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데미안
마흔이 되기 전에 다시 읽어보기
얼마 전에 문득 데미안이 다시 읽고 싶어 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박경리의 소설 시장과 전장을 읽고 나서 문득 데미안을 주문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10대에 읽었던 데미안과 내년이면 마흔이 되는 30대의 마지막에 읽는 데미안은 어떤 느낌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런데 비교할 수가 없다. 기억에 없다, 읽는 내내 든 생각은
처음 읽는 것 같다.이다 이럴 수가!
여전히 데미안은 어렵고, 완전한 이해는 나에게 힘든 책이었다. 아직도 문해력이 딸린다. 얼마 전 강의를 들었는데 저자는 가장 감명 깊은 책이 데미안이라고 했는데, 책은 씹어 먹을 듯이 읽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런데 데미안은 읽는 시간은 다른 책의 두세네 배는 걸린다. 씹어 먹지 않아도 참 천천히 읽게 되는 책이다. 어제는 오늘은 기필코 끝까지 읽겠다며 아이들을 재우고, 독서등을 켜는 나에게 남편이
데미안이 왜 유명한지 알아? 너무 재미없어서 유명한 거야! 한다.
참 도움 안된다며 그냥 자라며 다시 데미안의 세계로 빠져 들었다. 그런데 소설은 재미가 없진 않다. 시장과 전장을 읽었을 때도 소설은 앞으로 일에 대한 궁금증이 있으므로 재미는 있다. 단지 자극적인 스토리로 빨리 읽게 하는 책과 이해가 필요해서 느리게 읽게 하는 소설이 있을 뿐! 물론 고전들은 후자이긴 하다.
아몬드와 같은 성장 소설은 2시간이면 후다닥 읽힌다. 재미도 있고, 가독성도 좋고~ 비슷한 성장 소설이긴 하나 데미안은 좀 더디게 읽힌다. 아마 번역의 문제도 있을 것이고, 철학적이고, 심리적인 부분이 많아서 그럴 것이다.
헤르만 헤세는 처음에 이 책을 유명 작가인 자신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익명의 이름으로 발표했다. 이유를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 책이 가져올 결과가 두려워서 그랬다고만 밝히고 있다. 아마 그 시대 때 카인의 존재를 다르게 해석하는 것에 대한 시선, 모두가 악을 악이라고 할 때 아닐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헤세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명문 신학교에 진학하지만 적응을 잘하지 못했고, 자살시도를 하는 등 힘겨운 유년을 시절을 보낸다. 이러한 부분이 책에도 어느 정도 녹아 있는 것 같다.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가 10살부터 20살까지 10여 년의 성장을 거치면서 심정 성장을 그리는 소설이다. 어린 시절 우리가 말하는 소위 일진 크로머에게 고통받고 있을 때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고통을 해결해 주며, 싱클레어는 데미안에게 존경심 부끄러움 많은 감정들을 느낀다. 어떻게 해결했는지 궁금한데~ 끝까지 방법은 나오지 않고, 크로머가 그 뒤로 싱클레어 근처도 가지 않는 설정으로 끝난다.
데미안은 성숙하고, 영리하고, 좋은 수식어는 다 가져다 쓸 수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데미안과의 대화 속에서 싱클레어는 점차 내면을 마주하게 되고, 이때부터 어려운 용어들과 문구들이 총 막라해서 나온다,
헤세가 정신병원에 있을 때 융의 제자에게 치료를 받아서 그런지 융의 심리학 부분들에 대한 생각들이 많이 담겨 있다. 내면이 세계를 만나서 자아를 찾아가는 길에 대한 부분들이 모호한 용어들로 적혀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이 구절은 데미안을 읽은 이라면 기억하는 유명 구절이다. 신이라고 해도 되나, 악마?
어둡고 악마적이고 사악한 원칙을 밝은 빛의 세계와 결합시킬 수 있는 태양의 신으로 이 책에서는 말한다. 뭐 어려운 말이나. 악마인데 악마 아닌 악마 같은 신!!
그리고 주인공 싱클레어와 데미안은 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전쟁에 징집된다. 헤세가 독일인이다 보니 전쟁이 가져다주는 파괴와 삶의 희망 죽음에 대한 결합 부분에 대한 표현들도 많다. 격동기를 보낸 저자가 전쟁에서 찾고 싶은 희망을 이 글을 통해 알리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 40대에 또다시 도전하리라 마음먹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