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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푼젤 Feb 28. 2023

넌 내가 찜했어!

회계법인의 '어싸인' 제도


회계법인은 감사(Audit) 본부, 세무(Tax) 본부, 재무자문(FAS) 본부, 크게 3가지 본부로 구성되어 있고, 그 안에서 다시 몇 개의 세부 본부로 나다.

아주 간단하게 도식화해 본 것인데, 실제로는 당연히 더 복잡하다.


내가 입사하던 때, 안진회계법인의 감사본부에는 2 개의 금융본부와 5 개의 제조본부가 있었고, 나의 첫 소속은 '금융 1 본부'였다. 금융본부를 가르는 기준은 사실 자잘한 금융사가 아닌 '시중은행'의 보유 여부인데, 당시 우리 본부는 '외환은행(하나은행으로 합병되기 이전의 舊 외환은행)'을, 금융 2 본부는 '우리금융그룹'이라는 메가클라이언트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입사하기 전까지 금융 1 본부에는 외환은행 외에도 국민은행이라는 메가클라이언트가 있었다고 한다. 그땐 정말 명실상부 금융본부스러웠다고(?).


하지만 금융본부라고 해서 제조업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고, 제조본부라고 해서 금융사가 없는 것도 아닌지라 크게 의미가 있는 구분은 아니다. 시즌 중 내가 나갔던 회사들을 돌이켜보면 오히려 금융사보다 제조업의 비율이 더 높았던 것 같다. 또 본부 구성은 자주 개편되기도 하고 이름도 때에 따라 바뀌기에, 중요한 것은 어떤 본부에 속했느냐보다 '어떤 팀을 만나느냐', '누구에게 선택되느냐'라 할 수 있다.


Assign

1  (일·책임 등을) 맡기다 [배정하다/부과하다].

2  선임하다, 파견하다.

3  (사람을) 배치하다.    


회계법인의 특이한 업무방식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어싸인(Assign)'이라는 제도다. 일반 기업들은 부서가 한번 정해지면 조직개편이나 특별하게 부서이동을 하지 않는 한 계속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팀원들과 업무를 진행하게 된다. 하지만 회계사는 매주 일하는 장소와 함께, 담당 업무와 팀원까지 다.


회계법인의 저연차 회계사들, 특히 1-2년 차 꼬꼬마 회계사들은 마치 간택을 기다리는 인력시장의 일꾼들과 같다. 어떤 인차지 함께 하느냐에 따라 한 주의, 혹은 몇 달의 운명이 휙휙 달라진다. 업무 스타일이나 성격이 잘 맞는 인차지에게 계속 선택되기도 하고, 인차지에게 밉보이거나 스타일이 잘 안 맞으면 다시선택되지 않을 수도 있다. 본인이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이어도 인차지가 선택하지 않으면 그 일을 할 수 없는 노릇이고, 본인이 정말 하고 싶은 업무가 있다면 인차지에게 선택을 간청해 볼 수도 있다.

어싸인 간청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 계속...


나 요즘 삼성전자 감사해 ~ (으쓱)


감사부서에 갓 입사한 꼬꼬마 회계사들은 대부분 우리은행과 같은 시중은행이나 삼성전자, 현대차 등 누구나 알만한 대기업의 감사업무에 어싸인되는 것을 꿈꾼다. 어리고 유치한 마음이긴 하지만,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중소기업보다는 삐까뻔쩍한(?) 대기업을 감사하고 있다고 하면 아무래도 간지(?)가 좀 나기 때문이다. 회계법인에서 요즘 무슨 일 하느냐고 누가 물었을 때, "나 요즘 XX금속공업이라는 손톱깎이 회사 감사하고 있어"라고 하는 대신, "음~ 나 요즘 삼성전자 감사해~"하괜히 어깨에 뽕이 좀 들어가는 기분일 테니까.

손톱깎이 회사를 비하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xx금속공업은 실제로 내가 나갔던 회사인데, 6.25 전쟁 직후인 1954년부터 국내 최초로 손톱깎이를 제조해 엄청난 수출과 매출을 달성한 존경스러운 회사였다. 감사 끝나고 예쁜 손톱깎이 세트를 선물 받아 집에 가져갔더니 엄마가 무척 좋아하기도 했다. 근데 친구들 만나서 손톱깎이 회사 감사 나갔다 왔다고 했더니 그런 곳도 감사를 받냐며 나를 살짝 놀리긴 했다.


게다가 삼성전자 같은 메가 업무에 한번 배정되면 매 분기마다 3-4주씩, 시즌에는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자동으로 어싸인이 쭉 잡히게 된다. 그 한 달 동안 남들은 매주 다른 곳을 돌아다녀야 하는데, 메가클라이언트에 어싸인되면 삼성전자 하나만 잘 보면 되는 것이다. 기간은 4배지만 할 일은 4배 수준이 아니므로 조금이나마 여유로운 감사기간을 보낼 수 있다.


