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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Oct 20. 2024

어느 사피엔스의 고독

- 그녀 전혜린을 추억하며

 

    향년 31세…….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어느 겨울 아침의 마지막 햇살……. 전혜린…….


내 기억 속의 어느 해 가을, 나는 뮌헨의 거리를 걸었다. 인파 많은 광장을 벗어나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덩치 큰 독일인(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남자 몇몇이 알아듣기 힘든 말로 대화를 나누며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독일에는 네 번 갔다. 앞선 세 번에는 도시 여기저기 살펴보고 구경 다니는 데 바빴으나, 네 번째 때는 일부러 느릿느릿 걸으며 유럽의 가을 정취를 맛보려 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정취’는 사라지고 ‘우울’만 머릿속을 채우는 것이었다.

    뮌헨의 가을 저녁은 정말 우울하다. 특히 골목길은. 오고 가는 사람들은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끝도 없이 늘어놓으며 내 옆을 지나쳐 갔다. 그러나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내가 그네들 말도 알아듣지 못하지만, 저들도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할 테니 피차간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 저녁 한 브로이호프 맥주집에서 나온 뒤 나는 그렇게 저렇게 계속 걷기만 했다. 맥주집에서 나왔다고 하니 커다란 맥주잔을 거하게 들이키고 나온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술을 한 잔도 못 한다. 한 모금도. 알코올 기가 조금이라도 뱃속에 들어가면 난리가 난다. 얼굴은 물론 목덜미까지 새빨갛다 못해 짙은 보랏빛으로 변하고, 뱃속은 태풍을 만난 듯이 마구 요동치며 뒤집어지고 숨소리는 거칠어져서 헉헉거린다. 게다가 가장 힘든 것은 심장이 마구마구 날뛰는 일이다. 그러면 정신도 막 사나워진다. 그리고는 급기야 토할 곳을 찾게 된단 말이다. 전문가에게 진단받은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내 몸 속에는 알코올 분해요소가 (거의) 없는 듯하다. 그 순하다는 막걸리나 포도주도 역하고 쓰기만 할 뿐이며, 술냄새를 맡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며 기분이 나빠진다.  


각설하고…….


전혜린의 글을 읽다 보면 무척 힘들어진다. 마음뿐만 아니라 몸까지도. 심지어 영혼까지도. 그의 글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살아온 것, 그의 고독과 무의미한 죽음이 마치 나에게도 밀려 들어올 것 같은 느낌.

 


니체를 생각하면 고독이 떠오른다. 저녁 땅거미가 질 즈음 니체의 글을 모두 묶은 이따만 한 책을 옆구리에 끼고 낙엽 가득한 공원의 한 벤치에 앉아 있으면 고독을 즐기는 것이 될까?


    전혜린    

    1934년 1월 1일 출생

    1965년 1월 10일 사망

   

전혜린은 경기여고를 나와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으나 갑자기 독일로 유학을 떠나 독문학을 전공했다. 유학시절에 만난 법학도 출신 김철수와 결혼한 뒤 귀국해서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그리고는 세상을 떠났지. 겨울의 어느 날 아침에 그가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아침의 죽음


유럽의 가을은 유난히 고독하다. 어쩌면 낙엽 때문에 그런지도 모른다. 건조한 날씨 때문에 새빨갛게 물든 잎들이 땅에 떨어지고, 그 갈잎들을 밟을 때마다 바삭바삭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을의 시인들이 생각나는 것이다. 특히 고독을 업으로 삼았던(?) 이들…….

    ‘몹시 괴롭거든 일요일 아침에 죽어버리자…….’

    그는, 전혜린은 이렇게 썼다. 그리고 정말로 그는 어느 일요일 아침에 눈을 뜨지 않았다. 지구에 내려온 지 31년 만에 그의 삶이 그렇게 마감된 것이다. 그는 지구를 떠나기 전에 여러 권의 책을 남겼다. 수필집과 번역서 등을. 그중 대표적인 책 두 권을 꼽는다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가 되겠다. 그 뒤 이 두 권은 하나로 합쳐져 1994년 목마른 계절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여기에서 잠깐 샛길로 샌다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명작 추리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연상된다. 외딴 무인도의 한 저택에 초대된 10명의 저명인사들. 그들은 하나하나 살해되며 나중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 전혜린이 자신의 삶에서 자기 자신을 지워버리듯이.

