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 2 | 새카만 양복, 뾰족한 귀, 새파란 눈
1
보석 코끼리 전람회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거의 통제가 안 될 정도였다. 입구에서 기다리는 줄도 한없이 늘어져 있었다. 정부에서는 태국 왕실의 보물을 사상 최초로 순회 공개한다는 것에 대한 예우로 경복궁 내에 특별전시실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관객이 끊임없이 몰려드는 바람에 그 줄이 빙글빙글 돌아 광화문 앞까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특히 초중고등학교에서 많이 단체로 관람을 하는 바람에 더욱 혼잡스러워졌다. 또한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정부서울청사역)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밀려 내려가고 올라오고 하는 탓에 그 근처는 지나다니기도 힘들었다.
이렇게 복잡한 광화문 근처에 갑자기 멋진 오토바이가 하나 등장했다. 최신형 빨간색 두카티. 거기에 검은 헬멧과 가죽 재킷을 입고 달려가는 모습은 모든 사람의 시선을 모으기 충분했다.
오토바이는 사직터널 쪽에서 달려와서 광화문 앞을 지나 삼청동 방면으로 돌아 경복궁 정문 앞으로 달려갔다. 고속, 과속으로. 그 순간 경찰차가 사이렌 소리를 내며 뒤쫓아간다. 그러나 곧 오토바이는 사람들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어느 골목으로 들어갔는지, 아니면 하늘로 솟았는지 알 수 없지만.
“와―! 지금 뭐가 지나간 거야?”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저렇게 달려도 돼?”
“청와대 앞길로도 가게 해주나?”
“북촌으로 들어간 것 같은데.”
“멋지다.”
“엄마, 나도 오토바이 하나…….”
“로또 되면 사줄게.”
“오토바이 사주면 로또 될 것 같은데.”
“오늘 코끼리한테서 보석 하나 빼오면 사줄게.”
“차라리 오토바이 포기할래.”
“나 같으면 빼오겠다.”
경복궁역 앞의 인파는 한밤중까지도 이어졌다. 태국대사관이 있는 한남동의 순천향대병원에서부터 경복궁까지 태국 전통행렬이 하루에 세 번 있었는데, 제일 마지막 행렬이 밤 9시에 광화문 바로 앞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리고 교통체증이 일어나도 사람들은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이 몰려들었다. 코끼리 행진은 오전에 한 번만 있고 오후와 저녁에는 각각 왕실 전통악기 행진과 코끼리 모형 갓등 행진이 있는데 이를 보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전시회 마지막 날 밤의 행사에는 태국의 왕위를 이을 황태자 부부가 직접 마차를 타고 화려한 기마대와 함께 행진하게 되어 있어서 벌써부터 서울 전체가 들썩이고 있었다.
2
서울시 경찰청에서는 편지 한 장을 놓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장난편지는 늘 있었지만, 이번 것은 범행계획이 아주 구체적으로 담긴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즉, 보석 코끼리 행사 마지막 날 보석을 탈취하겠다는 편지가 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내용이 아주 정교하고 구체적이어서 재미있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편지는 초등학교 학생이 보낸 것이라고 되어 있었다. 학교는 밝히지 않고 3학년 2반 학생들이 모두 함께 모의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편지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도 없었다.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꾸민 강도계획이라고 해놓고서 실은 다른 속셈이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경찰대를 졸업하고 경위가 되어 지구대와 지방 경찰서 수사부서에서 2년간 근무한 뒤 1년간 미국으로 국비유학을 다녀온 석진우 경위는 출근 첫날 이 편지를 받았다.
“사실 이런 이상한 제보는 늘 있는 겁니다. 미국 경찰에도 이런 것들이 날마다 들어온다고 하던데……. 미국에서 경험해 보지 않았습니까?”
“말은 들었지만 직접 관여하지는 않아서…….”
“어떻든 일단 편지가 왔으니 조사는 해봐야겠죠.”
“혹시 보석 코끼리 경비팀에도 확인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쪽에도 이런 제보가 들어왔는지.”
“좋은 생각입니다. 그 팀에게 알아봐 주시죠.”
“연락해 보겠습니다.”
큰 행사가 진행되면 늘 각종 제보가 잇따른다. 대부분 가치 없는 것들이지만, 때로는 귀중한 단서가 되어 사고를 방지하게 해줄 때도 있다.
