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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Oct 04. 2024

엇나간 그림자

채린, 그녀. . .


채린은 대학에 들어가서 1학년을 마친 뒤 건강이 나빠져서 1년 휴학하고 나서 다시 평화봉사단으로 아프리카에 1년간 다녀왔다. 그리고 4학년 초에 또다시 건강 문제로 휴학하고 1년 쉰 다음 복학했다. 그리고 나서 대학을 마치고 곧장 대학원에 들어갔다.

    반면에 무진은 중학교 졸업 뒤 고등학교에 들어가지 않고서 독학으로 공부하여 검정고시를 통해서 남들보다 1년 빨리 대학에 들어갔다. 그 뒤 대학 2년을 마치고 군대부터 해결하려고 입대했다.

    무진이 군 2년 차에 휴가를 받아 집에 왔다가 다른 대학에 다니는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 무진이 대학 교내에 들어가 학생회관 쪽으로 걸어가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화면을 보니 만나기로 한 친구다.   

    무진은 버튼을 누르며 핸드폰을 귀에 갖다대고 말했다.

    “지금 다 와 간다.”

    “아, 그게 아니고……, 실은 좀 곤란한 일이 생겨서 나 거기 가지 못하게 됐다. 아까 전화하려 했는데…….”

    무진은 멍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저쪽에서 걸어오는 한 여자. 어딘지 밝게 빛나는 듯한 모습. 무엇엔가 들뜬 듯이 가벼운 발걸음. 발그레한 볼. 친구들하고 함께 수다를 떨며 타박타박 걸어오고 있었다.

    “나 말이야…….”

    무진의 귀로는 어떤 말이 흘러들고 있었지만, 그냥 귀로 흘러들어와 머릿속을 한 바퀴 돌며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여자들이 앞으로 다가왔다. 무진은 아무런 의식 없이 그냥 관성대로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들은 바로 코앞까지 와서는 옆으로 흘러들듯 지나쳐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진은 어떤 중력에 이끌리듯 자신도 모르게 몸을 돌려 뒤를 바라보고 말았다.



아…….

    바로 그 순간 그 여자가 뒤를 슬쩍 돌아다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여자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며 다시 수다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게다가 여자가 고개를 돌린 것은 사실 30도 정도? 아무리 크게 잡아도 45도는 넘지 않을 듯. 그렇지만 고개를 돌린 것만은 분명하다. 무진의 눈길과 어쩌면 5도만 어긋났을 뿐 서로의 눈길이 스치고 지나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5도……. 아니, 4도겠지. 어쩌면 3도인지도 모르고…….



그녀는 생일이 일러서 남들보다 1년 빨리 학교에 들어갔다는 말을 들은 듯한 느낌도 든다. 그야 어떻든 …….

    무진이 그녀를 만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딱 하루 그녀의 집에서 과외를 받았으니까. 그리고 나서……, 실은 그녀를 몇 번 더 보았다. 무진이 그녀의 아파트 근처의 그늘 속에서 서성거리다가 아마도 서너 번 그녀를 훔쳐보았던 것 같다. 무진의 집이 저 멀리 남쪽으로 이사한 뒤 검정고시를 준비하면서 간혹 서울에 올라가 여러 교재를 사오곤 했었는데, 그때마다 그녀의 아파트 근처를 서성거렸으니까. 그리고 운이 좋았는지 그때 몇 번 그녀를 보았었다. 저 먼발치에서였지만. 그것도 겨우 몇십 초 정도랄까. 아무리 길어도 1~2분은 넘지 않았을 것이다. 하긴 그것도 모두 합해 몇 번 되지 않는다. 무진이 서울에 올라올 기회가 얼마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것도 몇 년이 지난 뒤부터는 서울에 올라갈 일이 거의 없어 그러한 기회조차 만들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후 대학에 들어가고 해서 마음만 먹는다면 그곳에 또 찾아갈 수 있었지만 어느 순간 포기하기로 했었다. 일종의 체념 같은 것 때문에. 물론 그동안 혹 그녀의 집이 이사 갔을지도 모르지만. 어떻든 그리고 나서 오늘 처음으로 그녀를 본 것이다.



그녀는 얼굴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 옛 모습 그대로. 그리고 그녀는 너무 예뻤다. 너무도…….

    그런데 그녀가 무진을 알아본 것일까?

    그럴 리는 없다. 앳된 중학교 2학년 때와 달리 지금 청년이 되어 군복을 입고 군모를 푹 눌러쓴 모습인데. 게다가 무진의 외모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준수해서 그녀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을 리도 없다. 너무도 평범한 남자의 모습. 더군다나 군인이 아니던가. 군복을 입은 남자들의 모습은 모두들 아마도 거기서 거기일 것이다. 물론 무진 자체가 크게 눈에 띄는 외모도 아니지만.

    그런데도 그녀는 돌아다보았다. 무슨 뜻일까……?

    혹, 혹시라도 무진의 얼굴을 기억하는 것인가? 무진이 어둠의 그림자 속에서 자신을 훔쳐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까? 무진 자신만 모를 뿐 그녀는 눈치채고 있었던 것일까?

    이러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무진은 갑자기 가슴이 싸늘해지며 심장이 툭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차디찬 고드름 끝이 심장을 찌르는 듯한 통증. 그리고 그 순간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이었다. 추잡한 인간의 모습. 어둠 속에서 여자나 훔쳐보는 비열한 인간. 추잡한 짓을 하다가 들켜버린 변태.

    무진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반쯤 숙인 채 터벅터벅 걸어갔다. 마치 달 분화구 한복판을 걷듯, 세상과 고립된 채 흑백의 세계에서 멀고 먼 미지를 향해 걷는 영원한 도피자처럼. 수치스러움으로 도배된 현상수배범처럼. 치한. 변태. 낙오자. 찌질이…….



그리하여 여기 한 인간이 밝은 태양 아래에서도 가슴 속이 어둠으로 가득 찬 채 터벅터벅 걷게 되었다. 스스로를 자학면서. [끝]


(혹 어느 날인가 이 뒷이야기가 세상 밖으로 튀어나온다면……. 그때는 필자인 나도 할수없이 이 두 사람을 무대 앞으로 끌어낼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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