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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e Sep 21. 2023

우리는 앞으로 몇 번의 여름을 더 함께 보내게 될까요?

튀르키예 지중해에서 부치는 글




1.

지중해 바다가 넘실거리는 뷰를 앞에 두고 글을 쓰자니 도저히 손이 움직이질 않습니다. 머리 위에는 야생 피스타치오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주고, 키보드 옆에는 맥주 한 잔이 놓여 있는데, 햇살을 받아 만들어내는 빛이 너무 아름다워 성스럽게 느껴질 정도예요.


튀르키예는 아주 큰 나라입니다. 우리나라의 여덟 배는 더 크고 위로는 흑해 옆으로는 에게해 그리고 아래로는 지중해 무려 세 개의 바다를 맞대고 있는, 전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근사한 지리적 매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튀르키예의 삼면을 둘러싼 바다들은 언제나 여행자들을 불러 모읍니다.


제가 있는 곳은 외국인은 찾아볼 수 없는 튀르키예 남부 지역의 작은 마을입니다. 관광지적인 요소가 하나도 없어 아마도 이 동네에 와본 한국인이라곤 저 그리고 저와 동행했던 이들까지 네 명이 전부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터키인 친구들도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작은 동네라서 '너 매년 거기서 뭐 해?' 묻곤 하는 이곳을 제가 매년 찾는 이유는 이곳에 사는 사랑스러운 두 사람 때문입니다.



2.

지난 글에서도 잠시 그들의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어요. 튀르키예 동부의 작은 관광지의 배 위에서 그들을 처음 만났죠. 두 사람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찍은 사진을 보내주기 위해 연락처를 받고 우리는 헤어졌어요. 그런데 샨르우르파로 돌아가기 위한 버스를 타야 할 곳에 한참을 서있어도 돌무쉬는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수십 킬로 반경에는 황량한 돌산만 이어지는 곳. 인적도 없는 이곳에서 막차를 놓쳐버린 게 아닐까 생각하니 막막해지던 참이었.


잔수가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어요. 샨르우르파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야 하는데 버스 시간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는다고 했죠. 잔수는 영업 마감 중인 식당 아저씨에게 버스에 대해 물었고, 아저씨는 막차는 이미 떠났다고 했어요. 잔수가 제게 말합니다. "그럼 우리 차로 같이 가요."


어차피 자신들도 오늘 목적지가 샨르우르파이니 같이 가면 된다고 했죠. 그런데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단 얼굴로 그녀가 말을 잇습니다. "그런데 작은 문제가 하나 있어요. 음,, 차에 앉을 곳이 마땅하지 않아요."


이 작은 차 안에 없는 게 없었어요! 사람이 앉을 자리만 빼고 말예요.

튀르키예 전국을 도는 신혼여행 중이었던 두 사람은 그야말로 한 달 치의 여행짐을 소형 자동차에 넣어 다니는 중이었는데 여행지마다 기념품을 사서 차곡차곡 싣다 보니 어느새 뒷좌석까지 가득 짐으로 차버린 거였어요.


그 기념품이라는 게 마그넷 따위의 작은 공산품이 아니라 말라티야 지역의 특산품인 말린 살구, 가지 안텝에서 만든 제비즐리 수죽Cevizli Sucuk*과 말린 가지와 토마토, 중부 아나톨리아 지역의 와인 등이어서 작은 차 안에 작은 튀르키예가 통째로 들어간 셈이었죠.


실에 꿰어져 말린 토마토와 가지는 목걸이처럼 우리의 목에 걸렸어요. 잔수의 오랜 애착 물건이라는 폭신한 베개는 제 옆구리에 끼워졌고요. 제비즐리 수죽을 뒷좌석 주머니에 꾸역꾸역 밀어 넣던 잔수는 다시 수죽을 꺼내서는 우리의 입에 하나씩 물려줍니다. "도저히 들어갈 데가 없어서요. 뱃속엔 공간이 있는 거죠?"


3.

구불구불한 길을 달려 샨르우르파로 향하는 길.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 동부의 뜨거운 햇살이 차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고 활짝 연 창문을 통해 들어온 바람은 차 안과 밖의 경계를 흐리게 만듭니다.

 제비즐리 수죽을 한입씩 베어물 때마다 고소한 호두맛이 입안을 채웁니다. 몸 위에 내려앉는 햇살부터 머리칼을 흩뜨려놓는 바람, 입 안까지 몸의 구석구석에 튀르키예가 가득합니다. 행복하다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순간이었습니다.