석 경위는 보석 코끼리 전람회에 대한 모든 자료를 모아서 세밀히 살폈다. 코끼리 숫자와 크기, 보석의 종류와 개수, 보석들의 대략적인 가격, 도난보험 및 보험회사의 재보험, 경찰경비 인력과 경비업체 현황, 보안장치의 종류와 성능 등등. 그 다음 교육부에 연락해서 각급 학교의 단체관람 현황에 대해서도 알아보라고 한 직원에게 지시했다.
장난편지이긴 하겠지만, 일단 서류상으로라도 그에 대해 대처했다는 기록만은 남겨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혹 수상한 정보들도 알게 될 수 있어서, 만일의 경우 발생할지도 모를 보석도난에 대해 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인터넷으로 그 전람회에 대한 모든 내용을 확인했다. 언론에서 다룬 기사들까지.
석 경위는 주변 사람들에게는 별일 아닐 것이라 말은 하면서도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그 박람회에 대한 자료를 모았다.
그러자 그날 오후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그 박람회에 나온 작품의 보험금에 대한 것이다. 즉 파손에 대한 보험은 있지만 도난에 대비한 보험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는 점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보험과 재보험 상황까지 상세히 알려준다. 그러나 코끼리 보석의 도난에 대해서는 보험금은 얼마인지, 보험회사는 어디인지, 보험의 범위는 어떠한지 등 모든 사실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점을 가지고 경찰에서 트집을 잡을 수는 없다. 게다가 이 점을 두고 일부에서는 전시된 작품의 보석이 가짜가 아니냐는 말도 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점은 경찰에서 관심을 둘 부분이 아닌 듯했다.
어떻든 전체적으로 볼 때 석 경위로서는 크게 신경을 쓸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가짜 제보편지야 늘 있는 일이니까.
그리고 그 박람회 마지막 날에는 관객과 전문가들이 꼽은 한 작품에 대해 경매가 붙여진다고 하니, 혹 그 행사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게 경계를 강화하면 될 것 같았다. 더군다나 그 행사 또한 석 경위가 직접 관여할 부분이 아니다. 경찰의 다른 부서에서 담당하고, 또한 태국 왕실에서 고용한 사설 경호업체까지 동원되는 모양이니 그쪽에서 알아서 잘 대처할 것이다.
석 경위는 출근 첫날 이것저것 잔잔한 일을 처리하고 가뿐한 마음으로 퇴근했다. 그리고 곧장 경복궁으로 가서 그 인근에 파견 나와 있는 경찰에게 갔다. 마침 그곳의 책임자로 있는 정민구 경위가 친구이기도 해서 만나보려 한 것이다.
“오, 어서 와. 수재 경위님이 납셨군. 귀국했다는 말 들었어. 잘 갔다 왔나? 많이 배웠어?”
“배우긴 배웠지. 이론으로만. 그런데 여기는 어때? 별일 없지?”
“우리가 할 일이 별로 없어. 이곳은 경비업체가 잘 맡고 있으니까.”
“전람회는 구경 좀 했나?”
“구경은 했지만, 우리 일은 경비니까. 여기 전체를 하루에 몇 번씩 돌아.”
“별일 없지?”
“없어야지. 별일 있으면 큰일 나는 거잖아. 한번 들어가 볼래?”
“그럴까…….”
“아, 그런데 편지가 왔다며? 초등학생 강도 편지.”
“누가 장난친 거지.”
“그래, 그런 투서야 늘 있는 거니까…….”
“그래도 보석강도를 미리 알리지는 않잖아. 추리소설이나 영화도 아니고. 그런데 왜 미리 알린 것일까? 배신자인가? 아니면 배후에 다른 수작이 있는 건가……?”
“아무튼 조심해. 요즘 애들 보통 아니야.”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미소 지었다.
“저기 보이는 여경 있지? 거기 가서 말해. 그럼 안내해 줄 거야.”
“OK.”
“영어 잘하네.”
석 경위는 미소 지으며 돌아섰다.
