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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Jun 12. 2024

해석학 요약: 가다머와 허시를 중심으로

해석학은 말 그대로 해석의 과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해석학이 등장한 계기는 종교개혁에 있는데, 가톨릭 교회와 교황의 권이에 반발하며 일어난 종교개혁에 따라 사람들은 성서에 대한 절대적인 해석도 의문을 갖고 여러 해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즉, 해석학에는 종교가 맨 먼저였으며, 이후 문학으로 퍼져나갔다. 18세기가 흘러 낭만주의가 등장하면서, 좋은 작품일란 저자의 특별한 천재적인 면모에서 기인한다고 이야기 되었다. 상상력의 초월적 능력이 이렇게 새롭게 강조되면서 문학의 창조자는 신성한 창조자처럼 보이기 시작하고, 또 어느 정도는 신성한 창조자의 대리자가 되었다. 한마디로 성스러운 경전의 지위가 문학으로 일정정도 이전했다는 것이다. 이때 작품은 매우 어렵기도 하면서, 문학이 일부 독자들에게 있어 부분적으로나마 종교의 역할을 했고, 그래서 의미와 중요성이 모두 증가했고 결국 문학에도 해석학이 필여해진 것이다. 낭만주의 시대 신학자 슐라이어마허는 경전 연구만이 아니라 문학에도 적용할 해석학 연구를 했으며, 그의 작업을 통해 해석학적 사고의 중심이 문학으로 오게 되었다. 이후 딜타이, 하이데거, 가다마의 작업을 통해 내려오는 해석학적 작업의 전통이 수립된다. 

 슐라이어마허의 전통에서 적용되는 기본적인 문제틀은 해석학적 순환이다. 허시는 독자와 텍스트 사이의 관계 또는 독자와 저자 사이의 관계를 묘사한다. 반대로 가다머는 해석학적 참여의 순환성은 하나의 부분에서 전체에 대한 기대로 갔다가, 다시 다음 부분으로 갔다가, 다시 전체에 대한 수정된 느낌으로 가는 식의 순환 패턴으로 진행된다고 말한다. 이때 해석학적 순환을 방해하는 우리의 예비적인 생각-가마머의 표현으로는 선입견이 있다. 선입견은 좋은 선입견과 나쁜 선입견으로 나눌 수 있는데, 좋은 선입견은 우리의 사전인식을 통해 의미 사전판단을 하는 것이고, 나쁜 선입견은 다른 역사적 지평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채 비약을 하는 것이다. 


가다머는 다른 시간이나 장소의 사고 방식으로 진입하기 위해 선입견을 밀어놓을 수 있다는, 자신의 주관성이나 사물을 보는 자신의 관점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다는 믿음인 역사주의에 맞선다. 즉, 가다머는 자신의 정신은 분리한 채 다른 정신에 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역사적인 객관성을 달성하는 방법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는 선입관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지평을 완전히 괄호 안에 넣는, 옆으로 밀어내는 방법은 불가능하다. 우선 다른 지평을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해여 한다. 가다머는 우리가 공통의 기반을 찾으려 하고, 과거와 현재, 여기와 저기를 융합하려는 행위인 지평융합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평융합의 긍정적인 결과를 가다머는 영향사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우리가 역사로 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해석자가 때, 언제나 기대 선입견을 갖고 작업하는 것을 깨닳아 한다고 말한다. 


가다머는 역사주의만이 아니라, 재산이 해석학의 낭만주의라고 부르는 것에도 반대한다. 낭만주의는 저자의 정신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가다머는 독자가 만나는 것은 저자가 아닌 텍스트이며, 그가 텍스트의 주제라고 부르는 것은 개인의 정신보다는 역사적 지평에 속한 것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허시는  의미가 말의 일이 아니라 의식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즉, 의미 지성사의 한순간이나 단순히 말로 간주되는 텍스트 속의 말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정신을 참조할 때 발견된다는 것이다. 허시에게 중요한 것은 의미이다. 가다머에게 중요한 것은 그 의미가 진실하다는 것이고, 바로 이 지점에서 두 사람은 갈라진다. 가다머는 기대의 불가피성에 대한 믿음 때문에 의미의 여가적 혹은 문화적 정확성을 기꺼이 희생한다. 그는 나의 해석에는 늘 내가 어느 정도 들어 있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내가 다른 지평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해석학적 순환은 악순환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허시는 텍스트 자체의 성격에는 작가의 의미와 일치하게 해석할 것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단지 작가의 의미를 존중하지 않으면 해석의 규범을 전혀 갖지 못하여 비평적 무정부 상태에 빠질 수 있다고 말한다. 즉, 허시는 작가의 있을 법한 의도를 재구성하는데 만족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재구성이 어떻게 역사적 조건이 지어진 그 자신의 의미와 인식의 틀 안에서만 진행될 수 있는가에 대해 주의를 가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허시는 역사주의적이다. 결국 허시는 상대주의의 타락을 맞기 위해 후설로 돌아가 의미는 결국 어떤 특정 시점에서 행한 한 개인의 의도적 행위이기 때문에 불변하다고 말한다. 



*참고자료 

-<<문학이론입문>> ,  아힘 가이젠한스뤼케

-<<문학이론>>, 폴 프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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