샨르우르파에 도착한 순간부터 연달아 이틀을 두 사람과 함께 보냈습니다. 시간을 보낼수록 여행을 하는 방식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참 많은 부분에서 우리가 가진 공통점이 보였어요.


내년엔 꼭 자신들의 집으로 오라는 그 말에 저는 진심을 가득 담아 고개를 끄덕였어요. 다음 해 저는 약속대로 그들이 사는 곳을 방문했습니다. 그 방문은 자연스레 우리의 연례행사가 되었고 그렇게 우리는 또 하나의 가족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후로 매년 7월쯤 되면 고민 없이 9월 초에 튀르키예 남부로 갈 수 있는 비행기를 예매합니다. 따로 계획은 짜지 않요.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웃을 일은 충분하죠.

매번 이곳에눈이 떠지면 일어나 다 같이 아침을 만들며 하루를 시작해요. 가장 해가 뜨거운 시간에 수영을 하며 열기를 식히고 밤이 되면 마당에서 케밥을 굽고 차이를 마시는 단조롭지만 행복한 날들이 일주일씩 이 주일씩 이어집니다.

여름의 끝자락을 이보다 잘 보낼 수 있을까요?

그들의 집에 머무는 시간은 제게 행복과 삶의 의지를 재충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4.

잔수와 아이벡은 정의로우면서도 따뜻한 심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나 동물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타인을 속여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에게는 주저 없이 맞서는 이들이에요.


코로나로 지난 이 년 간 그들을 만나지 못했는데 올해 초 튀르키예 동부를 강타한 지진이 찾아왔습니다. 동부에 사는 친구들을 시작으로 모든 친구들에게 연락해 안부를 확인했어요. 잔수와 아이벡은 자신들은 괜찮다고 답장을 보냈어요. 하지만 지금 동부로 향하고 있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지진 현장에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상황이라 휴가를 쓰고 그곳으로 가고 있다고요. 그들은 제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멋진 사람들이었어요.


튀르키예는 제게도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라 믿고 도울만한 후원단체를 찾고 있던 차였고, 두 사람과의 연락 후 저는 이내 답을 찾았어요. 내가 아는 가장 정의롭고 정직한 사람들을 통한다면 분명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닿을 거란 걸 알 수 있었죠.


힘을 더 보태기 위해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함께 도움을 줄 이들을 찾았습니다. 잔수와 아이벡의 집에 왔던 친구들을 포함해 많은 이들이 마음을 더해줬어요.


한마음 한뜻으로 보내준 마음을 동부 지진 현장의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인 무흐신과 잔수에게 나눠 보냈습니다. 식료품을 사도 좋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현금을 줘도 좋으니 너희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곳에 써달라고 했죠. 어디에 썼는지 나에게 알릴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도, 두 사람 모두 얼마 뒤 사진을 보내왔어요. 쌀과 소금 속옷 등 긴급한 생필품을 구매한 사진들과 영수증 등이었어요.



두 사람과 다시 연락을 했을 때 그들은 지진 현장에서 집이 완전히 무너져 갈 곳이 없어진 두 가족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어요.

제가 매년 이곳에서 좋은 기운으로 마음을 채워갔듯 그들도 분명 잔수와 아이벡의 집에서 머무는 동안 무너진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일어날 기운을 차렸을 겁니다. 이곳은 사랑이 가득한 두 사람이 만들어낸 마법의 집이니까요.



이곳에 올 때마다 생각합니다. 앞으로 우리는 몇 번의 여름을 더 함께 보낼 수 있을까요? 바라건대 가능한 한 많은 여름이 우리에게 남아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은 미래에는 꼭 두 사람에게 유럽의 크리스마스를, 하얀 눈으로 덮인 풍경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매년 여름 이곳에서의 시간이 또 다른 겨울을 날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던 것처럼 저 또한 두 사람에게 근사한 추억을 선물해 줄 수 있기를 기대해요.

나의 터키 가족 그리고 친구들을 소개합니다!
두 사람이 사는 이곳에서는 은하수가 보입니다. 보름달이 뜨는 날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이런 별이 하늘에 가득해요.
수평선에 닿을 듯 낮게 뜬 붉은 달과 은하수.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만큼 아름답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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