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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리만 제이 Oct 05. 2020

"라스트 리조트" 미얀마 시장을 개척하라!!!

글로벌 업무부에서의 특명



2010년 7월에서 9월까지, 3개월간 5번의 면접을 통과해, 스미토모 상사에 첫 출근한 날은 10월 1일이었다.


스미토모 상사의 본사는 몇 년 전에 동경 비즈니스 중심가인 마루노우치 (丸の内)로 이전했지만, 그 이전에는 긴자(銀座)에서 가까운 카치도키 (勝どき)라는 주택가에 위치해 있었다. 카치도키는 긴자도 가까이 있지만, 동경만(Tokyo Bay)을 사이에 두고, 유명한 관광지인 오다이바(お台場)와 마주 보고 있어, 한눈에 동경의 상징물인 동경타워와 레인보우 브릿지, 토쿄 스카이트리, 날씨가 좋으면 후지산까지 보일 정도로 경치가 정말 황홀하게 좋은 곳이었다.


2008년, 히토츠바시 국제경영전략 연구과 (ICS, International Corporate Strategy)에 입학했을 당시, 일본 문부성 장학생으로 입학했었는데, 문부성 장학생들은 대개 오다이바에 있는 국비장학생으로 대학원 이상에 재학 중인 외국인 학생을 위해 정부 산하 단체가 운영하는 아파트인 TIEC (Tokyo International Exchange Center)에서 생활했었다. 그 덕에 2년간을 오다이바에 살면서 동경만의 아름다운 풍경을 매일 온몸으로 느끼고 살던지라, 와이프와 나는 동경만 인근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입사 전 회사에서 불과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아파트를 얻었다.

  

오른쪽의 시꺼먼 빌딩이 내가 살던 아파트, 왼쪽 중앙 부근의 빌딩이 당시의 스미토모 상사의 본사 빌딩인 Triton Square


2년 만의 샐러리맨으로 복귀, 게다가 외국인으로서 종합상사의 경험도 없었던 내가, 잘해 낼 수 있을까라는 일말의 걱정도 있었지만, "새로운 출발"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만 34세의 나이에, 안정된 직장인 LG를 그만두고 느닷없이 일본으로 MBA 유학을 떠나겠다는 철없는 남편을 믿어주고 지지해준 와이프와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포옹과 키스를 나누고, 생후 3달도 안된 딸내미에게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아빠 회사 다녀올게~”라고 속삭이며 볼에 입맞춤을 한 후에, 가볍게 수백 미터를 걸어 10분 만에 첫 출근을 했다...


LG에서 6년간 해외영업부서에서 근무했었고, 향후에도 영업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5차 면접 시 부사장님이 하신 말씀 (참고 05. 종합상사맨, 3,650일의 추억... https://brunch.co.kr/@jay0509/14)처럼, 회사 전체를 볼 수 있는 기획 관련 부문인 CCG (Corporate Coordination Group) 내의 "글로벌 업무부"라는 곳에 배속되었다.


"글로벌 업무부"는 부원이 50명 가까이 되는, 회사에서도 드물 정도로 대규모 인원이 소속된 부서였는데, 해외에 관련한 정말 다양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전 세계 각국에 "스미토모 상사"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한국 스미토모 상사" "호주 스미토모 상사" 등의 해외법인과 연락사무소의 지원 및 관리, 회장・사장 등 최고 임원들의 해외출장 및 각국 대사, 정부요인들과의 면담 지원, 해외시장 동향 파악 및 보고, 영업부서가 기획한 해외 신사업에 대한 심사업무와 전사 보조금 지급 등, 정말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로 다양한 해외 관련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내가 처음 담당하게 된 지역은, 인도차이나 반도, 흔히 메콩지역이라고 부르는 지역이었다. 메콩지역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베트남, 태국을 비롯해,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가 위치해 있는데, 베트남은 스미토모 상사의 사업기반이 워낙에 강하고 업무량도 너무 많아서, 베트남만 따로 전담하는 베테랑 사원이 있었고, 베트남을 제외한 국가를 내가 담당하게 되었다.


입사 초기에는 아직 회사로서는 사업기반이 많지 않았던 캄보디아 시장의 공략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2011년에 상황이 급변했다. 미얀마에서 2011년에 취임한 테인 세인 대통령이 군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정치범을 석방하고, 아웅산 수치 여사와 대화를 시작하는 등, 전면적으로 시장개방을 표방해 해외로부터의 투자에 적극적으로 임했기 때문에, 느닷없는 "미얀마 붐"이 일기 시작했던 것이다.

