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황혼이 깃든 저녁, 혹은 새벽의 희미한 별빛을 볼 때면, 다시 낭만적 반자본주의의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다. 그곳에선 초기 루카치와 하이데거, 그리고 카를 슈미트가 나란히 앉아 회색빛 세계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지핀 불의 불꽃은 은은히 피어오르며 나를 끌어당겨온다. 이 불꽃은 모더니티의 차가운 질주 속에서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애잔한 몸부림이었다.
루카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우리의 사유가 역사적 총체성을 잃고 파편화되어 버린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낭만적 반자본주의는 그 총체성을 찾으려는 갈망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대개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며, 그리하여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기계에 맞서는 무력한 저항으로 남아 있음을.
하이데거는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는 열정을 불살랐다. 기술과 자본에 종속된 인간이 잃어버린 참된 '존재'를 되찾고자 하는 시도는 참으로 매혹적이었다. 그러나 그 낭만적 열정은, 사회구조의 변혁 없이 개개인의 내적 변화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허공을 맴돌 뿐이었다. 그가 말한 '세계-내-존재'는 결국 세계의 구조적 착취 속에서 고요히 무너져 내렸다.
카를 슈미트는 친구와 적의 구별이야말로 정치의 본질이라고 했다. 낭만적 반자본주의는 자본을 적으로 삼고, 자연과 전통, 공동체를 친구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그 적대의 이상은, 자본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세계, 모든 이가 평등하게 살아가는 사회주의적 비전에 비해서는 그저 낭만적이고 동화적인 그림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사회주의적 반자본주의자인 나는 그 낭만을 품었지만, 더 나아가야 함을 안다. 루카치의 총체성을 추구하면서도, 하이데거의 존재에 귀 기울이며, 슈미트의 적대 앞에 제대로 맞서는 것을 넘어선다. 그것은 체제 전복과 새로운 세계의 창조로 나아가는 운동이다. 낭만적 반자본주의가 주는 아름다운 꿈에서 깨어나, 나는 더 실재적이고 구체적인 꿈, 모두가 해방된 사회주의의 바다로 향하고자 매일을 산다.
그 길은 험난하겠지만, 과거의 낭만은 추억 속 작은 등불로 남겨두고, 나는 더 큰 불꽃을 쫓아간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혁명의 길이기에.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반자본주의 선언》 2장을 읽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