내 손톱 밑의 가시가 제일 아프다.


남들보다 늦은 입사로 첫 시즌 때 온갖 자잘한 감사업무(미리 스케쥴링이 되지 않아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던 업무들이었다. 비싸고(?) 좋은 업무들은 미리미리 스케쥴링이 완료된다.)에 어싸인되었던 나는 3일/2일씩 일주일에 2군데 어싸인이 되거나, 극단적으로는 2일/2일/1일, 이렇게 일주일 동안 3군데나 어싸인이 되기도 했다. 아무리 작은 회사여도 조서와 보고서 작성은 꼼꼼히 이루어져야 하고, 막내 회계사들은 현금흐름표와 조회서 등 온갖 잡무까지 맡아야 하므로 어싸인 수가 많아지면 업무가 과중될 수밖에 없다.


물론 메가클라이언트에 어싸인되는 것이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감사 업무가 보통 3명-6명 소규모로 팀이 꾸려지는데 반해 메가클라이언트는 적게는 십 수명, 많게는 수십 명까지도 함께 어싸인이 되므로 그 안에서 일반 기업과 같은 특유의 조직문화가 생기기도 한다. 또 메가클라이언트 감사에서 병아리 회계사는 재무제표 중 아주 작은 부분, 계정 한 두 부분을 맡아서 보는 게 끝이지만, 작은 회사에 인차지랑 둘이 나가게 되면 막내임에도 대부분의 계정을 당할 수 있다. 한 곳에 박혀있는 대신 여러 가지 업무 어싸인되어 바쁘게 돌아다니다 보면 그만큼 많은 업을 경험할 수 있고, 보다 많은 계정을 공부하며 훨씬 더 빠른 성장이 가능할 수 있다.

사실 시즌에는 자기가 하는 일이 유독 더 힘들고 바쁘게 느껴지기에 메가클라이언트에 어싸인된 동기들이 마냥 여유로워 보이고, 부러웠는지도 모르겠다. 막상 메가클라이언트 감사업무에 어싸인이 되면 나름의 고충도 정말 많을 텐데 말이다.


같이 일하기 싫은 인차지의 총애를 받아 계속 어싸인이 반복된다면...?


staff 입장에서 어싸인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는 사실상 없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일을 하긴 해야 . 하지만 정말 간절하게 특정 인차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든 더 부지런하고 힘이 센(연차가 높거나 더 파워가 있는) 다른 인차지의 눈에 들어 그 인차지에게 먼저 어싸인되면 된다. 어싸인은 기본적으로 선착순이기에 부지런한 인차지들이 좋은 인재 빠르게 확보할 수 있고, 조직 내에서 파워가 있는 인차지라면 기존에 완료된 어싸인 바꿀 수 있다.

새롭게 시작하는 중요한 job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면(경력자라거나 여타 이유로) 이미 완료된 어싸인을 뭉개고 뺏어갈 수도 있다.


혹은 위험을 감수하고 싫어하는 인차지의 업무를 일부러 굼뜨게 하거실수를 연발하는 등 살짝 개긴다면(?) 다시 어싸인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런 경우 소문이 안 좋게 나서 다른 인차지들로부터도 배척될 가능성이 크므로 추천하고 싶은 방법은 아니다. 어쨌든 어싸인 제도의 큰 장점은 본인이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굳이 부서를 옮기거나 이직을 하지 않더라도 다시는 그 사람과 업무를 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는 것, 그리고 본인이 원하는 업무를 하기 위해 노력해 볼 여지가 많다는 것이겠지.


사람 눈은 다 비슷하다.

사람 눈은 다 비슷하기에, 일 잘하는 staff는 누구에게나 인기가 많다. 늘 어싸인 달력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을 만큼 일이 많고 바쁘다는 것은 그만큼 능력이 있고, 많은 인차지들에게 사랑받는 인재라는 뜻이다. 반대로 동기들은 바쁜데 본인만 어싸인이 없어 한량같이 놀고 있다면, 당장 편하고 좋으면서도 어딘가 씁쓸한 기분이 들 것이다. 어느 직장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일과 개인의 삶 사이에서 '적당히'라는 균형을 맞추는 것 참 어렵다.





올해는 꼭 글을 꾸준히, 자주 써야겠다는 다짐을 했는데, 두 달이 또 후루룩 지나고 말았네요ㅠ_ㅠ 3월이 오기 전에 부랴부랴 한 편을 발행해 봅니다.


어싸인 얘기로 물꼬를 트다 보니 하고 싶은 얘기가 어찌나 많은지 글이 너무 길어져서, 다음 편에 좀 더 이어서 써보려고 해요! 다음 편에선 원하는 어싸인을 얻는 방법, 그리고 사심 어싸인과 회계법인의 여러 스캔들 관한 이야기를 해볼 예정이에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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