양곤의 상징, 쉐다곤 파고다... 아~ 다시 한번 가고 싶어라~

영국 통치 시절의 미얀마는 과거 세계 최대의 쌀 수출국으로, 동남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다고 한다. 수도인 양곤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도시설계로 지어져,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들지만 싱가포르마저도 양곤의 도시설계를 보고 배워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 미얀마가 60년대부터 50년이 넘게 지속된 군사독재로 인해 경제는 피폐해지기 시작했고,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아웅산 수치 여사를 감금하는 등의 인권탄압, 사회주의 성향의 강화, 국경지역에서의 마약 생산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미국과 서방국가들의 경제제재를 받으면서, 동남아 최대 빈곤국으로 전락한 것이다.


스미토모 상사도 양곤시에 주재원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단 한 명의 사무소장을 지속적으로 파견하고는 있었지만, 미국의 경제제재 속에 비즈니스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보니, 정년퇴임에 가까운 주재원을 보내, 아무것도 하지 말고 조용히 정년을 맞이하게(?) 하는 독특한 지역이었다. 그러던, 미얀마에 갑자기 시장개방의 물결이 몰아치자, 각국의 비즈니스 맨들이 "골드러시"를 방불케 할 도로 미얀마로 몰려들었다.


미얀마는 농업자원뿐 아니라, 석유와 천연가스, 다양한 금속광석, 산업용 광물, 비금속 원료 등의 지하자원도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다. 특히, 전 세계 루비의 90% 이상이 미얀마산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보석이 많이 매장되어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거기에 값싼 노동력에, 오랜 세월 빈곤국으로 물자가 부족해 있었기 때문에, 향후의 생산거점 및 소비시장으로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전 세계가 미얀마를 "라스트 리조트(Last Resort)"로 부르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첫 미얀마 출장시에 호텔에서 찍은 양곤 시내

내가 미얀마를 드나들던 2011~2013년 경에는, 외국인이 숙박할 수 있는 수준의 호텔이 Royal Park와 Traders 등 2~3군데 밖에 없었는데, 갑자기 외국인들이 몰려오니, 숙박비가 한때 1박에 미화 300 달러를 넘는 수준까지 치솟았다. 그나마도 예약이 너무 어려웠다. 당시에는 동경에서 양곤으로 가는 직항 비행기도 없어서, 방콕을 경유해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나의 최초의 임무는, "양곤 사무소의 정비" 및 "네피도 사무소 설립"이었다.

한번 출장에 2~3주 정도로 동경과 양곤, 네피도를 오가며 회사의 비즈니스 기반을 다지는 일에 집중했다.

미얀마 시장이 개방되기 시작하면서, 우리 회사의 각 영업부서도 우선 "시장 파악"을 위해 출장을 가기 시작했는데, 당시 양곤사무소에는 첨부파일도 없는 단순 텍스트 메일을 한통 보내기도 받기도 힘든 초저속 인터넷 설비에, 그나마 자주 연결이 끊겼으며, 출장자가 업무나 회의를 할 만한 공간도 없었다. 현지 직원들은 변변한 휴대폰과 노트북도 없어서, 본사 직원이 뭘 하나 물어보려고 전화하기도 메일을 보내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는 사무소장과 논의해 우선 사무소의 통신 인프라의 개선에 힘을 썼다.


그런데, 참 뜻밖의 인연이 힘을 발휘했다.

대학원 시절의 미얀마인 동기들과 선배들이 알고 보니, 양곤의 젊은 비즈니스맨의 대표 격으로 청년 상공회의소 간부로도 활약하는 나름 경제계 유명인사들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동기의 남편이 때마침 중견 IT 회사의 부사장이었다(사장은 아버지). 이 친구가 자신의 인맥을 통해 인터넷 회사, 통신장비 회사 등 통신회사의 임원들과 줄줄이 미팅을 마련해 주었는데, 이 덕에 양곤사무소의 통신 인프라는 급속도로 개선되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 회사 관계자들도 다들 예상보다 빠른 통신 인프라의 개선에 놀랐다.


반면, 네피도 사무소 설립은 쉽지 않았다.

미얀마의 공식 수도는 양곤이 아니라, 양곤에서 차를 타고 4시간 정도 북쪽 내륙으로 들어가야 도착하는 네피도라는 도시이다. 2002년에 군사정부가 철저히 비밀리에 도시를 건설해, 2005년에 불현듯 수도이전을 발표했다는 이 불가사의한 수도이전의 정확한 사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 설은 있다.


