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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벌새 Aug 04. 2023

쓸쓸함과 적막이 가득했던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

경제학도의 아주 개인적인 감상 후기

2023.04.20 ~ 08.20

서울시립미술관

계단(1949)
애드워드 호퍼와 조호퍼의 호토부스 사진(약 1930년대)


지루한 습작들, 자화상 파트를 지난 후 처음 본 호퍼의 완성본. 진 연두색 커튼, 흰색이 많이 섞인 연노랑 벽지, 카펫의 색깔, 파스텔 하늘색의 문, 금색도 노란색도 아닌 문의 손잡이, 현관과 계단과 벽이 만든 사각 프레임들에 둘러 쌓인 곡선의 자연, 그리고 그 자연에는 흰색이 섞여있지 않다. 색조합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퍼의 색조합은 이런 느낌이구나'하며 다시 한번 기뻤다. 호퍼 전시 전에는 하늘 한 점, 김환기를 봤었는데 오두방정+주접을 왕창 떨며 행복과 기쁨에 겨워 전시를 관람했었다. 그래서 이때의 기쁨은 김환기 전시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다음, 자연물과 도시(인공물)를 대비시키는 호퍼의 시각이 새롭게 다가왔다. 계단과 문은 호퍼 그림에서 도시와 자연의 경계선과 같은 역할인데, 혹은 도시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호퍼가 도시를 포착하는 시선이 언제나 그렇듯, 계단(1949) 역시 쓸쓸함을 머금고 있다.


호퍼와 조세핀은 자주 싸우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호퍼가 조세핀을 그린 그림들을 볼 때면 참 따뜻하고 자연스러워 좋았다. 전시회에는 도시를 바라보는 쓸쓸한 호퍼의 시각을 담은 그림이 많아서 전시를 보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쓸쓸함이 짓눌리게 되는데, 이때 호퍼가 그린 조세핀의 그림을 보면 약간의 해방감도 든다. 약 100년 전 인생네컷 사진도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6월의 오후 혹은 봄의 오후(1907)
밤의 그림자(1921)

"애칭(밤의 그림자에 사용된 기법)을 시작한 뒤부터 내 그림은 구체화되어 가는 듯하다."


호퍼는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점점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기 시작하며 대중이 이에 반응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글을 쓰며 생각해 보니 호퍼가 다른 화가들과 다른 독자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고 이를 세상에 내보이기 시작하면서 '대중들 역시 이에 반응하게 된 것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됐다. 내용과 형식의 일치성은 위대한 예술의 기본 전제처럼 그렇게 작품 속에 있는 것이지. 그럼에도 인상주의 영향을 팍! 팍! 받은, 아직 호퍼의 시각이 다듬어지지 않았을 때 완성된 6월의 오후도 참 좋다.

황혼의 집(1935)

아참, 밤의 그림자는 함께 전시회를 간 유빈이의 최애 작품 중 하나였다. 유빈이의 또 다른 최애는 <황혼의 집, 1935>였는데 황혼을 초록빛으로 표현한 게 인상 깊었다고 한다. 오! 그건 차마 인식하지도 못했었는데! 역시 전시는 누군가와 함께 가야 해!



통로의 두 사람(1927)
호퍼 부부가 관람한 연극 티켓 모음(1925-36)

어떻게 이렇게 쓸쓸한 장면을 포착해 그려낼 수 있지! 연극이 시작하기 전후 느꼈던 감정과 감각들이 이 그림을 통해 비로소 인식되고 느껴진다. 특유의 먼지냄새와, 소리가 잘 울려 퍼지는 극장에서 극이 시작하기 전후 사람이 별로 없는 그동안에 내가 덩그러니 와 있는 느낌. 그 고요한 적막 속에서 내가 만들어내는 소음은 메아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렇게 되돌아온 소음은 고요하다. 하지만 극의 시작 전이라면 극이 시작되기 전의 긴장을 더욱 부각하는 수준으로, 극이 끝난 후라면 극이 끝난 후의 적막을 더욱 부각하는 수준으로, 딱 그 수준으로 거슬릴 만큼 크게 되돌아온다. 극장에 가면 짐짓 느낄 수 있는 나를 더 외롭게 만드는, 특유의 진공상태에 있는 듯한 그 느낌이 그림을 통해 너무나 생경하게 느껴졌다.



밤의 창문(1928)

현대적... 아니 레트로 현대적이라고 표현하는 게 좋을까? 그리고 관음적인 시선. 흰색인지 하늘색인지 모를 커튼, 노랑과 누렁 사이의 레디에이터, 게시판을 연상시키는 쨍한 초록색 카펫, 다홍빛 커튼, 갈색도 빨강도 아닌 촌스러운 침대의 색깔. 마치 모텔... 그것도 20년 전쯤 지어진 싸구려 모텔 같아. 그래서 또 쓸쓸하고 적막해. 창문 너머의 조명이 만들어낸 빛과 그림자도 예술이다. 싸구려 모텔을 참 아름답게도 그려놨다 이 남자.




오전 7시(1948)
이층에 내리는 햇빛(1960)


호퍼가 휴가 가서 그린 그림들에는 좀 쓸쓸함이 덜 묻어나지만서도, 그 와중에 아침 7시의 적막에 가까운 고요를 포착해 그렸다 이 남자는... <이층에 내리는 햇빛> 도 참 관음적이다. 이 관음적인 시선은 도시의 시선을 상징하는 것만 같다. 텅 비고 외롭고 단절되어 있는 도시의 시선. 직선의 인공물들은 다채로운 곡선의 자연과 대비되어 우두커니 서 있다. 인공물 특유의 새하얀 빛을 내며.

호퍼의 시선, 그리고 정서가 잘 느껴지는 그림들.


*문제 시 삭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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