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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춥다물 Dec 06. 2023

정우와 미현의 집 a

연립주택과 미니멀리스트 vs 맥시멀리스트

Seoul, South Korea 2018


 망원동에 있는 이 오래된 4층 연립주택 중 2층에 위치한 이 집은 전형적인 한국식 근대 주택의 평면을 가지고 있다. 90년대 이후 공동주택 건축 기준이 완화되면서 4층까지 연립주택을 지을 수 있게 된 후 서울에 우후죽순 지어진, 주차공간이 따로 없는, 오래된 4층 짜리 공동주택은 나에게 가장 매력 없고 재미없는 주택이다. 그러나 나는 이 평면이 재미없는 집에서 내가 아는 가장 웃긴 사람들과 살며, 짐도 챙겨 오지 못한 영국에 다시 돌아가지 못한 슬픔을 이겨냈다.('데미안의 집 a' 참조)


 중앙 계단을 올라오면 마주 보는 두 가구가 있다. 그 중 이 집은 왼쪽이다. 몸을 왼쪽으로 틀어 현관을 들어오면 전방에 거실이 보란 듯이 놓여 있고, 거실과 한 구획 안에 있지만 따로 문은 없는, 먼 주방이 뒷 베란다와 함께 연결되어 있다. 현관의 측면에는 집안에서 가장 무던한 자식이 사용하거나, 아이가 있는 집에서는 놀이방으로 쓰는 방(bedroom3)이 있다. 그리고 안방이 가장 안쪽에 화장실과 붙어 있고 그 화장실의 반대편에는 다른 방이 있는 식이었다. 그리고 햇볕이 가장 잘 드는 쪽에 위치한 큰 발코니에는 접이식 빨래 건조대가 천장에서 내려올 수 있게 설치되어 있다. 발코니 바닥은 반드시, 타일이며, 물을 써야 하는 한국 문화에 따라 세탁기와 여분의 수도가 있다. 이 집에서는 정우가 가장 큰 방(bedroom1)에서, 미현이 주방 옆방(bedroom2)에서 정우 동생인 정민이 현관 옆 방(bedroom3)에서 셋이 함께 살고 있다가 그중 막내 정민이가 대만으로 이사 가면서 그의 방이 비게 된다. 이들의 집에 영국회사의 배신으로 국제미아가 된 내가 정민이 대신 살게 된 것이 2018년 여름이었다. 나는 천지신명께 감사했다. 왜냐하면 정우와 미현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들 중에 둘이었고 그 당시 아직 친하지 않았던 정민이와도 더 많은 인연이 겹치길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우, 미현과 같이 살면서, 또 우리를 방문하는 정민이를 종종 만나면서 나와는 정말 다른, 그들의 정말로 이상한 면들을 충격적으로 알아가면서도 희한하게 그들에 대한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세간이 늘어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미니멀리스트 정우와 세상 만물이 집에 있어야 하는 맥시멀리스트 미현은 서로의 다른 방식을 내세우며 '난 널 사랑하지만 너 지금 헛소리한다.'며 다투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대부분 '네 마음 잘 알겠고 저녁이나 먹자' 하며 대화가 마무리되었는데 그중에서도 끝나지 않는 논쟁은 바로 냉장고였다. 그 전투에는 세미 맥시멀리스트 나도 참여하게 된다.

디스코볼을 연결하고 일렉트로닉 음악에 맞춰 식물들의 그림자와 함께 춤추던 사진을 찍은 방향이 화살표로 표시되어 있음

 이 집에서는 냉장고를 꽉 채우는 것은 정우의 의견에 따라 죄악시되었는데, 그 죄악은 이 집에서 미니멀리스트를 맡고 있는 정우가 보증금을 냈기 때문에 효력이 있었다. 보증금을 내는 자가 제일 큰 목소리를 가져야 하는 것을 당연히 아는 나와 미현은 눈치를 보며 그 몰래, 간식, 갖가지 과일, 채소 등을 빈 곳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내가, 영국에 짐을 다 두고 왔다더니, 냉장고를 꽉꽉 채우는 식재료 맥시멀리스트라는 것을 파악한 똑똑한 정우는 냉장고 과적을 항상 경계했다. 그러나 집 바로 옆 망원시장에서 같이 가기라도 하면 나는 정우에게 더 많은 채소와 과일을 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우야, 이거 봐. 이거 아보카도 다 해서 오천 원밖에 안 한대." 내가 가성비로 공격한다