우선, 미국 등 서방국가의 공격에서 그나마 양곤보다 안전한 내륙으로 이전했다는 설. 양곤은 바다와 접해있어, 미국의 항공모함이 접근해 포격이나 전투기를 출격시키기 용이하다는 걱정으로 내륙으로 이전했다는 설이다.

두 번째는, 양곤에는 인구가 집중되어 있어, 민주화 시위가 격해지면 군 지도부가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설이다. 양곤에서 민주화 시위가 격해져도 수많은 인파가 아무것도 없는 내륙지역인 네피도로 동시에 진격하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해서 이전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2011년 당시만 해도, 양곤 시내에서는 오토바이 통행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것도 정부요인이 차량으로 이동할 때, 오토바이로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저격 후 차량이 따라갈 수 없는 샛길 등을 이용해 도주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에서 금지했다는 설이 있다.

군사정부의 요인들은 은근 국민들의 저항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미얀마 지도, 출처: 외무부


수도이전의 진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 비밀리에 그리고 깜짝쑈 같이 이루어진 수도이전에 의해, 네피도는 정부청사만 덜렁 있는 유령도시 같았다. 관료들도 평일에는 유령도시 네피도에서 근무하고, 주말에는 차로 4시간을 달려 가족이 있는 양곤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 네피도에 사람이 모일 리가 없었다.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도로를 4시간씩 왕복하다 보면, 허리에 무리가 가서 허리 통증을 호소하는 관료들도 많았다고 한다. 심하게 흔들리는 도로를 4시간 달리는 것은 내게도 정말 고역이었다. 4시간 동안 끝없이 이어지는 도로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데도, 야생동물 때문인지, 가로등이 없어서 인지 종종 사망을 동반한 교통사고가 발생하기도 해, 절대 해가 진 이후에는 주행을 하지 말라는 것이 현지 직원들 설명이었다. 일단 사고가 나면, 휴대폰도 안 터지고,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서,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양곤에서 네피도 가는 길에서 만난 야생 코끼리... 급하게 아이폰을 꺼내 찍으려다 궁댕이만...
양곤과 네피도 사이의 거리를 표시한 마일스톤이 곳곳에 있는데, 저게 양곤에서 출발하고 바로 촬영한 것인지 네피도 인근에서 찍은 건지는 기억이 가물가물... 어떻게 해석하더라?


4시간을 달려 처음으로 네피도에 도착해, 도시의 광경을 접했을 때의 나의 충격이란...

나에게 당시의 네피도는 그냥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로 느껴졌다.

각 정부청사들과 도로의 어마무시한 사이즈, 심지어 양곤의 파고다의 복제품으로 만든 사원까지 입이 딱 벌이지는 규모여서, 도대체 국가예산도 부족한 나라가 사람도 없는 도시에 왜 이런 초호화 시설을, 그리고 누구를 위해지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국회 의사당이었나? 기억이...

 

당시 일본의 종합상사들이 미얀마에서 비즈니스 기반을 선점하기 위해 경쟁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마루베니와 스미토모 상사의 경쟁이 치열했다.

철도, 전력, 농업, 자동차, 통신, 공업단지... 모든 산업인프라에 있어 외국 정부의 원조와 외국기업의 투자가 절실했던 미얀마 정부에 있어서, "종합 선물세트"처럼 모든 걸 들고 올 수 있는 기업은 종합상사밖에 없으니, 종합상사는 영향력 있는 임원급부터 실무자에 이르기까지, 네피도를 드나들며 각성의 장차관급, 국장급과 끊임없이 협상을 했다. 어떤 경제 관련 부처의 차관급 인사와 면담할 때는, 흑판에 스케줄이 적나라하게 적혀있었는데, 경쟁 종합상사와의 면담 일정도 적혀 있는 걸 보고 참 황당해했던 기억도 있다. 그 사람들도 우리 면담 일정을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하니... 어째 기분이 좀... 쩝...


먼저 한 발 앞서 움직인 것은 마루베니였다.

그 황량한 유령도시 네피도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한 것이다. 한 호텔의 스위트룸을 개조해 설치한 마루베니의 사무실 간판을 보고 나로서도 적지 않게 놀랐고, 본사에 돌아가 우리 회사도 네피도 연락사무소 설치를 본격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두 가지... 마땅한 사무실이 없다는 것과, 유령도시에 누구를 보내냐 였다.


