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익명성 뒤에 감춰진 인간의 본성
영국의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덤(Jeremy Bentham, 1748~1832)은 200년 전에 파놉티콘(panopticon)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 이론은 원형으로 된 감옥 한가운데에 높은 감시탑을 세우게 되면 죄수들은 24시간 감시당한다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나중에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소설 《1984》에 등장하는 빅브라더라는 개념으로도 발전하게 된다. 다소 억지스러운 면이 있기는 하지만, 인간은 본능적으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도피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바로 이러한 것이 현대의 익명성으로 발전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완전히 익명 뒤에 숨을 수는 없게 되어 있다. 비밀선거라 해도 투표자의 신분은 밝혀지는 것이고, 더 나아가 사회보장 등에서는 철저히 신분이 노출된다. 또한 인터넷을 통한 (익명의) 의견 표출이라고 해도 실은 그 그림자는 남는다. 물론 (선거의 경우) 그 당사자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현대사회에서 완벽하게 자신을 숨길 수는 없게 되어 있다. 얼굴은 물론 지문이나 문자, 음성, 경력, 학력, 직업, 출신지, 가족, 사회생활을 비롯해서 성격과 성향 등을 통해 적절한 추론이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의 소제목 ‘어느 어벙뱅이의 최후’에 등장하는 ‘최후’에 대한 어감, 다소 부정적이 아닐까? 다소가 아니라 많이 많이, 아주 많이. 게다가 ‘어벙뱅이’라는 비표준 단어까지 겹쳐졌으니 이건 아주 대놓고 마지막 통첩을 날리는 수준이다. 다만, ‘어느’라는 불특정 불상자를 나타내는 단어를 썼으니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은 느낌도 든다. 그 ‘어느’에 설마 내가 속하는 것은 아니겠지 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이것은 착각이다. ‘어느’가 주는 느낌은 언뜻 저 먼 데 사람, 그래서 나와는 연결되지 않을 듯 여겨질지 모르지만, 실은 그 ‘어느’는 바로 나 자신을 가리키는 바늘 같은 불특정성(?) 대명사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은 나에 대한 경고이기라도 한단 말인가? 맞다, 바로 나. 그리고 그대, 더 나아가서 그대들.
어느 동네 골목길 담장에 소변금지 표시를 해놓고 가위를 그려놓았다. 볼 때마다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사실은 어마무시한 표시다. 자른단 말이지? 그걸? (아이고~!) 게다가 그 대상자는 나 자신일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해서. 즉 아래와 같이.
(나 또는 성명 불상자인 어느 호모 사피엔스는) 사실 한참 전부터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걸(?) 참고 참고 또 참다가 마침 아무도 없는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아니면 한밤중 시골길 골목에 이르렀다고 해도 좋다. (나 또는 성명 불상자인 어느 호모 사피엔스는) 주위를 쓰윽 둘러본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어느 집 담장에 슬쩍 볼일을 본다…….
쉬원~~. 어이, 쉬~원하다. 휴우~, 이제야 살 것 같다.
턱턱 털고 쓰윽 돌아서는데, 갑자기 심장이 싸아해진다. 두 눈, 눈동자 두 개, 번뜩거리는 흰자위. 그리고 손에는 가위! 이따만 한 엿장수 가위 또는 작두 같은 가위(같은 것)!
얼른 뒤를 돌아다보니 아뿔사 그곳은 막다른 골목.
헉!
‘정말’로 가위가 등장한 거다! 막다른 골목에서!
이 정도면 악몽이다. 빨리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항상 모범시민을 자처하던 나에게 이런 어마무도한 일이 일어날 순 없다. 하지만 이 상황은 실제인 거다.
우얄꼬!
미국의 어떤 포스터를 보면 성조기 모자를 쓴 험상궂은 노친네(?)가 손가락을 앞으로 쑥 내민 채 노려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어쩌라고?)
포스터 노인이 내민 손가락. 그 끝이 겨누는 것(곳)은…….
