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서보면
네이름 있더구나
허공에
또렷하니
흐르는 그이름
먼하늘
수평선까지
이어지는 그이름
해송숲 돌아나가 황망히 펼쳐지는
모래톱 그너머로 검푸른 파도물결
해안가 밀려들어와 풀어놓은 옛기억
눈뜨고
바라보면
먼바다 저멀리로
눈감고
추억하면
그옛적 이름으로
아라이
가슴아리는
황혼녘의 사람아
준희는 옛적 그 해변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벌써 십수 년이 지났건만 해안가 해송 숲 너머에서 들려오던 그 파도 소리. 그리고 해안가 수직 절벽 아래로 펼쳐진 짧은 은빛 모래 해안에 찍어놓았던 발자국들. 마치 원시림을 막 벗어나 최초로 해안가에 도착한 우리 인류의 선조가 후세대에 남겨준 선물처럼 선명하게 나 있던 그 명백한 시그니처.
준희는 그 발자국 사진 한 장만 남겨놓고 모두 잘게 잘게 찢어서 그 해안의 허공으로 날려보냈다. 모든 추억이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던 그날의 기억을 담아서.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추억은 현실보다 더 우리를 현실 되게 하지 않는가.
그리하여 준희는 지금 옛적 기억이 담긴 그 해안가에 서서 바다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서해안 어느 해변의 쌍둥이섬.
태안반도 어느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조그만 섬 두 개가 나온다. 해안에서 저만치 떨어져 있어서 수영선수라면 쉽게 헤엄쳐 갈 수 있는 정도다. 쌍둥이처럼 비슷하게 생긴 두 섬이 20여 미터의 간격을 두고 나란히 바다에 떠 있는데, 여느 섬들과 달리 두 섬 모두 꼭대기가 평평할 뿐만 아니라 혹 누군가가 수고롭게 공사를 해놓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매끈하게 되어 있다. 잡풀과 조약돌만 여기저기 있을 뿐, 야생의 거친 면은 볼 수 없어서 약간만 다듬으면 축구장이나 테니스장으로 쉽게 만들 수 있을 듯할 느낌이다.
이렇듯 아담한 섬 모양과는 달리 섬 아래쪽은 크고 작은 바위들로 가득하고 게다가 섬 둘레는 거의 절벽 수준으로 수직에 가깝게 깎여 있어서 멀리서 보면 마치 둥근 통조림 두 개가 나란히 바다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 섬에 낡았지만 아담한 건물이 하나 지어져 있었다. 어느 대학의 기상관측소로 쓰이던 곳이었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사람들이 제법 다녀가며 활발히 연구활동을 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거의 찾아오지 않아 폐허로 변해 버리고 만 곳이다.
사람들이 별명으로 통조림 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지만, 예로부터 내려온 실제 이름은 섬뜩하게도 망나니섬이란다. 크기는 서로 엇비슷하지만 북쪽에 있는 것이 큰놈망나니, 아래쪽 것은 작은놈망나니. 아담하게 생긴 섬의 이름이 그렇게 험할 줄은 (근처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십여 년 전, 두 사람이 그 섬에 올라갔다. 남자와 여자. 그 섬은 입도금지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거의 드나들지 않고, 근처에서는 석양빛에 젖는 바다 수평선의 광경이 일품이라 여겨서 동네 사람들이 종종 바닷가에 나와 감상하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러한 무인도에 낯선 두 사람이 찾아간 것이다. 20대 남자와 여자. 마을 근처에서 나룻배를 빌려타고 갔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이 바로 이 섬이었다. 기상관측소 탐방기사를 쓰기 위해서 여러 잡지사 사람들과 함께 이곳에 왔다가 두 사람은 서로 마음이 통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주 짧은 만남을 가진 뒤, 어느 날 여자는 남미 대륙의 어느 나라로 가족이 모두 이민을 간다고 했다.
여자가 이민을 떠나기 바로 직전에 두 사람은 이 섬에 다시 와서 거의 말은 없이 걷기만 했었다. 저 멀리 바라다보이는 바다 끝쪽 그 너머로 눈길만 준 채 묵묵히.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여자는 떠나고 나서 1년쯤 지난 어느 날, 여자에게서 편지가 왔다. 마지막 인사라면서.
‘마 지 막’. . .
그 단어가 주는 무게감.
여자는 이민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그 대신 요양소에 들어가 있었다. 골육종과 복막암 그리고 비호지킨 림프종을 동시에 앓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세 가지 암을 동시에 지닌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데도 여자한테 그런 일이 발생했다. 물론 어느 한 암이 전이되어 그리되었을 테지만, 아무튼 그녀는 그렇게, 그렇게 떠나고 말았다.
차라리 남미로 이민을 떠나지. . .
그로부터 수많은 밤과 낮을 준희는 힘겹게 보냈다. 밤길을, 골목길을, 산길을 걷고 또 걷곤 했다. 영화도, 소설도, 드라마도 아니고 왜 이런 일이 여자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일어났는지 준희는 곱씹고 곱씹으며 걸었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그 이후 10여 년 동안 준희는 여러 번 그 섬에 가보려 했으나 그 근처까지만 가고서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었다. 마음이 감당할 수 없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곳에 가면 여자가 그 섬 가장자리에 서서 긴 머리칼이 바닷바람에 흩어진 채 밝은 모습으로 자신을 맞이할 것만 같았지만. . .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이번에는 준희가 이민을 가게 되었다. 실제 이민을. 여자가 간다고 했었던 남미는 아니지만 똑같은 남반구에 있는 섬대륙 호주로.
내일이면 준희는 대한민국을 떠나야 한다. 이제 떠나면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다. 아니다. 혹 돌아온다 해도 그녀와 걸었던 길은 절대 걷지 않으리라. 아니, 아니, 그녀와 만났던 그 섬에만은 절대로 가지 않으리.
그런데 준희는 저도 모르게 그 섬으로 오고 만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