3
석 경위는 전시실 안을 구석구석 둘러보고 보안장치들도 모두 확인했다. 그런 다음 보안 책임자와 만나서 대화도 나누었다. 아직까지는 특별한 이상이 없다고 한다. 모든 것이 정상이다. 당연하지. 이상이 있으면 큰일 난다. 외교문제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일이다. 국제적으로 망신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석 경위는 전시실 안의 홀이 아주 독특한 것에 큰 감명을 받았다. 언론 기사나 TV, 팸플릿 등을 통해 홀의 광경을 어느 정도 확인을 했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상상 이상이었다. 전시실이라기보다는 화려한 파티장과 같았던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태국 왕궁 내부를 연상케 하는 디자인이었지만, 그 중간중간에 여러 테마를 정해 놓고 그에 어울리는 디자인으로 꾸며놓아 마치 아주 호화로운 쇼나 파티에 초대받아 온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아래쪽은 좁다란 사각기둥에서 시작해서 올라갈수록 점점 넓어지다가 마지막에는 커다란 역피라미드처럼 디자인하고 그 아래에서 보랏빛 조명을 위로 비추어 신비로운 고대의 성에 들어온 것처럼 꾸며놓기도 했으며, 바닥과 천장을 온통 푸른색으로 디자인한 뒤 중앙에 푸른빛이 도는 무대를 마련해 놓고는 태국의 유명 밴드가 그 위에 올라가서 태국의 최신 대중음악을 연주하는 곳도 있었다. 또한 태국 전통문양과 분홍 계통의 색으로 꾸며진 무대에서는 태국 전통무용이 끊임없이 공연되고 있었다. 그밖에도 곳곳에서 태국을 알리는 여러 행사가 펼쳐지고 있었으며, 환상적인 느낌이 드는 연못을 만들어놓고 그 한가운데에 섬처럼 전시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연못 주위에 네 군데의 통로를 만들어서 그곳을 통해 섬으로 들어가 유리상자 안에 들어 있는 보석 코끼리들을 감상할 수 있게 해놓은 것이다.
코끼리들은 여러 크기가 있었는데 그중 한가운데 있는 제일 작은 아기 코끼리가 가장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 코끼리에는 다른 보석은 없이 이마 한가운데에 커다란 보석, 짙푸른 사파이어만 하나 박혀 있었다. 엄청 큰 사파이어. 이 보석은 9월의 탄생석으로 알려져 있으며, 다이아몬드 다음으로 강하다. 따라서 사파이어와 함께 다른 보석을 섞어놓으면 기타 보석들이 흠집이 나기 쉽다. 예로부터 남보석이나 청보석이라고 했으나, 일본에서는 청옥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지혜, 자애, 성실, 덕망을 뜻하며 핑크색이나 노란색, 녹색, 흰색의 사파이어도 있다고 하며, 붉은색은 루비로 부른다.
그 아기 코끼리에 박힌 사파이어는 200캐럿짜리라고 하는데, 그 정도 크기의 보석은 가격은 정해지지 않고 있다. 참고로 현재 10캐럿이면 대략 50만 달러, 즉 5억 원 조금 넘는다. 그리고 보석은 클수록 가격이 급증하기 때문에 코끼리 사파이어는 최저 2천만 달러, 즉 200억 원 이상 나갈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참고로 2012년 스리랑카 보석박람회에서 17kg짜리, 즉 8만5천 캐럿이나 되는 사파이어가 공개되기도 했는데 당시 가격으로 8억 달러, 즉 9천억 원에 해당됐다고 한다. 지금은 가격이 얼마 정도일지 가늠이 되지도 않고.
아기 코끼리 사파이어의 이름은 블루스타(Blue Star, BS). 여자들이 검지를 구부려서 손가락 끝을 엄지의 첫 관절 안쪽 주름에 대면 충분히 감쌀 수 있는 정도이다. 참고로 보석의 1캐럿(carat, CT)은 0.2g(200mg)이며, 금의 1캐럿(karat, KT)은 1.296g이다. 한국에서 사용하는 금 1돈은 3.75g.
이 아기 코끼리의 사파이어를 암시장에서 판매한다면 100억 원 정도 할 것이라고 말들을 한다. 40g짜리 조약돌 크기의 푸른색 투명한 돌덩이 하나가.
그런데 만일 이 BS가 도난당한다면 어떻게 될까? 게다가 제보 편지에서처럼 초등학교 강도 아이들이 훔쳐간다면? 이 이야기는 웃기게 들리기도 하지만,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사람들은 오히려 통쾌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국의 어린이들이 세계적인 영웅이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차라리 도와줘?
석 경위는 피식 웃었다.
석 경위가 전람회장을 한 바퀴 돈 뒤 밖으로 나가자 정민구 경위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온다.
“어때? 볼 만해?”
“보석보다 다른 퍼포먼스들이 더 멋지던데.”
“동감이야.”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웃었다.
“그런데 자네한테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 같이 가세.”
