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들인다는 것을
어느 날부터 내 모든 단점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지극히 나의 개인적인 의견이 가득한, 어쩌면 나만 아는 나의 단점들까지 모두 하나둘씩 받아들인다. 내 안에 깊이 숨어있는 방어기제가 벌인 작은 소동일 지도 모르겠으나, 그 나비효과는 대단했다.
한동안은 꽤나 마음이 편했다. 내 단점들을 받아들이고 나니, 남들에게 상처받을 일이 적었기 때문이다. 그 말들은 더 이상 상처가 아닌, 그저 '나'라는 사람을 가리키는 '사실'에 불과한 말들이니까. 받아들이기만 하면 인정하기란 꽤 쉬운 법이다.
누군가 내게 말했다. "살 좀 빼라, 그 대학교 얼굴 많이 보는 곳인데 왜 넣었어?, 너는 너무 우유부단해, 넌 부모님한테 죄송하지도 않니?, 너 때문에 힘들다, 넌 결혼하지 마 남편 될 사람이 불쌍하니까, 외적인 건 부족하니까 넌 연기력으로 승부 봐야 해, 등골 좀 그만 빼먹어, 이젠 현실적으로 생각할 때 안 됐냐?, 네가 아픈 건 뚱뚱해서 그런 거야, 그냥 네가 못하는 거야, 성격 진짜 별나다."
어쩌면 별 거 아닌, 그저 내가 들은 일부에 불과한 이 수많은 말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신기한 건 그 이후, 남들로부터 상처받지 않게 되었다. 이걸 깨닫고 나니, 남들에게 상처받는 것보다 차라리 나 스스로에게 상처받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날부턴, 남들에게 상처받기 전에 내가 나에게 상처를 주기 시작했다. 난 해낼 수 없다고, 못한다고, 지금까지 그래왔듯 나는 뭐 하나라도 이룰 수 없는 사람이라고, 난 너무 별로인 사람이라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시간이 흐르고, 누군가는 내게 단단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젠 웬만한 말로는 남들에게 상처받지 않는다. 그보다 내가 더 심한 말로 날 상처주니까. 그러나 과연, 이 모습이 단단한 사람일까.
내가 가진 이 모습들이 '자기혐오'라는 것을 비교적 최근에 깨닫게 되었다. 그저 나를 보다 강하게 만들어 주는 습관이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내가 나를 가장 약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터였는지 내게 평온한 일상이 펼쳐지면 '행복하다'라는 생각보단 '이제 죽어도 괜찮겠다.' 같은 생각을 늘 하곤 했다. 드라이브를 하면서 멋진 풍경을 보다가도, 아무 생각 없이 침대에 누울 때에도, 누군가와 함께 있다가도, 맛있는 음식을 먹다가도 늘 내 죽음을 속으로 삼키곤 했다. 딱히 큰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그저 정말 삶에 미련 같은 것이 없다고 느껴서일 뿐이다.
저런 생각들이, 자기혐오로부터 비롯되어 나온 생각이란 것을 알게 되었을 땐 꽤 충격이었다. 그저 남들로부터 상처받기 싫어 나를 보호하고자 했던 내 나름대로의 방어들이었는데, 그것이 언제부턴가 나를 덮쳐버렸고, 끊임없이 나 자신을 싫어하다 보니, 내 삶 또한 내가 놓아버린 것이었다. 나를 존중해주지 않으니, 내 삶 또한 내가 존중해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 큰 이유였을 것이다. 쉽게 말해, 내가 나를 그리고 내 인생을 버린 것이었다.
난 항상 불행한 일이 내 인생에 닥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 이유 모를 우울에 이유가 생길 테니까. 남들이 나를 불행하다 여길 만큼, 그리고 내가 나를 불행하다 여길 만큼, 우울해지길 바랐다. 누군가 이유를 물으면 자세히 설명해주진 못하겠지만 아마 이러한 생각도 내 자기혐오로 인한 결과이지 않을까 싶다.
내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을 미워하면서 살아가다 보니 삶에 대한 미련이 사라졌다. 이러한 상태가 실은 만족스러웠다. 작은 거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었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고, 불안함 또한 없었다. 더 이상 내게 남들이 하는 말은 의미가 없었고, 그렇기에 말 한마디 한 마디에 지나친 의미부여 또한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상처를 받지도, 조급해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불안해하지도 않게 된 지금의 '나'라는 모습은 만족스럽기에 충분했다.
하루하루 살아내고 있다. 그저 시간이 흐르니까, 태어났으니까. 한동안 '왜 살아야 할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으려 애쓴 적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답은 없었다. 머릿속에선 끊임없이 '왜?'를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꽤 쓸모없는 생각이었다.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한들 변하는 건 없을 테니까. 그저 살아가야 한다는 건 똑같으니까.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없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숨이 턱 막히곤 했다. 불안함도, 조급함도, 두려움도 아니다. 그저, 내 안에 깊이 내재되어 있는 작은 결핍일 것이다. 숨이 막히는 건 아마도 어떻게 해야 사라지는 건지, 언제 사라지는 건지, 애초에 사라질 수 있는 건지 마저 잘 모르겠는 그런 작은 결핍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한 '선택'을 한다. 끊임없이 펼쳐져있는 갈림길에서 우린 몇 번이고 주저앉는다. 잘 모르겠다. 어떤 선택이 맞는 선택인지, 애초에 맞는 선택이라는 건 누가 정해준 것인지. 나는 또 돈을 벌기 위해 나아갈 것이다. 돈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으니까. 이 사실이 끔찍할 만큼 숨이 막힌다. 답답하고, 답답해져서 남아있지 않던 미련보다 더한 밑바닥을 향해 숨어버린다. 그런 밤이 오면 난 침대 위에서 또 한 번 내뱉는다. "이제 그만 살아도 될 것 같은데, "라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도, 애정도, 사랑도, 존중도 없는 사람의 삶은 피폐해지기 쉽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고,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 또한 때때로 소용없다 생각하니까.
그러나 지금은 소용없다 생각하지 않는다. 여전히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습관이 남아있지만 그럼에도 벗어나려 노력하는 중에 있다. 더 이상 '그만 살고 싶다' 같은 생각은 안 하고 싶다. 행복하면 행복하다고 내뱉고, 평온하면 그저 평온하다고 내뱉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연습하고 있다. 안 좋은 말을 내뱉을 때마다 다시 예쁜 말로 덮으려고 하거나, 누군가 내게 해주는 칭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굳이 내 단점을 되새기려 하지 않고 있다.
받아들이고 나면 인정하게 되고, 인정하게 되면 그건 '사실'이 된다. 그리고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그 '사실'을 사랑해 주는 것이다. 사실을 사실로만 받아들이게 되면 그저 자기혐오의 밑거름이 되어줄 뿐이었다. 이젠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을 사랑해 줄 용기가.
자기혐오 벗을 날을 향해, 자기혐오 벗을 나를 위해 이젠 처음과는 다른 의미로 나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마저 사랑해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