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시간의 어릿광대가 아니기에
사랑은 짧은 세월에 변하지 않고
운명이 다할 때까지 갼디는 것
만일 이것이 틀렸다면, 그렇게 밝혀졌다면
나는 글을 쓰지 않고,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을 것을
-세익스피어, <소네트 116>
소설을 이야기하기 앞서 세익스피어의 아름다운 소네트가 가리키는 사랑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보자. 사랑하는 사람은 또 다른 나이다.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소중한 나이다. 그렇기에 사랑을 하면, 바람이 부는 사소한 일조차 아름답게 느껴지고, 내가 아프더라도 사랑하는 이가 아픈 일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초월성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은 사용 가치도, 교환 가치도 없는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사랑은 인간을 억압하지 않고 구원할 수 있는 마력을 지닌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마력을 통해 이웃을, 민족을, 더 나아가 인류를 구원할 수 있지 않을까? 존 버거의 소설 『A가 X에게』는 이 오래된 질문에 대해 가장 정확한 답을 제시한다.
‘편지로 씌어진 소설’이라는 부제처럼, 투옥된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존 버거는 실제로 획득한 편지를 바탕으로 이를 가공하여 소설로 재구성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이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것인지, 혹은 어느 사건과 지역을 배경으로 한 것인지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소설에서 특수한 코드를 삭제함으로써 억압받는 모든 이들에게 헌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의 서사는 간단하다. A가 X에게 보내는 편지로, 여기서 A는 약사이자 X의 연인인 아이다이고, X는 테러리스트 단체를 결성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투옥되어 이중종신형을 선고받은 사비에르이다. 투옥된 사비에르를 위해 아이다는 편지를 써 내려가며, 자신의 일상 이야기, 세상의 이야기, 간단한 물품들, 손수 그린 그림 그리고 사비에르에 대한 사랑을 시적으로 그려낸다. 사비에르는 감옥에서 느낀 단상을 아이다의 편지 뒷면에 적는다. 그는 마르코스, 프란츠 파농, 우고 차베스 등 반제국주의 투사들을 인용하여 반세계화, 반신자유주의, 더 나아가 반자본주의를 논한다. 사랑하는 연인이 쓴 편지에 억압받는 인류를 위한 단상을 적는다는 것은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해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사랑하는 사람이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무력을 사용하려다 잡혀간 사비에르의 메모는 세계에 대한 분노이자 사랑하는 이에 대한 언약이다. 사랑과 저항을 경이롭게 잇는 작업은 이 소설이 단순히 연애 소설의 정점에 오른 작품이 아니라, 혁명 소설의 반열에 올랐다는 평가를 가능케 한다.
연애 소설이라는 측면에서, 이 작품은 오랫동안 반복되어온 ‘이룰 수 없는 사랑의 비극’을 처절하게 재현한다. 사랑하는 연인이 만날 수 없다는 단순한 아픔이 온 우주가 함께 울어줘야 할 슬픔이라는 것을 전한다. 아이다가 사비에르에게 보내는 편지는 우주를 울릴 만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 둘을 가로막는 존재는 '그들'이다. 비록 정체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들은 체제와 권력 구조 속에서 사랑과 자유를 억압하는 존재로,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인 자유를 억압한다. 책 서문에 적힌 ‘가산 카나파니를 기억하며’를 통해 그들을 추측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 해방 투사이자 뛰어난 소설가인 가산 카나파니는 레바논에서 망명 생활 중 이스라엘의 암살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 소설은 가산 카나파니로 대표되는 반제국주의 투사들에게 헌사하는 작품이다. 다시 말해,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수호하는 자들에 맞선 이름 없이 죽어간 투사들과 그들의 연인들의 서사라고 할 수 있다. 편지 형식의 가공된 방식과 아이다의 사랑이 담긴 문장, 그리고 사비에르의 강력한 저항의 단상은 사랑과 저항을 잇는 다리가 된다. 박연준, 진은영 등 수많은 한국 문인들이 이 다리에 매혹되었다. 이 소설이 연애 소설이자 사회 소설로 가진 아름다운 매력이다.
궁극적으로 이 소설은, 사랑은 사람을 움직이고, 사회를 변화시키며, 궁극적으로 우리가 속한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비록 사랑이 ‘무용하고 쓸데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진정한 사랑은 모든 것을 초월하며, 다른 세계로 도약하는 발판이 된다. 존 버거의 『A가 X에게』는 이러한 사랑의 힘을 간결하면서도 아름답게 그려냈다.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에서 ‘그들’에 맞선 모든 투사를 기억하며 책을 덮는다.
“우리는 희망을 갖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지켜준다.” (P.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