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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 은 Aug 19. 2024

계절의 뚜렷함 #1

첫 소개팅은 어려워,

'안녕하세요-'


숨겨지지 않는 어색함을 애써 뒤로한 채 오십 번은 연습했던 첫인사를 건넸던 날, 그날은 별 거 없는 하루가 봄으로 바뀌는 날이었다.


-


계절이 바뀌는 그 느릿한 시간들 속에 딱히 감흥은 없었다. 반복되는 계절의 변화는 그저 날씨와 나이에만 영향을 줄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나날들이 계속되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소개팅이 진행되었다.


꽤 오랜만에 만난 고향 친구들과 여느 때와 다름없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주고받던 '여자/남자 소개해 줄 사람?'이 진짜 성사된 것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난 낯선 사람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빨리 만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상대방의 연락에 난 그 시기를 조금 늦춰달라 말하였다. 그도 그럴게 당장 소개팅 자리에 나가기엔 준비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외적으로 꾸미는 것에 큰 관심이 없던 시기였기에 내겐 작은 것 하나하나가 다 도전이었다.


옷이며, 머리며, 화장이며, 친구들의 도움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깨달았다.


'와, 나 진짜 대충 살고 있었구나!'


소개팅을 받기 전에 난 2달간의 병원 실습을 끝내고 난 후, 혼자 강릉 여행을 갔다가 간 김에 머리까지 짧게 잘라버렸다. 나이가 달라지는 것에도, 1월 1일조차도 내겐 무의미했기에 이번 해 역시 내겐 무의미할 참이었다. 그러니, 대충 사는 것이 문제 될 리 없었는데,


문제가, 되어버렸다.


어쨌든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금세 소개팅 날이 다가왔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 전 수없이 내뱉어 보는 '안녕하세요'와 지금이라도 집으로 돌아갈까 싶은 발걸음이 합쳐져 꽤나 요상한 모양새로 거리를 거닐게 되었다.


'상대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할 리 없잖아? 그냥 오늘 하루 처음 보는 사람과 밥만 먹고 오면 되는 거야! 별 거 아니야!'라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에 도착한 나는 보자마자 상대가 마음에 들어버렸다.


반대의 상황은 생각지도 못한 변수였다.


연습했던 인사를 건네면서 마주한 얼굴에 가뜩이나 빨리 뛰던 심장이 더 빨리 뛰게 되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2층에 있는 식당을 향해 계단을 올라가면서 미리 준비한 말들을 주고받았다.


식당엔 상대방과 나만 있었고, 그저 처음 보는 사람과 밥만 먹는 자리라고 하기엔 온 세상이 '넌 지금 소개팅 중이야'라고 알려주는 것만 같은 식당 분위기였다.


자리에 앉아 메뉴를 고르고, 머릿속에 겨우 겨우 저장해 둔 질문 리스트들을 하나씩 꺼내 대화를 이어나갔다. 잠시 뒤 직원 분께서 웰컴 드링크로 사과 주스를 주셨는데 마시려고 잔을 들 때 손이 너무 떨려서 바로 마시질 못했다. 사과주스에 금단 현상이 나타난다는 게 신기할 무렵,


상대가 불편하진 않는지, 재미없진 않는지, 내 모습은 어떤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이젠 자아가 여러 개가 된 기분이었다.


어느새 밥을 다 먹고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낯가림도 심하고, 말을 재밌게 하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에 최대한 상대가 불편하지 않도록 이야깃거리들을 머릿속에 꾹꾹 눌러 담아갔는데, 만난 지 약 2시간 만에 동이 났다.


머릿속은 ‘무슨 말하지’로 가득 찼고, 급기야 창밖을 보며 사색하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점점 어두워져 가는 창밖을 바라보다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내뱉었다.


‘정적도 대화의 일부라고 했어..!’


그렇게 멋쩍은 웃음과 함께 우린 무수히 많은 대화를 정적 속에서 나누었다.


-


아찔한 시간들이 흐르기를 반복하던 때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오늘이 마지막이겠다.‘


살짝 지루해 보이는 듯한 상대방의 분위기에 이렇게 내 첫 번째 소개팅은 끝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원래는 다음이 또 있다면 얘기하려고 했던 대화 주제들을 그날 몽땅 다 얘기했다. 왠지 다음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런 얘기, 저런 얘기들을 쏟아내고 난 후 몇 번의 대화 뒤에 상대방은 말했다.


‘그럼 다음에 영화 같이 볼래?’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기에, 표정 관리를 완벽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나름 2년 동안 배운 연기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된, 절망적인 날이었다.)


그렇게 첫 번째로 끝이 날 거라 생각했던 소개팅이 ‘아직’ 끝나지 않은 소개팅이 되었고, 다음을 기약하며 카페 마감 시간을 앞두고 밖으로 나왔다.


짧은 대화를 나누며 버스 정류장까지 같이 걸어가는 길은 왠지 설렜던 것 같다. 어쩌면 연인 관계가 될지도 모르는 적은 가능성을 가진 사람과 함께하고 있는 그 순간은,


무의미했던 봄에, 왜인지 의미가 담길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그렇게 버스 정류장에 다 와갈 때쯤, 내가 타야 하는 버스가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난 다음 버스를 타야겠다고 생각하던 순간에 상대방은 ‘저 버스 탈래?’라고 말했고, 타는 사람이 많아 애매하게 계속 멈춰있던 버스를 향해 나는 달렸다.


나름의 변명을 하자면 내가 타는 버스는 배차 간격이 꽤 긴 시간이었고, 왠지 다음 버스까지 같이 기다려줄 것 같은 사람이었기에 괜히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냅다 달렸던 것 같다.


그렇게 제대로 작별 인사도 못하고 난 버스에 올라탔다. ’이게 맞나 ‘라는 생각에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헤어져서 미안하다는 연락을 보냈다. 상대방은 괜찮다고 말하며 전화번호 교환을 하자고 했다. 난 바로 번호를 보내줬고, 상대방한테서 바로 전화가 왔다.


‘이거 내 번호야 저장해!’라고 말하는 상대방의 말에 애써 침착하며 알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버스 안에서 나는 엄청나게 뛰는 심장과 빨개져 가는 게 느껴지는 얼굴을 부여잡으며, 정색으로 가득한 버스 안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겨우 진정했다.

무언가 간질 거리는 듯한 느낌에 창문을 열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버스 안 사람들과 똑같이 정색을 유지하며 그렇게 집으로 돌아갔다.


아직 뭐가 뭔지, 제대로 소개팅을 한 건지,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는 그런 상황들 속에서


두 번째 만남이 4일 뒤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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