네피도는 원래 인구가 밀집되는 걸 원치 않았던 수도였기 때문일까, 일반 기업이 사무실을 개설할 만한 빌딩도 없었고, 호텔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도시의 고층 호텔이 아니라, 휴양지에서 자주 보는 한 채씩 띄엄띄엄 분리되어 있는 방갈로 타입밖에 없었다. 우선, 각 호텔을 돌며, 사무실로 사용할 수 있을 만한 방을 확보하는 일부터 했다.

당시 네피도의 호텔은 대개 이런 형태였다.


사무실로 쓸 호텔방을 물색하면서 동시에, 사무소장으로는 누가 적당할지 사내에서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과거 양곤 주재 경험이 있는 철강영업맨 중에 정년이 가까운 "비루키치" (ビルキチ, 자신을 미얀마인으로 착각할 정도로 미얀마를 사랑하는 일본인을 일컫는 속칭)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오사카의 어느 사업회사에서 근무 중 이셨는데, 회사가 그분을 네피도 사무소장으로 보내기 위해 그 사업회사와 조율하고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분은 나중에 내게 마치 정말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처럼 고맙다고 인사를 하셨다. 당시에는 같이 술도 많이 마시고 친하게 지냈던 오사카 아저씨였는데, 퇴직하고 뭐 하고 지내시는지...

아무튼, 그렇게 어렵사리 호텔 스위트룸 하나를 빌려 사무실을 개설하고, 열렬한 "미얀마 러버"도 섭외(?)해 네피도 연락사무소가 운영을 시작했다.


미얀마 사업기반 조성을 위해 마지막으로 한 것은, 대규모 영업 미션을 파견하는 것이었다. 회장을 단장으로 각 영업본부장, 영업 실무진에, "글로벌 업무부"의 내 직속상관과 나, 현지 직원들까지 포함하면 수십 명의 대규모 미션 단원이었다. 임원들도 다수 포함된 미션이라, 일정 조율, 숙박시설 점검, 면담자료 작성, 양곤에서의 경제인들과의 만찬 준비, 네피도에서의 정부 고위 관료들과의 면담 일정 조율 등... 한 달 이상 미션 어렌지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는데, 정말 지금 다시 뒤돌아봐도 미칠 듯이 정신없고 손 떨리게 긴장되는 미션이었다.


이때도, 숙박시설 확보, 회장과 미얀마 장관들의 면담 시의 동시통역사 기용, 양곤의 만찬에 참석할 경제요인들을 모아주는 데 있어서, 나의 대학원 동기들과 선배들이 있는 네트워크, 없는 네트워크를 모두 활용해 정말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지금은 미얀마와 전혀 관계없는 일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그 당시에 물심양면으로 모든 서포트를 해 준 대학원 동기들과 선배들이 고마워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메일 보내고, 전화도 하면서 생활은 어떤지 비즈니스는 잘 되고 있는지 서로의 안부를 묻곤 한다.



마지막으로 미얀마에 출장 간 것이, 내가 "경영기획부"로 부서 이동하기 전이었으니, 2013년 경이었던 것 같다. 벌써 7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미얀마 최대 휴대폰 통신사 MPT, 출처: https://www.sumitomocorp.com/en/jp/business/case/group/mpt


현재 스미토모 상사는, 미얀마 최대 휴대폰 통신사인 MPT를 미얀마 정부와 공동 운영하고 있으며, 양곤 인근에 최신 공업단지인 띨라와 공업단지를 타사와 공동 운영하는 등, 여러 가지 다양한 비즈니스를 전개 중이다.

  

특히, 내가 미얀마를 처음 갔었던 2011년경 만해도 미얀마의 휴대폰 보급률이 전인구의 10% 미만이었는데, 지금 구글로 검색하니, 이미 100%가 넘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변변한 공업단지도 없어 외국기업들이 투자를 하고 싶어도 마땅히 공장을 지을 장소조차 없었던 미얀마에 있어, 띨라와 공업단지는 향후에도 내수와 수출의 전진기지가 될 것이다.


휴대폰 통신사업도 공업단지도 나는 당시 측면에서 해당 영업부서의 서포트만 하는 입장이었지만, 그들이 신규사업 진출을 하기 위한 교두보 구축에 조금이나마 기여했다는 점과, 그로 인해 우리 회사가 사업을 통하여 미얀마의 발전과 국민들의 생활수준 향상에 기여하고 있다는 생각에, 지난날들의 고생이 달콤한 추억으로 느껴진다.


코로나로 당분간 해외출장은 어렵겠지만, 언젠가는 10여 년 전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발전해 있을 미얀마에서, 친구들, 선배들과 술 한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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