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볼 당시 나에게는 더 이상 믿음이 힘쓰지 못한다고 생각했었다. 한때는 눈앞의 현실보다 이상을 더 크게 보고 싶어 했는데, 기도하면 주시는 은혜로 고통을 이겨낼 때도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다 놓아버렸다. 실패했다. 실패는 실패에 익숙해져서, 사람은 원래 그렇다고 약한 마음을 편들었다. 예배 말씀이 안 들어왔다. 이미 나는 그 길에서 도망쳤고 무언가 소중한 걸 놓아버렸는데 뒤늦게 돌이키고 회개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어차피 도돌이표가 버티고 서 있어서 이 바닥으로 돌아올 게 분명했다.
이 상태에서 본 프란츠의 선택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대체 왜? 왜 기어이 죽는 거지? 지금까지 나는 <침묵>의 기치지로에게, 그의 비굴하고 나약하다 못해 추악한 밑바닥에 마음이 갔다. 강직한 순교자보다 성화를 밟고 목숨을 부지한 배교자가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신앙과 신념은 다르지 않은가. 신념에 이르지 못한 신앙, 실패로 보이는 신앙을 신앙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소망 없는 죄인이지만 주님이 손잡아주시지 않는가. 그런데 마지막에..
“세상이 선해지는 이유엔 드러나지 않은 선행이 있으며 세상이 그리 참혹하지 않은 이유엔 묵묵히 신념을 지키다가 찾지 않는 무덤에 영면한 이들이 있다.”
영화가 끝나고 조지 엘리엇의 문장과 그 뒤로 흘러나오는 음악은 프란츠의 선택에 대한 의문을, 이 삶에 대한 질문으로 이끌었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었나. 무엇을 믿고 있었나. 이 세상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형태와 대상이 다를 뿐 폭력과 억압은 계속된다고, 어떤 정치나 경제 체제나 기술 발전도 유토피아를 가져다줄 수 없으며 모든 인간은 고통의 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고, 노력해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신을 믿었다. 이곳엔 희망이 없어 보였다. 나의 믿음은 의존이나 회피에 가까웠다. 무언가를 거스를, 그게 악이라고 해도 거스르고 반대하고 부딪힐 힘이 없다고 느꼈다. 수동적인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하다가 만 것은 있어도 기어이 해내고 만 것은 없다. 해야 해서 하는 것과 하게 돼서 하는 것을 제외하면 무엇이 남는가. 무엇을 하기로 결심했는가. 없다. 나는 세상에 불의를 보다가 말았다. 당장 내 삶의 문제에 급급해서, 믿음은 삶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나는 1940년대의 참혹함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을, 비참한 고통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겪어보기 전에는 모른다. 내가 그들이 되고, 그들의 고통이 내 고통이 되기 전까지 나는 고통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 나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회스 가족과 다를 것 없이, 담장 안에서 거리를 두고 나만의 정원을 지키려 했다.
프란츠는, 고통을, 고통의 길을, 어둡고 비참한 곳에서 죽음에 이르는 길을 걸어나갔다. 그 선택을 단순히 히틀러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부하는 양심의 행위라고 할 수 없겠다. 프란츠는 미친 세상에서 죽어 나가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다수가 따르는 편한 길을 선택할 수 없었다. "못 합니다." 프란츠는 죽음으로 대답했다. 그의 전부를 바친 신앙 고백. "저는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되는 일은 아무래도 못 하겠습니다." 그에게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되는 일은 뭐였을까. 사람을 죽이는 일, 전쟁에 가담하는 일,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일, 불의한 권력에 복종하는 일, 광기와 폭력을 거스르지 않는 일, 알면서도 회피하는 일, 참혹한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일,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며 가족을 지키는 일.. 그가 정신력이 강해서 신념을 고집한 게 아니었다. 그는 절망적인 현실에 깊이 괴로워했고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으며 살고 싶었고 고난 속에서 기도하고 기도했다.
신은 사랑을 말씀하신다. 신은 인간이 되어 고통을 당하다 십자가를 지셨다.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다. 죽음은 사랑이다. 사랑은 고통에서 시작한다. 함께 겪어나가는 것. 그리고 함께 그 너머를 바라보는 것. 이곳에서 사랑이 깊어진다.
