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발전에는 늘 어떤 전환점이 있게 마련이다. 수십, 수백, 수천, 수만 년 동안 정체되어 있던 시기에 홀연히 한 인물이 등장한다. 전쟁이든 문화든 산업이든 지식이든 종교든 그 밖에 어떠한 분야에서든 특출난 한 인물이 역사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역사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에서 느닷없이 등장하는 다음의 문장.
인간의 시야는 어느 정도일까? 눈의 시력은?
시력검사를 할 때 최대는 2.0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은 이것이 최대 시력은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따질 때 인간의 최대 시력은 2.5 정도가 된다고 한다.
시력은 눈의 추상세포 밀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한다. 인간의 추상세포는 제곱 밀리리터 당 평균 20만 개, 즉 20만/mm2. 그러나 최대는 30만 개 이상 된다나 보다. 여기에 더해서 시력은 최대 6.0까지 가능한 모양인데, 이는 뇌의 보정능력 때문이란다. 시력을 측정할 때는 대비감도, 심시력(深視力), 동체시력, 야간시력, 순간시력, 주변시력 등을 모두 포함시켜야 한다는데 여기에서는 그저 간단하게 일반적(?)인 시력만 언급하기로 한다. (어려운 용어는 그냥 통과하는 게 상책.)
위에서 인간의 최대 시력은 2.5 정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인간사회의 모든 분야에서도 그렇듯 여기에서도 예외적인 현상이 나타난다. 즉 몽고와 같은 너른 평원에서 사는 유목민의 경우 아주 멀리까지 세밀히 살펴야 하기 때문에 시력이 최대 3.0까지 나올 수 있다고 한다. 이밖에 아주아주 특별한 경우로서 일부 어부들은 시력이 6.0까지 되기도 한다는데, 이것을 일반화할 수는 없다.
반면에 도시인들은 대체로 시력이 좋지 않은 것 같으며, 아무리 좋다고 해도 1.5 이상이 되기는 힘든 모양이다. 또한 시력은 유전적인 면도 큰 것 같아서 한 집안 식구 모두가 안경을 쓰는 경우도 많다.
멀리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언덕 위로 올라갈까? 서울 남산타워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본다면 어디까지 가능할까?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나 무역센터, 파리의 에펠탑에 올라가서 본다면? 그러나 아무리 하늘 높이 올라가서 본다고 해도 지구 지름 너머까지는 볼 수 없을 테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구 반대편, 아니 그 너머까지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떻게?
달에까지 간 미국과 러시아, 중국의 우주인들. 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먼 곳까지 간 사람들이다. 그들이 본 우주는 지구인 중 어느 누가 본 것보다 더 화려하고 장엄했으리라. 우리는 간혹 우주 저 멀리 있는 천체들의 상상도를 보게 된다. 또한 천체망원경이나 우주선에 탑재된 망원경으로 찍은 사진들도 본다. 그 얼마나 황홀한 광경이더냐. 게다가 화가들이 그린 우주 상상도는 또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벅차게 해주는가.
이에 더해 영화에서 등장하는 우주 화면은 또한 얼마나 환상적이더냐. 이렇듯 우주의 지평선 저 너머의 장엄한 환상들은 인간의 상상력을 무한대로 이끌어준다.
바로 이러한 환상의 상상력을 가능케 해준 이들이 있다.
위에서는 우주에 대한 면에만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인류 역사 곳곳에는 그 시대시대를 뛰어넘게 해준 위인들이 있었다. 이들이 등장할 때마다 인류는 엄청난 도약을 하게 된다. 이러한 인물들이 없었다면 인류의 발전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최초의 인류가 이 땅에 존재하게 되었을 때 이후로 조금도 진보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화려한 뿔로 위엄을 갖춘 수사슴이 아무리 엄청나게 보여도 그들이 수레바퀴나 망원경을 발명하겠는가?
