼굴이 꿈에 나온 날은 생각하지 싫지만 괴롭힘을 당했던 그 순간순간들이 떠오르고 그 순간의 감정까지 떠오른다. 이 떠오르는 생각을 끊어내기란 나에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차라리 이런 이동시간에 충분히 곱씹으며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당한 '집단 괴롭힘'에 대해서는 언젠가 한번 꼭 정리해서 글로 써보고 싶었다.


  사실 이런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는 미련하게 아직도 '혹시나 이게 내 오해면 어쩌지?' '내가 무슨 큰 잘못을 했던 건 아닐까?'라는 미련한 생각을 한다. 설사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려는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내가 그렇게 느꼈다면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가해자'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분명 이것에 대해 그 악마들에게 직접 물어본다면 아니라고 뻔뻔하게 말하겠지. 미안함이라고는 전혀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은 '악마'라고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죄를 묻고 사과를 받고 싶은 생각조차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받은 상처를 치료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치료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기록하고 이 기록으로 나와 비슷한 누군가 단 한 명이라도 잠시나마 힘을 낼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


  법적으로 집단 내 괴롭힘에 대한 죄를 묻기 위해서는 '증거'가 필요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명확한 증거가 없다. 이게 가장 미칠 노릇이다. 아무리 말을 해도 "그건 네 오해야" "나는 그런 적 없어" "나는 그럴 의도가 없었어"라고 말한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단 하나의 증거는 '나의 기록'이다. 괴롭힘을 당하고 힘들 때마다 나는 기록을 했다. 괴롭히는 악마들의 수와 그 빈도수가 늘어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한 명 한 명에 대해 나를 괴롭힌 날짜, 방법, 횟수까지 적었다. 이는 하루하루 출근하는 것이 지옥 같고 여기서 언제 스스로 나와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미련하게 버티고 버티다 생각해 낸 방법이다. 악마 한 마리 당 나를 괴롭힌 횟수가 5번이 되면 아웃이다. 아웃된 악마가 5마리가 되면 스스로 지옥에서 나오기로 결정했다. 지금생각해 보면 25번이나 칼에 찔리고 나오기로 결심한 거다. 악바리가 있는 건지 미련한 건지...


  혹시라도 나와 비슷하게 인간이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은 악마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참고 있는 피해자가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나처럼 너무 미련하게 버티지 말고 하루라도 빨리 스스로를 지옥에서 구하라고.


만약 세계여행이라는 꿈이 없었다면 나는 자살했을 것이다.




  이런 일을 겪어본 사람으로 직장 내 괴롭힘으로 자살까지 한 기사를 접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나와 관련이 없는 사람임에도 감정적으로 매우 힘들어진다. 그리고 가해자들에 대한 분노도 커진다. 집단으로 한 사람을 괴롭히는 행동은 무슨 이유를 대도 용납될 수 없는 범죄다. 이는 간접적인 살인 행위나 다름없다. 간접적이기에 피해자들은 피해자라고 외치기가 어렵다. 아주 끔찍한 범죄행위라 생각한다.


  집단 내 괴롭힘이라는 용어를 집단 내 간접적 살인행위라고 말하고 싶다. 집단 내 괴롭힘이라는 단어를 농담 삼아 웃으며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함께 웃고 있는 인간들이 내 눈에는 악마들로 보였다. '집단 내 간접 살인행위'라는 용어라면 함부로 농담 삼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지 않을까?


  우울증과 집단 내 간접적 살인행위는 비슷한 면이 있다.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집단 내 간접 살인행위로 인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높아지고 그로 인해 자살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살을 생각했던 사람으로 자살기사를 접할 때마다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든다. 정말 자살 생각을 많이 했었을 당시에는 '아, 이 사람은 그래도 큰 용기를 냈구나. 고통에서 벗어났겠다. 부럽다.' 자살 생각이 조금 줄어들었을 때는 끔찍한 살인사건이나 사고로 인한 인명피해사건보다 더 끔찍한 사고로 느껴졌다. 얼마나 심한 정신적 고통을 느꼈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많은 죽음의 이유 중 가장 안타까운 죽음이자 어쩌면 막을 수 있는 죽음이지 않을까?


  신체적인 고통으로 자살하는 사람보다는 정신적인 고통으로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신체적인 고통을 느끼면 자연스럽게 병원에 찾아간다. 치료를 하거나 너무 고통스럽다면 진통제라도 처방받을 수 있다. 정신적인 고통이 심한 사람이 끔찍한 고통으로 자살하기 직전 병원에 가서 약을 타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힘들어서 자살하고 싶다고 병원에 찾아가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신체적인 고통을 느끼는 사람보다 정신적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이 더 안쓰럽다. 조금이나마 잠시나마 이런 사람들에게 '진통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집단 내 간접 살인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로 자살하지 않고 수명이 다 하는 날까지 살아냈다는 기록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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