정민구 경위는 석 경위를 데리고 박람회 본부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태국과 한국의 책임자를 모두 만나서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자 태국의 보안 책임자가 말을 건넨다. 영어로.
“제 이름은 온마 친나왓인데, 그냥 편하게 은마로 불러도 됩니다. 한국의 한 아파트 이름이라고 하던데요.”
온마는 웃음기 가득한 모습으로 말한다.
“이 친구가 우리 경찰의 에이스 중 에이스입니다. 국비로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지요. 그런데 이 친구한테 놀라운 제보가 들어왔답니다. 한국의 초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BS를 훔치겠다고 통보했답니다.”
그 말에 모두들 웃었다. 배꼽을 잡고. 은마는 통역을 통해 그 말을 듣고는 눈물을 흘릴 정도로 웃었다.
은마가 석 경위에게 영어로 직접 물었다.
“어느 학교입니까?”
“그것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어떻든 우리는 단단히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이 말을 하고 은마는 또다시 숨넘어갈 정도로 웃었다. 나중에는 태국 직원이 옆에서 부축을 해주어야 할 정도였다. 그 바람에 주위에 있는 사람들 역시 모두가 또다시 함께 웃었다.
은마가 정신없이 웃고 나서 석 경위를 보고 말했다.
“이거 너무 무서워서 몸이 다 떨립니다.”
은마는 몸을 부르르 떠는 흉내를 냈다.
“저희들이 석 경위님에게 정식으로 요청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행사 마지막 날 그 보석을 경매할 텐데, 그때 경비 책임자로 와주시겠습니까?”
석 경위는 당황스러웠다.
“아, 그것은 저희 정부나 경찰청에 정식으로 요청해야 할 겁니다. 저는 이 행사와 전혀 관계가 없는 입장이라서…….”
“물론입니다. 그 부분은 저희 쪽에서 처리하겠습니다.”
석 경위는 은마와 악수를 나누고 돌아섰다. 그때 뒤에서 또다시 은마가 말을 했다.
“그 꼬마 강도들도 그날 입장을 시켜서 솜씨를 보고 싶은데요.”
석 경위는 뒤를 돌아보고 미소 지어 주었다. 그러고 보니 그날 아이들은 참관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마지막 날은 오전까지만 문을 열고 모든 관람객을 내보낸 뒤에 경매 관리자들과 사전에 경매 참여를 신청한 사람이나 업체, 언론 관계자 등만 참여하게 되는 모양이다. 이 경매에는 대형 사파이어가 등장하기 때문에 전 세계에서 큰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태국 왕실의 중요인물도 참석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 인물이 아직 특정되지는 않았는데, 소문에 의하면 태국 국왕의 막내딸이라고도 한다. 그 막내딸 공주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는데 특히 보석수집에 관심이 많고 그 사파이어에 대한 애정도 커서 경매를 반대했었기에, 자신의 아쉬운 마음을 담아서 그날 사파이어와 작별하는 순서도 가질 것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런 일이야 어떻든 석 경위는 묘한 감정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갔다. 집이라야 좁아터진 오피스텔이지만. 물론 혼자 사는 데야 문제없지만 이러한 생활이 벌써 10년이 넘는다. 중학생 때부터 친척 집을 전전하며 골방에서 살았으니까. 그런 중에도 다른 데 신경 쓰지 않고 오직 공부에만 매달려 중고등학교와 경찰대학을 모두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석 경위가 샤워를 하고 저녁식사를 마치자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들여다보자 외사촌 여동생 현희였다. 좀 쉬고 싶어서 안 받으려다 하다가 잠시 망설인 뒤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귀국했다는 소리 들었어. 피곤하지 않아?”
전화 너머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음식점 같기도 하고 바 같기도 하고. 현희는 교육대학을 나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일을 하고 있다. 친척이긴 하지만 그리 왕래는 자주 하지 않아서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다. 하지만 서로 가끔 연락을 해서 다른 사촌들보다는 가까운 편이다.
“괜찮아. 그동안 별 일 없었지? 뭐 하고 지내?”
“늘 애들하고 싸우는 거지 뭐. 지루해. 참, 본청으로 가게 되었다고 들었어. 축하해.”
“뭘……. 어르신들 잘 계시고?”
“그럼. 다 괜찮아. 이제 오빠는 결혼만 하면 되겠네? 신부감은 있어?”
“아직 없네요. 그런데 지금 어디야? 주변이 시끄러운 것 같은데.”
“응, 실은 지금 학교 선생님들이랑 회식하고 있어. 참, 한 사람 소개해 줄까? 같은 학교 선생님인데, 정말 괜찮아.”
