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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Oct 30. 2024

은어, 혹은 도시의 목가

윤대녕 단편 소설 「은어」,「Jaunary 9, 1993」

은어, 혹은 도시의 목가

-윤대녕 단편 소설 「은어」,「Jaunary 9, 1993」

 

민중 운동의 르네상스가 80년대라면, 한국 문학의 르네상스는 90년대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새천년을 앞둔 마지막 10년 동안 한국 사회의 참을 수 없는 불안과 공격적인 허무, 그리고 후기 자본주의의 타락을 담아낸 90년대 문학은 실로 ‘불이 꺼진 시대’의 여운을 깊게 남겼다. 그런 여운을 가장 잘 담아내어 90년대 문학의 정점에 오른 이가 있다면, 소설에서는 윤대녕을 말하고 싶다. 그의 소설 세계는 시적 산문으로 읽는 이를 매혹시키면서 자신의 세계로 끌어당기는데, 이 세계는 댄디한 인물이 현실의 진통과 허무로 점철된 안개 속 현실에서 방황하는 서사라 할 수 있다. 분명 현실의 고유 대명사를 가져와 쓰면서 현실성을 주며 90년대 물질 자본주의의 공허 속 환상적 현실에 방황하는 인물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현실의 슬픈 초상을 환상과 섞어 그려낸다. 1988년 등단을 한 이후, 그의 첫 번째 소설집인 『은어낚시통신』은 윤대녕의 환상 세계가 잘 담겨있는데, 남진우 평론가는 이를 두고 ‘존재의 시원으로 회귀’라는 아름다운 명칭으로 이 소설집을 수식한다. 표제작 「은어낚시통신」 외에도 숨막히게 아름다운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표제작 외에도 충분히 매혹적인 그의 단편들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은어」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사랑에도 조금 자유가 주어졌다. 순결과 같은 해괴망측한 종교적 미신은 약화 되었고 유교적 전통 역시 금이 갔다. 물론, 성 해방과는 좁힐 수 없는 괴리가 있지만, 적어도 루카치 표현대로 ‘자유와 사랑의 나라’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90년대 사랑에는 공허한 시대에 메마른, 가벼운 사랑이 결코 존재의 시원으로 회귀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하루키 소설이 선구적으로 이 지점을 탁월하게 포착했다. 한국보다 먼저 성장했던 일본 사회 속 가벼운 사랑의 공허함을 그려낸 하루키처럼, 남진우 평론가의 말대로, 윤대녕은 분명 하루키의 깊은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자신만의 세계를 확립하는 데에 있어 성공했으며, ‘하루키언’ 중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단편 「은어」는 작중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직접 ‘영원회귀’를 말한다. 영원회귀가 소설 초입에서 나온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처럼, 그의 소설 역시 허무한 시대에 초월성을 꿈꾼다. 성관계를 시적으로 풀어내는 묘사와 은어로 비유하는 모천회귀의 갈망은 소설을 경이롭게 채색한다.

90년대 소설이 그렇듯, 이 단편 역시 불륜이 작중 핵심 코드에 있다. 외도하는 아내와 외도하는 나의 서사를 통해 전통적인 가족 윤리에 대한 해체를 느낄 수 있다. 그러면서 아내의 불륜 사실을 어느 정도 인지하면서도 애인이 다른 남자의 아이의 벤 삼촌과 달리, 자살하기보다 똑같이 불륜을 하면서 전통적인 성윤리를 비웃는 듯하다. 무거웠던 성윤리를 해체한다는 점에서 통쾌해야 하나 어쩐지 더 메마르다. 윤대녕은 시적인 문체로 에로티시즘의 금기에 대한 위반을 통한 쾌락을 그리기보다, 위반에 대한 허무를 그려낸다.

 

「Jaunary 9, 1993 미아리통신」, 윤대녕의 리얼리티

윤대녕의 소설은 전통적인 리얼리즘과는 다른 환상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황석영-방현석-김소진 등으로 이어지는 리얼리즘 대가와는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고 이해되지만, 그의 단편 중 「Jaunary 9, 1993 미아리통신」은 드물게 리얼리즘 작품의 색체를 느낄 수 있다. 운동권이었던 세 명의 인물은 문학의 꿈을 품은 동지이다. 셋 다 본인들이 꿈꾼 문학인보다는 글을 써내는 노동자로서의 삶을 산다는 비참한 공통점은 이 둘을 술친구로 만든다. 셋은 술을 먹으려다가 시간이 일러 미아리에 점을 보러간 후, 잔뜩 술에 취하는 이야기이다. 윤대녕의 말대로, 문학을 조금 읽어본 사람이라면 김승옥의 「1964, 서울」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도시 하층민의 소외를 그려낸 김승옥의 감성적 소설과 비슷한 결에 위치해있다. 물론, 화이트칼라 노동자가 된 도시 중산층의 소외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소외는 술로 버티나, 결국 그 갈증은 해소되지 않는다. 운동이 잠잠하고 현실 정치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자폐적인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 뼈아프지만, 탁월하게 리얼리티를 살려냈따. 윤대녕 특유의 문장은 여기에다가 야릇한 에로티즘을 더한다.

 은어로 대표되는 윤대녕 소설 속 인물들은 사실 물이 없어 회귀할 수 없는 존재자인데, 그런 점에서 도시에 갇혀 있다. 즉, 물 없는 도시에서 울부짖는 은어의 목가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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