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 은 Aug 27. 2024

계절의 뚜렷함 #2

남자랑 둘이서 영화 보는 거 어떻게 하는 건데,

'이 정도면 니 여기 블랙리스트 된 거 같은데?'


내 평생 동안 들린 옷가게 횟수보다, 소개팅을 준비하며 들린 옷가게 횟수가 더 많을 지경이었다. 


유독 많이 들린 옷가게가 있었는데, 그곳에 들어갈 때마다 왠지 직원들 표정이 '쟤 또 왔네'라고 말하는 듯했다. 친구는 내게 '블랙리스트 된 거 아니냐'라고 웃으며 말했지만 내심 진짜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들의 시선을 신경 쓰기엔 내 옷장 상태가 처참했다.


-


첫 번째 소개팅 날 상대방은 댄디한 느낌의 옷을 입고 나왔고, 나는 어느 정도 캐주얼하게 입고 나갔다. 그래서 다음엔 상대방의 옷 스타일에 맞춰 입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고생 끝에 흰색 치마를 사게 되었다.


고생이라는 단어를 택한 것은, 실은 소개팅이 이어지면서 지친 마음이 컸었다. 안 하던 행동들을 갑자기 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노력'을 하는 일이 나에겐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면 필요한 시기였다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문득 다들 노력하면서 사는 거였구나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듯 들었다.


두 번째 소개팅 당일 날, 친구는 내게 화장을 해주었고 나는 흰색 치마와 남색 가디건을 입었다. 누가 봐도 데이트하러 가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약속 장소였던 영화관 앞, 처음 입어보는 스타일의 옷을 입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으니 왠지 기분이 좋았다. 하늘은 예뻤고, 날씨는 적당했고, 장소는 영화관이라는 점이 자연스레 내 입꼬리를 올려주는 듯했다.  


잠시 뒤 상대방의 모습이 보였다. 난 그의 옷을 보자마자 아차 싶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청바지를 입고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어떤 옷을 입고 나오는지 물어봤어야 했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상대방이 나에게 맞춰주려 했다는 걸 알고 나니까 그 순간의 모든 상황이 설렘으로 바뀌었던 것 같다.


영화관에 들어와 표를 예매하고 팝콘 L 하나와 콜라 2개를 샀다. 구매하기 전 팝콘 M 2, 콜라 2 / 팝콘 L 1, 콜라 2개라는 선택지가 나와서 살짝 당황하고 있던 순간에 상대방이 먼저 팝콘 1, 콜라 2를 골라줘서 여러 의미로 안심했던 것 같다. 


영화 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있어 자리에 앉아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첫 번째 소개팅 상대방은 내게 '파피용'이라는 책을 추천해 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오늘이 오기 전까지 열심히 책을 읽었고 결국 읽지는 못했지만, 상대방에게 책을 읽었다고 말해주었다.


생각했던 반응과 약간 다른 그의 모습에 살짝 당황했지만 내 나름대로 관심의 표현이었다. 그게 좋은 방향으로 흘렀는지는 잘 모르겠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말이다. 


우린 짧으면서도 긴 것 같은 그 시간들을 날씨, 학교, 오면서 있었던 일 그리고 약간의 정적들로 열심히 채워나갔다.


이 당시에 봤던 영화는 '파묘'였는데, 나에겐 상당히 힘든 134분이었다. 


난 영화를 보기 전 상대방에게 친구 얘기를 해주었다.


'내 친구가 무서운 영화 보러 영화관 갔는데 너무 무서워서 노이즈 캔슬링 모드 한 에어팟을 귀에 끼운 채로 영화를 봤대'라며 웃으면서 말해주었는데, 그게 내가 될 뻔했다.

 

원래 무서운 영화를 잘 못 보기도 하고, 본다고 해도 영화관에서는 절대 안 보는 편이다. 무서운 분위기를 형성하는 BGM과 연출들을 눈에 다 담기도 힘든 거대한 스크린과 성능 좋은 스피커들을 통해 본다는 것은 나에겐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포 영화를 잘 보는 상대방 옆에서 계속 발작을 일으킬 수는 없기 때문에, 난 눈을 감았다.


영화관을 가서, 영화를 보지 않았다. 

 

무서운 장면이 나올 것 같을 때는 그 직전에 계속 눈을 감았는데, 후반으로 갈수록 거의 계속 눈을 감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 청각은 어찌할 수 없었다. 눈을 감고 소리만 들으니 내 상상력만 더 풍부해졌다. 


하지만 이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팝콘을 먹을 때는 혹시라도 손이 닿을까 싶어 열심히 상대방 손을 피해 깨작깨작 팝콘을 먹었고, 무서운 영화도 한몫했지만 남자와 둘이서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 또한 엄청난 긴장을 하게 만들었다. 


원래 가지고 있던 과민성대장증후군은 그날 극도로 심해진 듯한 느낌이었고, 배에서 소리 날까 봐, 무서운 영화 보다가 소리 지를까 봐, 팝콘 먹다가 손이 닿을까 봐 등의 생각들로 정말 말 그대로 내겐 '쉽지 않은' 소개팅 장소였다. 


내가 생각한 영화관 데이트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심장이 많이 뛰었던 것 같다.


영화가 끝난 뒤 재밌게 봤다고 말하는 상대방의 말에 최대한 공감을 해주며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은 이자카야였는데 초밥이 맛있는 곳이었다. 식당엔 우리밖에 없었고 왠지 아직 연인 사이가 아닌 상태에서 간 이자카야는 뭔가 더 어색했던 것 같다. 그런 분위기와 함께 식사를 마친 후 카페로 향했다.


카페에서 여러 질문들을 많이 했다. 서로의 옷에 대해서도 얘기를 하고, 성격이나 서로의 생각 같은 것들을 많이 주고받았다.


 그리곤 상대방은 자연스럽게 내게 물었다.


'다음엔 언제 보지?'


그 말에 전과 같은 실수는 하지 않겠다며 열심히 표정관리를 하면서 대답을 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다음엔 친구 사이도 연인 사이도 아닌 이 애매한 관계를 끝내겠다고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계절의 뚜렷함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