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지의 가정경제 내 화폐화 현상의 기록_2020.7.30.
놀이터 아이들의 엄마들과 친구 먹는데 3년이 걸렸다. 놀이터에는 통제되지 않는 에너자이저 같은 아이들이 가득했다. 여기저기에서 아이들이 웃고, 울고, 괴성과 돌고래소리가 난무하는 곳이었다. 큰 아이들이 작은 아이들을 다치게 할까봐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켜봐야 했다. 아이가 좀 크고 나자, 큰 아이들이 갈 곳이 없어 작은 아이들이 노는 공간에라도 있어야 하는 풍경이 안쓰럽다는 걸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거의 놀이터 공포증에 가깝다고 봐도 되는 나라는 엄마와 사느라, 아이는 그동안 놀이터에서 오래오래 놀 수가 없었다. 어쩌다 내가 정말 큰맘을 먹고 모기 기피제부터 물과 물티슈, 완충된 휴대용 보조배터리 등 각종 준비물을 챙기고 나가야 아이는 마음껏 양껏 놀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놀이터를 지배하는 여러 놀이 중 딱지의 세계, 바로 “딱판”에서 아이는 계속 레벨 0의 상태에 있었다. 큰 것 한 장에 2천원이나 하는, 진짜 초대형은 6천원이나 한다는 고무딱지. 한 번 잃으면 김밥 한 줄에서 세 줄씩 날아가는 딱지 따위 사 주지 않겠다는 양육자들로 인해, 그런 아이를 가엾게 여겨 주변에서 나눠 준 고무딱지 두어 장 가진 게 다였다. 그렇게 긴(?) 세월이 흘렀다.
아이는 정식으로 초등학생이 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사상 유래 없이 입학이 미뤄진 올해의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은 5월까지 유치원에서도, 어린이집에서도 돌봐주지 않아 양육자들과 부대끼며 집이나 집 아주 근처에서만 놀아야 했다. 놀이터는 혼자 가기에 가깝거나 길이 안전하지 않았고, 놀이터가 무서워 아이들의 갈등이나 낯선 사람들과의 대화를 피하고 싶은 나는 집 앞 하천에서 산책은 같이 해 줄지언정 놀이터는 잘 데려가주질 않았다. 그러다 마침 이사와 학교 정식 등교가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이사한 곳 가까이에는 화장실까지 갖춰진 넓고 안전한 놀이터가 있었다. 놀이터를 무서워하는 엄마가 굳이 나와 있지 않아도 되는 조건이 갖춰지자, 아이는 이제 날씨만 허락한다면 거의 매일 놀이터에 갈 수 있게 됐다.
새롭게 바뀐 환경에, 친구들도 다 낯선데, 이사 온 이 동네에서는 아이들이 고무딱지가 아닌 조그만 종이로 된 캐릭터딱지를 치는 것이었다. 이 “딱판”에서도 유행이 있는데 듣자하니 전에 살던 동네에서는 종이딱지 유행이 지나고 고무딱지만 치는 시대가 흐르는 중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아이는 종이를 접어서 만든 딱지가 아니라 캐릭터가 그려진, 압축된 종이딱지를 처음 본 것이다. 이건 해 볼만 하다 싶어서 빌려서 좀 쳐보고 아이는 나를 졸라 종이딱지 열 장이 든 한 통을 얻었다. 그런데 새로 알게 된 사실은, 전의 동네와는 달리 아이들이 “가판(가짜로 치는 판. 가져온 만큼 도로 가져감.)”이 아니라 “진판(진짜로 치는 판. 잃으면 얄짤 없음.)”만 상대해 준다는 것이다. 이제 실로 약육강식의 정글 같은 작은 사회, 놀이터 라이프가 시작된 것이다.
아이는 하루가 멀다 하고 울고 들어왔다. 친구들이, 형아들이 딱지가 없어서 놀아주지 않는단다. 엄마아빠가 일러준 대로 다른 장난감을 가지고 나가서 같이 놀자고 해도 놀아주지 않는단다. 친구가 없다고 엉엉엉.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이사 가겠다고 엉엉엉. 종이딱지도 한 통에 천 원씩인데, 사주는 족족 잃고 매일을 울고 들어오니 속 터지는 양육자들은 그럴 거면 딱지 치지 말고 놀이터도 나가지 말라고도 해 보았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그게 될 리가 없었다. 아이는 어떻게든 그 또래 그룹에 끼고 싶고, 언제나 가능한 한 최대로 많이 놀고 싶었다.