    그리고…….  

    영원한 잠. 무엇일까?

    우선 영원에 대해 알아봐야겠다. 사전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영원 | 어떤 상태가 한없이 이어지는 것. 영어로 하면 eternity, immotality, permanence. . .


그런데 이러한 사전적 설명은 어딘지 허전한 느낌이 든다. 허전하다……. 그러니까 양이 차지 않는다는 뜻이겠다. 그냥 ‘한없이’ 이어지는 것일까? 그게 끝인가? 아니다. 아무런 의미 없이 한없이 한없이 이어지기만 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존재한다는 것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위의 단어 풀이에서도 나온 것처럼 한없이 이어지려면 그 어떤 존재와 의미가 전제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지금 10월말의 감상적인 마음에서 어딘지 소외된 느낌이 드는 11월의 고독을 미리 짚어보려 하는 것이다.  



전혜린은 번역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의 타고난 문장력과 매끈한 번역, 그리고 글의 유려함 덕에 당시에 그의 번역본은 독자들에게는 최상의 선물이 되었다. 그는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으나, 어느 날 갑자기 독일로 유학을 떠나서 독문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독일 유학 때 역시 한국에서 유학온 법대생과 결혼했다.

    전혜린의 번역본 중 가장 인상적인 것으로는 (독자들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Von Yalu biszur Isar)와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 떠오른다. 물론 이 작품 말고도 여럿을 손꼽을 수 있겠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서나 안네 프랑크의 한 소녀의 걸어온 길 등은 당시 젊은이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한 명작이며 명번역이었다.

    여기에서 그의 이력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전혜린의 이력서를 쓰는 게 아니니까. 다만 1965년 1월 11일 새벽의 시간으로 독자들을 안내하고 싶을 뿐이다. 31세를 막 지나고 열흘째 되던 날 아침, 그는 눈을 뜨지 않은 것이다. 겨울 한복판, 하늘은 얼음장처럼 차갑고도 어쩌면 보석처럼 빛나는 새벽이었으리라. 그가 숨을 거둔 시각은. 그리고 사인은 수면제 과다복용. 어쩌면 그 전 해에 이혼한 이후 극심한 고독에 시달린 것이 원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죽음은……, 아, 죽음은 무엇인가? 정말 무엇이란 말인가?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


그가 죽은 뒤에 남긴 일기는 1968년에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 책을 거부(?)하고 있다. 반세기 전에 나온 책에 대해 ‘거부한다’는 말이 생뚱맞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름대로 내게는 이유가 있다. ‘또다시’라는 단어 때문이다. 희망이라면 얼마든지 ‘또다시’ 반복되도 괜찮다. 하지만 ‘괴로움’이 ‘또다시’ 반복된다는 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혹 그 ‘이유는?’ 하고 물으실 분들도 있을 것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어떤 경우든 ‘그때’의 괴로움을 ‘또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긴 어느 누가 괴로움이 반복되는 것을 반기랴마는, 나는 (이유를 밝힐 수는 없지만) 길고 긴 괴로움 속에서 상당한 시일을, 길고 긴 수십 년의 세월을, 즉 내 생애 대부분을 보냈다. 육신이 아니라 마음이, 그리고 영혼이. 게다가 그것은 지금까지도 아주아주 긴 그림자를 내게 남겨, 나는 아직도 문득문득 극심한 어두움 속에 빠지는 것이다.     



아, 바람이 분다. 며칠 전부터 불던 바람이 더욱 거세진다. 새벽녘 갑자기 창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서 잠이 깼다. 가을 태풍이라도 불어오는지 창틀까지 덜컹거린다. 그런데……, 문득 생각하니 지금 내가 잠을 깬 곳은 내 조국이 아니다. 멀고 먼, 지구 반대편의 어느 방구석.

    갑자기 눈물이 나려 한다. 내가 극심한 방황 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고, 지금도 그 옛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내 영혼 때문에……. (아, 그때 그 시절, 나는 왜 그리도 못났었던가……. 왜 그렇게 어둡고 어둡고 어둡게 보냈었던가……. 전혜린의 어두운 그림자가 길게 길게, 아주 길게 내게 드리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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