    "흠, 글쎄? 싸다고 많이 사면 나중에 썩어서 버려. 우리 거의 집에서 한 끼 먹잖아?" 정우는 맞는 말로 방어한다.

 고향집에서 엄마가 과일과 채소로 꽉 채운 박스를 택배로 보냈다.

    "엄마가 사과랑 이것저것 보내줬어. 미현이랑 같이 먹자." 내가 엄마를 방패로 공격하면,

    "어우, 이게 다 들어갈 데가 있어? 이거 주변에 좀 나눠줘도 되지? 우리 셋이 다 못 먹어." 정우가 반격한다. 그러나 정우의 바람처럼 항상 냉장고가 텅 비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것은 놀랍게도 정우의 것이었다.

    "정우야, 혹시 이거 뭔 지 알아? 이거 새까매서 뭔지 짐작도 못하겠어."

    "아 그거... 우리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장이야. 버리지 못하고 내 마음속의 깊은 죄책감으로 지금 3년째 함께 살아가는 중. 어떻게 할지 좀 더 생각해 볼게."

    "정우야, 이거 뭐야? 이거 거의 미라화 됐는데?"

    "어우, 미안. 한때 망고였던 녀석이야. 그거 줘 내가 버릴게."

 나는 '이 써글년이 우리 엄마가 보내 준 건 냉장고에 반만 들어가게 하더니?'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보증금의 액수를 머릿속으로 다시 되새기며 말한다.

    "내가 널 존나 사랑하나 봐."

    "사랑은 힘은 정말 위대하지. 나도 정말 사랑해."


 반면 이 집의 맥시멀리스트를 맡고 있는 미현은 자신의 터질 것 같은 옷장을 뒤져 나에게 줄 (대부분) 가장 작은 옷을 찾아오는 엄청난 눈썰미를 가진 자였다. 미현은 공격은 시도 때도 없이 진행됐다. 갑자기 밥을 먹다가 기억이 난 옷을 찾으러 방으로 사라진다거나 자려고 누워있는데 자신의 작아진 옷을 우스꽝스럽게 입고 내 방으로 들어온다.

    "맞아. 이 옷이 있었어! 이거 내가 20살에 입었던 거예요. 이 옷 너무 멋져!"

    "춥다물 이거 좀 봐요. 진짜 웃겨. 이것도 춥다물 줄 거."

    "이거 미쳤어. 나 이거 입었었다니까. 자 이것도 춥다물 체형에 딱이네."

 나는 방어한다. 하지만 그 방어들은 100% 확률로 실패했다.

    "미현, 이건 너무 여성스러워서, 나한테는 안 어울릴...(걸쳐봄) 오잉? 뭐야 너무 예뻐."

    "하하. 괜찮아요. 저 이제 옷 안 줘도....(입어봄) 대박 이거 뭐야? 어디서 샀어요?"

우리가 북 치고 장구 치는 것을 보면서 정우는 혀를 끌끌 찼다.

    "아니, 미현 옷을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길 게 아니라, 좀 줄여봐. 저렇게 작은 옷을 왜 아직 갖고 있는 거야?"

    "완전 춥다물 맞춤복 같은 거 안 보여? 주인 찾아가려고 기다렸나 보지!"


 이렇게 극과 극으로 다른 둘이 유일하게 한 가지에 크게 동의하는 것이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목격할 때마다 엄청 놀라워하면서도 매번 나를 크게 조롱했는데, 그때는 바로 나의 부지런함을 목격할 때였다. 회사에서 돌아와서 가방을 내려놓고 거실의 큰 탁자에서 바로 조카에게 줄 그림책을 만들기 시작하는 나를, 퇴근하다가 마주한 정우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박수를 치며 들어온다.