“내가 아직 능력이 안 되는데…….”
“엄살은…….”
“나보다는 네가 더 급하잖아. 좋은 사람 있는 거니?”
“나는 걱정 마세요. 늘 줄 서 있으니까…….”
“실력 좋구나.”
몇 마디 더 오간 뒤 통화는 끝났다. 석 경위는 자기가 먼저 전화를 걸어야 하는 건데 하고 생각했다. 현희 아버지인 외삼촌에게 약간 신세를 진 일도 있어서 인사를 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석 경위는 자잘한 걱정거리들을 마음속에 안고 밖으로 나갔다. 밤공기도 쐬고 혼남의 고독도 즐기며 거리를 걷기 위해서였다. 평소 술은 거의 하지 않고 떠들썩한 것도 좋아하지 않아 딱히 갈 만한 곳은 없었다. 그래서 주로 혼자 걷는 편이었다.
그러나 오늘 밤 석 경위는 어쩐지 번잡함이나 번화한 곳을 찾고 싶은 마음이 은근히 들었다. 오피스텔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대형 쇼핑몰이 나온다. 그리고 그 주변은 크고 작은 빌딩이 둘러싸고 있으면서 온갖 상점이 다 들어서 있다. 밤늦게까지 휘황한 그곳.
그런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그곳에 가면 무엇을 해야 할까? 약간의 호기심, 그리고 아주 살짝 두려움 같은 것도 가지고 석 경위는 터벅터벅 그곳, 밝은 곳, 휘황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번화한 곳 가까이 다가가다가 석 경위는 우뚝 멈춰섰다. 현희가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다른 여자. 아마 같은 학교 교사인 모양이다. 그리고 그 주변에 여러 사람들. 모두가 왁자하며 서로 떠들고 웃고 한다. 석 경위는 얼른 사람들 틈으로 들어갔다.
현희의 동료들이 흩어진다. 손을 흔들고, 뭐라고 소리도 치고 하면서. 그리고는 둘씩 셋씩 짝을 지어 어디론가 향한다. 혼자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사람도 있고. 그런데 현희와 그 옆의 여자가 석 경위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다. 무척 다정한 모습으로.
석 경위는 근처에 있는 미국 브랜드 옷가게로 얼른 들어갔다. 그리고는 옷을 고르는 척하면서 창밖을 살폈다. 두 여자가 옷가게 앞으로 지나간다. 무엇이 재미있는지 웃어가면서. 석 경위는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얼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약간 거리를 두고 뒤쫓으려 할 때였다. 길 건너편 차선에서 새빨간색 오토바이 한 대가 천천히 달려간다. 속도를 아주 느리게 내면서. 마치 사람 걷는 속도처럼. 인파 속에서 사람들에게 조심하듯이. 그러다가 속도가 줄이고 아예 오토바이를 멈춰 세우고서 한 발을 내려 바닥을 짚는 것이었다. 검은 헬멧과 검은 가죽 재킷을 입은 모습. 어쩌면 석 경위가 경찰이기에 그 모습이 눈에 띄었을 것이다.
석 경위는 멈칫하고서 오토바이와 두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에 두 사람은 인파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그러자 오토바이가 약간 속도를 낸다. 석 경위는 오토바이를 흘끔흘끔 쳐다보면서 성큼성큼 걸었다. 조금 걸어가자 지하철 입구가 나온다. 그 앞에 두 여자가 서 있었다. 둘이서 한참 이야기를 나눈다. 먼길 떠나는 이와 석별의 정이라도 나누는 모습 같았다. 그러더니 이윽고 두 사람은 서로 손을 흔들면서 현희는 지하철 계단으로 내려가고, 또 한 친구는 도로 쪽으로 돌아서더니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는 듯하다. 그러면서 길을 두리번거린다. 택시라도 잡으려는 것일까? 이곳에서 택시 잡기 쉽지 않을 텐데. 혹 택시 앱으로 부른 것인가……?
여자가 시계를 자꾸 들여다보며 차들이 오는 방향을 계속 살펴보는 것으로 보아 택시 앱을 사용한 것이 맞는 듯했다. 하지만 찻길이 많이 혼잡해서 택시가 제대로 올는지 모르겠다.
석 경위는 사람들 틈에서 머뭇거리다가 길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오토바이 남자는 멈춰서 있었다. 한 발을 보도블럭에 내린 채. 그리고 얼핏 보아도 현희 친구 쪽으로 고개를 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녀석이 뭘 하려는 거지?
