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phie Aug 16. 2023

첫사랑이 남기고 간 인생 교훈. 덕분입니다.

나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삼십 대가 되기까지.



지난해 몇 주간 체코에 머물다간 동생이 하루는 이런 질문을 던졌어요. "언니는 일상에서 언제 가장 행복해?"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나는 일상 속에서 어떤 순간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지요. 그리고는 대답했어요. "음, 딱히 이거다 하고 떠오르는 생각은 없어. 매일 행복한 것 같은데?"라고요. 그 친구가 그러더군요. 이런 답은 처음이라 그 이유를 생각하게 된다고요. 날씨 좋은 주말에 음악을 틀어두고 청소를 할 때라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처럼 어떤 순간을 특정하는 게 보통이었다고요.


그 대답에 저도 다시 생각했어요. 왜 나는 대체로 행복한 것일까? 생각을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은 행복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는 거였어요. 날씨가 좋으면 햇살을 쬐어서 행복하고(음식보다 햇살이 먼저 떠오르다니. 햇살 귀한 체코에 살고 나서는 먹보인 저조차도 음식보다 날씨가 중요해졌나 봅니다 흑흑), 쉬는 날엔 시간이 많이 드는 요리나 베이킹을 하거나 가고 싶었던 카페를 가는 등 온전히 내가 계획한 대로 하루를 쓸 수 있어서, 일하는 날엔 새로운 여행자를 만나고 또 보람과 살아갈 경제적 수익을 창출할 수 있어서 등등. 매일 아침 찾아오는 새로운 하루는 오로지 24시간만 머물다 가기에 그날만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다 보면 어느새 마침표 모양의 붉은 석양이 하루를 닫아주었죠.


알고 보니 저는 생각보다 작은 것에도 쉽게 행복해지는 단순한 사람이더라고요. 맛있는 음식은 말할 것도 없고, 길을 걷다 마주하는 나뭇잎의 초록이나, 주인을 따라 산책을 하는 강아지의 네발이 바닥과 마찰하며 만들어지는 가볍고도 경쾌한 챱챱챱하는 발자국 소리 같은 것들을 들으면 그날 하루치의 행복이 채워지는 기분이랄까요. 물론 인생은 장기 전이라 이런 작은 것들로만 언제나 행복을 보장받을 수는 없지만 소확행이 있는 하루가 일곱 번 모이면 행복한 일주일이, 또 그 일주일이 네 번 모이면 행복한 한 달이 되니까 적어도 행복한 시간의 비중을 늘릴 수는 있다고 생각해요.


참 좋아하는 박웅현 작가님의 새책을 배달받았던 날의 출근길. [문장과 순간]
제가 사랑하는 일상의 아름다움입니다. 맛있는 걸 들고 공원에 가서 책을 읽다가 햇살을 받은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윤슬처럼 반짝이는 모습을 목격하는 일은 하루를 충만하게 해요.
쉬는 날엔 조금 더 정성을 들여서 식사를 준비해요. 저는 먹는 재미가 사는 낙의 절반인 사람이거든요.


'You will never know until you try.'

세상에 잣대로 변변치 않아 보일 때조차 온전히 내 모습으로 행복할 수 있게 해 준, 제가 등 뒤에 꼭 기대고 서있는 세 개의 문장이 있습니다. 그중 이 문장은 제 인생이 오롯이 제 것이었던 시절부터 가장 오래 저를 지켜주고 길잡이가 되어준 존재였어요.


해보기 전에는 모른다는 이 말은 제게 처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깨닫게 해 준 첫사랑이 남기고 간 교훈입니다. 정확하게는 학창 시절 제가 짝사랑했던 상대였어요. 그때의 제 하루는 온통 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인간이 타인을 이렇게도 좋아할 수 있구나. 이런 게 사랑하는 거구나. 생각했죠. 시간이 가도 마음은 점점 더 커지기만 해서 저는 어쩔 줄 몰라 쩔쩔맸어요. 결과에 관계없이 지금 이 마음을 전하지 않으면 평생을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습니다. 밸런타인데이, 손수 만든 초콜릿을 들고서 그를 찾아갔어요. 오늘 말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절대 하지 못할 것 같아서 왔노라고, 그를 많이 좋아해 왔다고 내 마음을 전했죠.


언제나 멋있었던 그 사람은 그날 가장 멋졌어요. 저의 사람 보는 눈은 그때도 좋았나 봅니다. 그는 정중하고 따뜻하게 마음을 전해줘서 고맙다고,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이미 있기에 내게 받은 마음과 같은 것을 돌려줄 수가 없노라 말했지요. 슬프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신기하게도 그날을 떠올리면 그에게 고백했던 그 순간이 아닌 고백 이후 집으로 돌아오던 버스에서의 기억이 썸네일처럼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제가 앉았던 버스 자리, 창문 너머로 들어오던 아직은 차가웠던 2월의 바람과 두 눈 가득 무겁게 고였던 눈물의 무게까지도 너무나 생생할 정도로요.



그날 버스에서 제게 밀려든 감정은 실연의 아픔이 아닌 더없는 후련함과 자기 효능감이었어요. 몇 년을 앓아온 체증이 가시는 듯한 후련함에 가슴이 뻐근해지다 못해 온몸이 두근두근거렸죠.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다.'말하는 스포츠맨십이 이런 걸까요? 당시 저는 자존감이 높지 않았던, 스스로를 사랑하는 게 서툴렀던 사람인데 정말로 제 자신이 자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어요. 아마 그날 고백을 하지 않았다면 저는 이 값진 배움을 얻지 못했겠지요. 모든 일은 애초에 해보기 전엔 모르는 것이고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란 걸,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한 '만약'을 떠올리며 후회하는 것보단 해보고 후회하는 편이 훨씬 낫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십 대 끝자락의 그 사랑고백은 제게 사랑이라는 감정보다 더 많은 것들을 안겨주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더없이 나다운 이십 대를 살 수 있었고요. 오롯이 내가 한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이니 어떤 결과이든 받아들일만했어요. 그렇게 내 색깔로 꽉 채운 이십 대를 보내고 나니 위태했던 십 대 시절과 달리 나 자신을 온전하게 사랑할 줄 아는 삼십 대가 된 것 같습니다.


어느 순간 제가 브런치에 쓰는 글들의 형태가 일기에서 편지처럼 바뀐 것 같아요. 이렇게 아주 오래전 얘기를 꺼낸 것도 참 오랜만이네요. 멀고 먼 체코에서 정다운 한글로, 그것도 편지처럼 써 내려갈 때면 좋은 친구를 앞에 둔 것처럼 마음이 든든해집니다. 오늘의 이 글도 누군가에게 잘 가닿기를 바라며 이만 글을 줄일게요. 안녕.



[문장과 순간] 박웅현
위트와 감동 어떤 것도 빠지지 않았던 책. 레슨 인 케미스트리. 보니 가머스
마음에 꼭꼭 새기고 싶은 문장들이 너무 많아서 책으로 사버린 배혜수 작가의 원작 웹툰 [쌍갑포차]. 못 본 사람 없게 해주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