    "짝짝짝, 미친 거 아니야? '근면'이 사람으로 태어나면 이런 모습일까? 미현, 나와서 춥다물 좀 봐. 퇴근하고 한시도 쉬지 않고 또 (스스로 만든) 일을 하고 있어."

 그러면 방에 누워있던 미현이 주말 연속극 톤으로 과장된 연기를 하며 나온다.

    "여보, 당신도 이제 제발 좀 쉬어요. 정말 나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애?"


 미니멀리스트맥시멀리스트근면의 의인화가 이곳에서 함께 농담 같은 하루 끝에 울고 웃었던 여름과 가을에 걸쳐 우리는 동네, 한강, 경복궁, 강릉으로 술을 마시러 다녔다. 술을 마시면서 누가 누가 재밌는 얘기를 더 많이 아는지 개그, 에피소드 배틀을 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때부터 스탠드업 코미디에 빠져 온갖 코미디쇼를 섭렵한 미현과 어떤 일이든 개그로 승화시키는 초능력을 가진 정우를 이기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난다.


 어김없이 술을 마신 다음 날 아침. 나는, 몸에 뜨겁고 빨간 것을 욱여넣고 싶어졌다. 먹어야 없어지는 종류의 엄청난 숙취였다. 그러나 정우와 미현은 아직 각자의 방에서 곤히 자고 있는 듯했다. 나는 이 동네를 지나면서 몇 번 봤던 가장 가까운 해장국(감자탕) 집을 기억해 냈다.  이름이 '양평해장국'이었던가. 고양이 세수와 양치만 하고 목이 늘어난 반팔티와 반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끌고 집을 나섰다. 거지꼴로 밖을 나서는 이것은, 주말이면 집 앞의 '망원동 맛집'에 줄 서는 사람들이 생기는 동네에 사는 사람만 할 수 있는 한심한 허세였다.

 숙취와 허세로 가득 찬 나는 느긋하게 슬리퍼를 끌고 골목길을 돌아 바로 보이는 양평해장국집으로 들어갔다. 가게는 중앙에 반찬 테이블을 중앙으로 왼쪽 반은 테이블 자리, 오른쪽 반은 바닥에 좌식 자리였는데 가게에는 주인 부부 외에 동네 어르신으로 보이는 중년 2명이 다른 테이블에 따로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어쩐지 혼자 가게로 들어서는 내 얼굴을 빤히 봤다. 나는 시선을 회피하며 그들 대신 메뉴판을 봤다. 거기에는 '양평해장국 보통 6,000원 , 특 8,000원'이라고만 적혀있었다. 밥 값이 아직 6,000원 일 때였다. 나는 '사장님 보통 하나만 주세요.' 하면서 중년 남성들이 앉은 테이블 자리에 멀찌감치 떨어져 반대편 좌식 자리에 앉았다. 앉아서 뜨거운 속에 차가운 물을 내리 들이붓고 있는 사이 빠르게 주문한 해장국이 나왔다. 그러나 내 앞에 나타난 것은 내가 생각했던 빨간 국물의 해장국(감자탕)이 아닌, 맑은 국물의 선지와 천엽등이 가지런히 올라가 있는 '양평식 해장국'이었다. 아. 그렇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가게 이름의 양평은 '양평식'이라는 뜻이며 양평식 해장국에는 선지가 들어간다는 것을. 선지를 먹지 못하는 나의 머리는 어느 때보다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숨을 가다듬고 일단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다가 흠칫 놀라(는 척 하)며 숟가락을 다시 놓고 오른쪽 주머니의 전화를 꺼내 귀에 가져다 댄다. 그리고 최대한 큰 소리로 연기를 시작했다.

    "네 여보세요. 네 맞는데요. 네에? 집에요? 지금요? 네 지금 바로 갈게요!"