인류의 역사에 순간순간 나타난 사상가, 이론가, 종교가, 정치가, 과학자, 문학가, 발명가, 탐험가 등등이 없이 현재 우리가 누리는 번영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인류는 그 거장들의 어깨 위에서 더 멀리 보고, 더 많이 얻고, 더 높이 올랐으며, 더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인류가 그 거장들에게 빚을 진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보는 크고 작은 도구, 지식, 지혜. 이들은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처음에 누가 가장 먼저 만든 것일까? 삼색털 고양이가 나무젓가락을 만들고, 점박이 무당벌레는 수레바퀴를 발명하고, 우아한 꽃사슴은 꽃무늬 양산을 생산해서 한라산, 지리산, 에베레스트를 평화의 동산으로 꾸민 걸까?
혹 우리들은 인류의 발전을 말할 때 위대한 발명가나 학자 등만 떠올릴지도 모른다. 사실 그것이 맞기는 하다. 그러나 이는 반만 맞는 말이다. 왜냐? 인류의 위인들이 위대한 업적을 이룰 때, 그 근간은 무엇이었을까? 예를 들어 아인시타인이 상대성이론을 탄생시킬 때 그 지식이나 아이디어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걸까? 물론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나 다 안다. 그 지식이 나오기까지 선행된 수많은 이론과 실험과 실패가 있었고, 그를 발판으로 해서 위대한 업적이 탄생하는 것이니까.
그러한데도 인류의 역사에서 문득문득 거장들이 나타나서 시대를 바꾸고 의식과 개념을 새로이 세우며, 인간세상은 물론 우리 주변의 모든 사물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해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어깨를 인류에게 빌려주어 그 어깨 위에서 더 멀리, 더 높이, 더 넓게 바라보고 느끼고 알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들에게 많은 빚을 진 것은 사실이다. 자동차를 발명한 분들은 그 이전에 엔진의 원리를 발견한 이들에게 빚을 진 것이고, 또 그분은 그 원리의 아이디어를 떠올린 이에게 빚을 졌으며, 그분 역시 앞선 세대의 어느 분이 제시한 깜짝 발상에 빚을 졌고, 그분 또한 그러한 사고를 할 수 있게 환경을 만들어준 성명불상의 모(?)씨에게 빚을 졌으며, 이분 역시 그러한 발상력을 준 부모나 주변인들에게 빚을 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위대한 발명가나 사상가들의 업적이 퇴색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인류는 역사의 순간순간마다 어디에선가 나타난 민초 위인들에 의해 수많은 결실을 맺어왔다. 가느다란 바늘 하나에서부터 태양계를 벗어나서 저 멀리 우주 공간으로 들어간 보이저 우주선에 이르기까지 모든 발명발견 그 기저에는 아주아주 소소한 생활의 지혜와 지식들이 기초를 이루고 모아지고 전승된 수많은 민초들의 삶이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서로서로에게 빚을 졌으며, 동시에 서로서로에게 유익을 베풀었고, 그로 인해 이 세상은 아직도 살아 볼 가치가 있는 곳이 되었다. 그러한데도 아주아주 쬐끄맣고도 볼썽사나운 행성 지구에는 태초의 인류 이후 지금까지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토록) 서로를 경멸하며 비하하고 학대하면서 자신들의 존재를 나타내려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
대한민국은 최근에 큰 업적을 이루었다. 어느 한 생명체, 즉 한 문학지성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이다. 이는 한 개인이나 국가의 영예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 축복이 되는 일이다. 물론 이밖에 많은 분들이 인류 발전에 기여했지만, 그러함에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문학가 못지않게 우리 역시 함께 그 영예를 누려야 하지 않을까. (혹 이 영예에 참여하지 않으려 하는 분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 가련한(?) 분들에게 손을 내밀고 함께 축제의 장으로 나아가야 하겠다. 오히려 그분들을 불쌍하게 여겨주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