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급했습니다. 올해 가을엔 부르착을 마실 날이 며칠 없기 때문이었어요. 튀르키예에서는 이 년 만의 재회를 위해 구 월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이 있었고, 휴가 전까지 마무리할 업무들과 투어들을 처리하느라 눈 코 뜰 새가 없이 바빴죠.
하지만 구 월 한 달만 맛볼 수 있는 음료, 부르착은바쁜 와중에도 꼭 챙겨야 했습니다. 부르착을 마시지 않고서는 제대로 가을을 맞이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고나 할까요.
가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와인 가게를 지나갈 때마다 부르착 판매를 알리는 종이가 붙어 있지는 않은지 나도 모르게 흘끔거리게 됩니다.
8월에 수확한 포도를 짜낸 포도즙은 보글보글 발효를 시작하면서 달짝지근한 포도주스와 알코올의 사이 어디쯤에 가있게 되는데, 이 음료를 체코어로는 부르착(burčák)이라 불러요.
한 모금 입에 넣으면 혀와 입천장을 가볍게 간질이는 탄산과 함께 포도향을 가진 인공적이지 않은 단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우는 매력적인 음료입니다
부르착은 가을의 낭만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음료예요. 가을의 시작을 알린 후 가을의 시간과 함께 깊어가고 가을이 끝날 때 함께 퇴장하는, 체코의 가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지요.
이스트가 살아있는 부르착은 매주 아니 매일 그 맛이 달라집니다. 그 시작이 달콤한 포도즙에 알코올이 가미된 음료에 가까웠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와인의 형태를 닮아가요. 그러니 구월 첫 주와 구월 둘째 주의 부르착은 같은 부르착이지만 결코 같지 않으니 한 주라도 건너뛰면 무언가 빠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요. 어느 순간 저는 부지런히 매주의 부르착을 즐겨야만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을 가지게 되었죠.
체코의 주요 와인 생산지는 체코 남부 모라비아 주입니다. 제가 처음 체코에 왔을 때 살았던 곳이 바로 모라비아의 주도인 브르노였어요. 그런데 지금 제가 사는 프라하는 보헤미아 주에 자리하고 있어서 프라하로 이사 온 첫해에는 부르착을 판매하는 곳이 브르노에 비해 많지 않아서 주말에 파머스 마켓을 찾거나 발품을 팔아야만 했지요.
이제는 프라하에도 가을이 시작되면 망설임 없이 찾아갈 수 있는 나만의 장소들이 생겼습니다. 일 년에 딱 한 달. 가을에만 찾는 곳이다 보니 일 년 만에 그곳을 찾으면 언제 가도 같은 자리에 앉아있어 처음엔 주인인 줄로만 알았던 코가 빨간 그곳의 단골 아저씨는 올해도 변함없이 작년에 했던 질문을 제게 건넵니다.
"어디 사람이에요? 일본?"
그러면 저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작년에 했던 대답을 똑같이 합니다.
"아니요. 한국 사람이에요. 저 작년에도 왔었는데 같은 질문 하셨던 거 기억 못 하시죠?"
일 년에 단 한 달만 이곳을 드나드는 동양인 이웃에 대한 기억은 부르착 시즌이 끝나면 아저씨의 기억에서도 함께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올해의 첫 부르착을 마시면서 시작했던 이 글을 저는 지금 지중해 바다가 코 앞에 있는 터키 남부의 친구 집 거실에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갓 나온 부르착을 마시고 왔는데 돌아갈 때쯤이면 알코올 농도가 꽤나 높아진 부르착이 저를 맞이하거나 혹은 이미 와인이 돼버렸을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어쩌면 우리 인생의 매 순간이 일 년에 단 한 철만 마실 수 있기에 더 특별한 이 음료와 같지 않나 생각합니다. 심지어 우리 삶의 대부분의 것들은 매년이 아니라 아예 다시 돌아오지 않기도 하니 부르착을 특별히 여기듯 오늘 하루도 잘 즐겨야겠어요.
얼른 발행버튼을 누르고 이 년 만에 만난 친구들과 9월의 여름을 즐기러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대신 지난 며칠간 남긴 이곳의 풍경을 함께 나눌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