석 경위는 일단 바로 옆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리를 찾는 척하면서 밖을 내다보았다. 현희의 친구와 오토바이를 번갈아.
그 순간 그 친구가 손을 드는 것이 보였다. 그러더니 빈 차 표시등이 켜진 택시가 스르르 다가가서 선다. 차들이 혼잡한데도 그녀는 용케 택시를 알아본 모양이다. 여자가 차에 타고 택시가 떠나는 순간 석 경위는 오토바이를 돌아다보았다. 그러자 오토바이도 서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저놈 뭐야?
석 경위는 밖으로 뛰어나가면서 핸드폰을 꺼냈다. 현희에게 전화하려고. 석 경위는 핸드폰 화면을 켰다. 그러나 거리에 나온 다음에는 버튼을 누르는 대신 차도 쪽으로 뛰어갔다. 짐을 싣지 않은 포터 트럭이 막 다가오고 있었다. 석 경위는 차도로 나가서 앞을 가로막으며 양손을 들어 흔들었다.
요란한 클랙슨 소리. 사람들이 쳐다본다.
석 경위는 차를 멈춰세우고 앞문을 열면서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와 동시에 앞자리에 올라타면서 외치듯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저 앞에 가는 오토바이 뒤쫓아가 주세요!”
운전사는 멍한 눈으로 신분증과 석 경위 얼굴을 번갈아 쳐다본다.
“빨리!”
운전사는 약간 당황해하는 것 같다가 곧 차를 출발시킨다. 그리고 차선을 바꿔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속도를 올렸다.
석 경위는 112 번호를 누르고 나서는 멈칫하고서 잠시 앞만 바라보았다. 저 앞에서 오토바이가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택시는 보이지 않았다.
석 경위는 통화버튼을 누르지 않고 그냥 전화를 끄면서, 그 대신 안전벨트를 잡아당겨 맸다.
“저 오토바이 따라잡지는 말고 그냥 쫓아가기만 하세요.”
트럭 운전사는 꽤 노련했다. 마치 이런 경험이 여러 번 있는 듯이. 그리고 석 경위에게 무엇을 물어보거나 멈칫거리지도 않고 오토바이를 잘만 쫓아가는 것이었다.
4
오토바이가 멈춰선 곳은 한 아파트 단지 조금 못 미처에서였다. 그 앞쪽의 저 멀리에서 택시 문이 열리고 사람이 나오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석 경위는 트럭에게 멈춰서라고 하고는 지갑에서 5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꺼내어 내밀었다. 운전사가 눈을 껌벅거리며 쳐다보기만 한다.
“받으세요. 수고하셨습니다.”
트럭 운전사가 돈과 석 경위 얼굴을 한번 더 번갈아 쳐다보다가 돈을 받는다.
석 경위는 곧바로 문을 열고 트럭에서 내렸다. 그리고 손을 들어서 유리창 너머로 트럭에게 어서 가라는 표시를 했다. 그러자 트럭이 천천히 움직인다.
석 경위는 오토바이 쪽으로 걸어갔다. 검은 헬멧은 오토바이를 아파트 단지 정문 조금 못 미친 곳에 세우고 한 발을 내리고서 앞쪽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석 경위는 오토바이가 세워진 곳으로 가지 않고 길을 건너서 상가건물의 제과점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곁눈으로 살펴보니 오토바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석 경위는 빵을 몇 개 산 뒤 계산하고서 밖으로 나갔다. 그때까지도 오토바이는 그대로 서 있었다.
석 경위는 오토바이를 지나 아파트 정문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옆 눈으로 슬쩍 살펴보며 오토바이 번호를 확인했다. 아파트 단지 안에는 여러 사람이 오갔지만 현희 친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석 경위는 대충 주변을 살펴보고 나서 핸드폰으로 본청에 연락했다. 야근 담당자가 전화를 받는다. 석 경위는 오토바이 번호를 알려주고서 확인해 달라고 했다. 그런 다음 아파트 한 동을 지나 그 뒤를 돌아서 다시 정문 쪽으로 향했다. 그 순간 오토바이 한 대가 정문 앞으로 달려서 지나간다. 아까 본 그 오토바이가 맞았다.
석 경위는 뛰다시피 아파트 밖으로 나가서 멀어져 가는 오토바이를 쳐다보았다. 오토바이는 벌써 저 앞으로 달려가서 곧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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