조용한 가게에 내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자 예의 중년 남성들이 다시 나에게로 시선을 모은다. 나는 어서 자리에서 일어나, 주머니의 팔천 원 중 육천 원을 카운터에 급히 내고 슬리퍼를 찾아 신는다.

    "저 지금 급히 가봐야 해서 죄송합니다. 음식값은 여기 있습니다. 자. 그럼."

    "아, 아니, 음식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자 잠깐, 손도 안 대셨는데? 포장해 드릴까요? 아니면 금방 오시면 다시 데워 드릴게요."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지금 급한 일이 생겨서, 그 일이 또 아주 오래 걸릴 것 같아요!"

 나는, 급한 전화를 받(는 척 하)고, 슬리퍼 두 짝에 거의 엄지발가락만 겨우 끼운 채 '양평해장국' 집을 뛰쳐나온다. 그 가게가 있는 도로를 그대로 쭉 뛰어와서 자연스러운 코너링을 한 뒤, 골목으로 들어가서야 속도를 늦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숨을 고르며 나는 다시 아까 지나왔던 '맛집' 앞에 한 껏 차려입고 줄을 선 사람들 사이를 낄낄낄 웃으면서 지난다.  

 

 혼자 낄낄거리면서 남은 이천 원으로 라면 한 봉지와 삼각김밥을 사서 현관에 들어서는데 잠에서 깬 미현이 거실이 나와있다.

    "나가는 소리 아-까 들었는데 라면 사러 어디까지 간 거예요?"

    "아니 히히히. 갑자기 집에 불, 부훌, 크크크 처럼 연기를 해야 돼서."

    "응?????"

    "집에 히히히, 불난 것처럼. 크크크 지금, 낄낄낄 내가 멍청비용 육천 원을 지불하고 지금 요 앞에 '양평해장국'에서 소름 돋는 메서드 연기 하고 왔다고."

 지금 적어도 이 연립주택에 거주하는 2명 정도가 일산화탄소에 질식된 내 상상 속에서의 화재 상황, 일명 ‘양평 해장국 에피’를 앞과 뒤에 살을 더 붙여 코미디의 대가 미현에게 복기한다. 전화를 받는 척을 하는 장면에 특히 공을 들인다. 한참을 웃던 미현이 슬리퍼를 찾아 신고 양평해장국을 나서는 나의 모습을 자신의 버전으로 재해석한다. 나는 거실에서 배를 잡고 떼굴떼굴 굴러다닌다. 거실에서 우리가 떠드는 것을 듣고 정우가 방에서 머리를 부여잡고 나온다.

    "뭐야. 난 머리 아파 죽어. 둘은 신나 보이네."    

    "정우야, 지금 춥다물이 요 앞에 양평해장국에서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고 왔네. 좀 들어봐."

    "거길 왜? 너 선지해장국 못 먹잖아?"

 미현과 내가 동시에 대답한다.

    "그러니까!"


 나는 또다시 한번 "네에?"하고 전화를 받는 척하며 벌떡 일어서는 연기를 펼친다. 정우는 관자놀이를 부여잡고, 미현은 배를 잡는다. 나는 그들과 끊임없이 농담을 주고받았던 이 거실에서 몬스테라가 죽어서 울고, 영국에 돌아가지 못해서 울었는데 그들도 가끔 그렇게 바보 같은 이유들로 울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잊혔다. 이 재미없는 평면의 거실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이 우스웠고, 웃다가 울었느냐. 그것이 여기에서 일어났던 가장 중요하고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다. 그 소중한 거실의 사진은 디스코 볼을 연결하고 일렉트로닉 음악에 맞춰 식물들의 그림자와 함께 거실에서 그림자 춤 경연을 벌이던 사진, 이 초록색 사진 밖에 없는 것조차 너무 정우와 미현과 함께 했던 이야기 같다. 나는 그들과 조금 더 우습고 싶어서 정우와 미현이 그 가을 이사 갔던, 합정동 집으로 따라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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