다시 프란츠를 본다. 그의 죽음은 헛되고 절망적일까? 1943년 3월 2일부터 1943년 8월 9일, 프란츠가 징집되어 히틀러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부하고 끌려간 뒤부터 사형장에 들어가기까지 현실은 내내 비참했다. 마을에서의 소외, 감옥에서의 폭력과 조롱과 죽음. 그러나 보이는 현실 위에 그들의 편지, 그들의 절절한 기도가 무언가를 향한다. ‘주님은 나의 빛이라 어두운 곳을 밝히시며 영원한 빛으로 인도하십니다.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요새시여 힘을 주세요. 주님을 따를 힘을...’ 그는 죽는 날까지 기도했다. 현실의 시선에서 현실은 그를 가두고 그를 짓밟고 그를 죽였지만, 그의 믿음은 죽음을 넘었다. 그가 죽기 직전에 그려낸 이미지는 광활한 풀밭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장면이다. 태양을 향해. 자유롭게. 그의 믿음은 보이지 않기에 선명했고, 불가능하기에 자유로웠다. ‘어쩔 수 없음‘ 다음은 공허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은 뜨겁다.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눌러앉아 있던 나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을 가리킨, 삶을 바친 그의 믿음은 헛되지 않았다. 우리 마음을 오래도록 뜨겁게 할 것이다.
이번엔 파니를 본다. 파니는 왜 프란츠를 말리지 않았을까? 제발 죽지 말라고 그를 붙잡고 설득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렸으면 어땠을까? 파니는 무너져내리는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어서 흙을 파헤치고 풀을 쥐어뜯고 울타리를 걷어찬다. 소용없다. 프란츠의 사형 선고를 듣고 찾아가서 만나는 장면, 거기서 프란츠는 묻는다. “이해할 수 있지?” 이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단 한 사람도 누구도 프란츠를 이해할 수 없다. 거기에 파니의 대답이 심장을 후벼판다. “사랑해. 어떤 선택을 하든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당신 편이야. 언제까지나. 옳은 일을 해.” 이해를 묻는 질문에 사랑으로 답한다. ‘하느님, 저보다도 그이를 사랑하시죠? 그이에게 용기를 주세요. 지혜와 힘을 주세요.’ 누구보다 그를 사랑하기에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견디고 극복할 수도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랑을, 더한 사랑을 하느님께 구한다. 그렇게 사랑은 믿음을, 믿음은 사랑을 더한다.
그리고 프란츠와 파니. 그들의 믿음과 사랑은 소망을 이야기한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들리는 프란츠의 목소리. “저 높이 나무 위에 집을 지으면 어땠을까? 새처럼 자유롭게 산으로 날아가는 거야.” 그리고 프란츠가 죽고 나서 그에게 대답하듯 파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모든 것의 의미를 이해할 때가 올 거야. 모든 의문이 풀리겠지. 우리가 왜 사는지도.. 다시 만나자. 과일나무를 심고 밭을 일구며 전처럼 사는 거야. 프란츠. 거기서 만나. 그 산에서” 영화의 시작과 끝은 산으로 통한다. 산을 무엇을 뜻할까. 프란츠의 산은 저 높이, 세상과 떨어져서 나아가야 할 방향, 그의 믿음을 나타내는 듯하고, 파니의 산은 그들이 한때 함께했던 시간, 그리움과 사랑으로 느껴진다. 파니는 새가 되어 날아가는 프란츠를 다 헤아릴 수 없지만, 다만 산에서의 만남을 소망한다. 믿음과 사랑, 그리고 소망. 엔딩크레딧 너머로 아름다운 음악과 새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들은 산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 자유롭게 새처럼, 전처럼 그 산에서.
“세상이 선해지는 이유엔 드러나지 않은 선행이 있으며 세상이 그리 참혹하지 않은 이유엔 묵묵히 신념을 지키다가 찾지 않는 무덤에 영면한 이들이 있다.”
마지막으로 다시 이 문장을 읽으며, 더 이상 나에게 믿음이 힘쓰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 <히든라이프>를 연달아 보면서, 고통을 외면하거나 고통을 피하는 삶의 공허함과 고통을 파고 들어가는 삶의 뜨거움을 느꼈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믿을 것인가. 이 세상은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가. 당분간 이 세 가지 질문을 품고 살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