어느 날 집에 친한 동생이 아이와 함께 놀러왔다. 내 아이보다 한 살 어린 그 집 아이는 형아와 치겠다며 딱지를 커다란 박스에 가득 담아왔다. 놀라고 부러워하는 나와 아이에게, 동생은 딱지의 세계에도 중고딱지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팁을 주었다. 같은 지역의 중고물품 거래를 도와주는 ㄷ앱을 활용해서 중고딱지를 사러 나갔는데 심지어 초등학생이 직접 자신의 딱지를 팔러 나와 있기도 했단다. 중고딱지 거래 경험의 대모님인 것만 같은 동생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당장 전국 기반의 중고물품 거래로 유명한 ㅈ인터넷 카페와 동네 기반의 중고물품 거래를 도와주는 ㄷ앱에 “딱지”라는 알람키워드를 걸었다. 딱지와 관련된 게시글이 올라오면 밤이고 낮이고 핸드폰이 울리는 통에 예민한 나는 자다가도 몇 번씩 깨고는 했다. 그렇게 신나게 중고딱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무엇이든 쉽게 얻고 쉽게 버리는 습관을 들여서는 안 된다며, 절약과 놀이와 학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겠다며 딱테크를 시작했다. 아이가 읽은 책을 기록하는 독서통장에 10권을 기록하면 딱지 10개를 줬다. 처음에는 20권을 기록하면 딱지 10개를 주기로 했지만, 책은 금방 읽어도 쓰는 데는 한참 걸리고 힘들어하는 여덟 살에게 너무 잔인한 듯해서 독서기록 10권당 딱지 10개로 기준을 낮췄다. 이렇게 집안에서 사용하는 상품으로서 딱지가 활용되기 시작했다.
딱지를 딱지로 맞추는 조준조차도 잘 하지 못해 레벨 0에 불과했던 아이에게 시간이 지나자 가뭄에 콩 나듯 따는 순간도 생겼다. 그러자 아이는 더 신이 났다. 게다가 하필 동네에 고무딱지의 바람이 다시 불어와 두 종류의 딱지가 공존하는 과도기 상태가 되었다. 나는 종이딱지와 고무딱지 모두 닥치는 대로 구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딱지들은 크기와 두께와 브랜드가 다양했고, 큰 딱지일수록 상대적으로 뒤집힐 확률이 적어 더 좋은 딱지였다. 저렴하게 얻어오는 딱지들은 주로 작은 크기의 것들이 많았다. 열 개에서 스무 개 중 큰 딱지가 하나 정도라, 아이는 엄마 고마워요를 하면서도 대왕딱지가 모자란 것을 아쉬워했다. 그리고는 언제나와 같이 또 잃고 울며 왔다. 놀이터가 무서운 나였지만 가끔 우는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에 나가 큰 아이들에게 놀이터는 다 같이 즐겁게 놀라고 있는 곳이라며 잔소리를 하고, 가끔은 반칙들이 난무하고 있지는 않은지 감시도 했다.
고무딱지는 얻어오든, 중고를 사오든, 집에 가지고 오면 바로 베이킹소다를 푼 물에 담그고, 구연산을 풀어 세척을 했다. 딱지는 여러 아이들의 손을 거쳤으니, 세척할 때 보면 가끔 아이들의 이름이 써있거나, 스티커가 붙어있는 등 전 주인들의 흔적이 보이기도 했다. 알록달록하고 다양한 크기와 모양을 지닌 고무딱지들이 커다란 비치타올 위에 몸을 누이고 선풍기 바람에 몸을 말리고 있는 것을 자꾸 보다보니, 스크루지 영감이 돈을 빨아 말리면서 변태같이 웃고 있으면 그 모습이 지금의 나와 같겠지 라는 상상이 들곤 했다. 하나하나 세척해서 말리고, 개수를 세거나 모양의 구분을 위해 자꾸 살피다보니, 고무딱지가 이제 예뻐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나는 딱지를 신나게 잃으면서도 딱지만 보면 신나는 아이를 위해 중고로 천 개가 넘는 종이 딱지와 오백 개에 가까운 고무딱지를 모으기에 이르렀다.
아이의 딱지사랑으로 딱지가 화폐에 가까운 기능을 하기 시작하자 독재자인 나는 이 가상화폐이자 가정 내에서는 실존하는 딱지라는 화폐를 다용도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아이아빠가 욕실의 거울장을 수리했다고 칭찬 내지는 찬양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딱지를 주었다. 그리고 딱지를 받은 아이아빠는 그 딱지를 아이에게 주면서 신나게 생색을 냈다. 정작 용돈은 쓰는 방법을 잘 몰라 무조건 모으기만 하는 아이가, 딱지를 목표로 두게 하자 방 정리도 열심히, 숙제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애로운, 그러나 속으로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싸게 사서 비싸게 써먹는 딱테크를 이루었다며 나는 만족했다.
이렇게 두 달 간 딱지를 열심히 친 아이는 이제 겨우 딱지를 조준해서 치는 것은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딱판 레벨 0은 벗어난 것 같고, 0.7이나 0.9 정도 되었다고 봐야할까. 이젠 좀 덜 울고, 부당한 게임에 당하게 되면 화도 낼 수 있게 되었다. 정작 놀이터 공포가 있는 이 엄마는 새로운 동네 엄마들에게 말을 걸어볼 용기도 내지 못하고 있으니 놀이터 레벨 0에서 0.1정도는 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데, 아이는 역시 어른보다 성장 속도가 빠르다.
5월 말에 정식 등교를 일주일에 한 번씩 했고, 겨우 두 달 남짓 다녔는데 방학을 시작한다. 아이의 첫 여름방학은 고강도 딱지 전지훈련의 날들이 될 거 같고, 놀이터에서 또 형아들한테 괴롭힘 당하고 오지는 않을까 동동 구르는 나도 놀이터 레벨을 좀 올려야 하는 뜨거운 여름이 되겠지. 거참, 딱테크 한 번 제대로 하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