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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파리 Aug 25. 2020

09. 피레네 산은 그러하다

- 창문을 열면 피레네가 보인다-

몇 주간의 장마가 계속된다. 

피레네 산을 끼고 있는 동네라 그런지 비가 몰아칠 때면 문득 하늘 무서운 생각이 든다. 숲 전체를 뒤흔들기도 하는 거센 바람과 쏟아지는 비 앞에 인간은 아무런 손을 쓸 수 없음을 느낀다. 


예전 사람들은 아마 자연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많았을 거다. 내가 과연 그 가르치는 바를 배울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뒤늦게 피레네의 겨울에게 빚을 지고 있음은 확실하다.


숭고한 장소들은 우리를 부드럽게 다독여 한계를 인정하게 한다... 그런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다면, 우리 삶을 힘겹게 만드는 사건들, 필연적으로 우리를 먼지로 돌려보낼 그 크고 헤아릴 수 없는 사건들을 좀 더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중-


그래도 인간인지라 가만히 누워있다 보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데, 


프랑스 대학원은 붙을 수나 있을까··· 

하던 영어나 살려서 미국으로 갈걸··· 

나와 아내가 다른 지역의 대학원에 붙게 된다면··· 

졸업 후에는 뭘 먹고살아야 하나··· 

한국 돌아가서 빌붙고 살 전세 집 하나 없는데··· 


떠나오기 전 수없이 다짐을 하고 왔어도 언제나 그랬듯 불안은 툭! 하고 튀어나온다. 그렇게 밤새 뒤척이다가 뜬 눈으로 아침을 맞는 기분은, 하··· 침대에 누워있는 꼬락서니 하며··· 이것이 진정 잉여의 삶인가. 


새벽 동안 몰아닥친 바람 때문인지 주변 나무들이 많이 헐거워져 동네가 휑하기 그지없지만, 그래도 좋은 걸 보니 아직 이곳을 떠날 때는 아닌 듯싶다. 크게 숨을 내쉬고 음악을 틀고 바깥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본다. 


오늘은 어학원을 제껴야겠다. 이렇게 해서 안 간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모범생인 착한 아내는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라 내버려두고 자기는 주섬주섬 싸서 우산을 챙겨 나간다. 뭔가 씁쓸하지만 이내 기분이 다시 좋아지네. 


아니, 학교 안 가면 이렇게도 좋은 걸 중 고등학교 때 뭘 그리 애쓰며 갔나 싶다. 하릴없이 빈둥대는 것도 해봐야 할 줄 아는 건데 늦게 배운 것치곤 잘 따라 하는 것 같아 내심 만족스럽다. 



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가 내게 있지만 습관처럼 책을 꺼내어 읽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피레네의 햇살이 비추기 시작한다.  


가난한 유학생의 창문에도 햇살은 똑같이 내리쬐는구나, 참 좋다···.


삔둥삔둥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지겨워지면 집 주변을 슬슬 걷거나 그러다가 집에 돌아와 얼마 후 아내를 맞이한다.  



“어~ 여보, 왔어! 배고프지? 우리 밥 먹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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