일단 나는 아니라고 해두자. 뭐 여기저기에서 살짝살짝 건더기 얻어먹은 것들이 좀 있기는 하지만, 그까잇것 아무도 타박하는 사람이 없었고, 크게 문제될 것도 없었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하는 거다.
아, 그런데 말이다……, 신문방송에 얼굴이 이따만하게 나오면서 자막까지 스르르 흘러가는 그 막된 인물들 있잖나. 그 얼굴, 아니 그냥 면상이라고 하자, 그 꼴을 보니 역시 그 짓을 하게 생겼다……고 우선 치부해 버린다. 그 양반은 내가 슬쩍슬쩍 떼어먹은(?) 아주 작고 작은 부스러기들하고는 차원이, 그 규모가 우선 다른 것이다. 나는 껌값의 반의 반반도 안 되는 정도. 그러나 그 양반은 산타클로스 선물보따리만큼.
그런데 왜 나한테 손가락을 겨누는 거냐고? 겉으로만 보면 모범시민이고, 속까지 뒤져 보면 뭐 그냥 그런 잔챙이에 불과한데. (좀 찝찝하긴 하지만서도…….)
이러한 상황을 나는 ‘골목길 법칙’이라고 정의했다. 막다른 골목길에서야 온갖 일(?)이 벌어질 수 있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한 특정의 사건, 즉 ‘바로 너’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군중이라는 단어는 ‘많다’라는 뜻 외에 ‘익명’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군중 또는 대중. 이는 많다는 의미이지만 그 ‘많음'은 거대한 용광로 같아서 모든 다양성이 녹은 합일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온갖 다양성은 사라진 하나의 덩어리가 되는 것이다.
익명성(匿名性), 영어로는 anonymity 또는 anonymous 라고 한단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자신의 실제 이름이나 실체를 숨기는 특성’이라고 하며, 이는 곧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다수 속에 숨는 것을 말한단다.
그리고 개인이라 함은 한 인격체, 즉 남들로부터 침해당하거나 권리를 빼앗기지 않는 독립체를 뜻한다. 이는 근대에 들어서서 확립된 개념인데, 이로부터 시민사회라는 또 다른 사상이 도출되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개인화’라는 미세적인 개념도 파생된다. 또한 이 ‘개인화’는 프라이버시라는 사회적인 현상으로 발전되어 현대 사회의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하며, 여기에서 드디어 익명성도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사실 많은 이들이 익명성 뒤에 숨고자 한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사회현상에 참여하려는 것이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변질되면 군중 속에 들어가 익명으로 어느 개인의 (빗나간) 욕구나 욕망을 표출하게 되는 것이다.
이 익명성은 참으로 편리한 도구가 된다. 한편으로는 프라이버시 보호라는 측면도 있지만, 많은 경우 (예외적인 면도 많지만) 인간의 어두운 부분을 표출하는 수단으로 변질되기도 하는 것이다. 근대 이후의 시대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이와 같은 개인화이다. 여기에 더해 사이버 공간이 등장하면서 익명성은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런데도 이 사회는 실상 익명투성이이다. 이 사이트만 해도 본명이 아니라 익명/별명 등으로 자신을 감추는 이들이 있지 않은가. 바로 필자의 경우처럼. 그렇다고 해서 본명은 선이며, 익명은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판단은 금물이다.
사람에 따라 익명/별명을 사용하는 이유는 제각각일 것이다. 필자의 경우에는 ‘나 스스로에 대해 자신 없음’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사실 익명으로 글을 쓸 때 더 자유로운 마음이 되는 이유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함에도 익명(성)에는 어두운 면이 추종할 수 있는 가능성이 무척 많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다시 ‘어느 누군가’로 돌아오자.
어느 누군가는 ‘누구’인가?
그대의 손가락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혹 자기 자신을 뺀 나머지 누구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
필자의 경우, 적어도 잠재적인 면에서는 익명 뒤에 숨어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닌 타인이라고 단언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어둡고 막다른 골목길에 들어가서 주위를 슬쩍 둘러본 뒤 볼일(?)을 쉬원(~)하게 보는 그 당사자는 바로 나 Rudolf 자신인 것이다. 남이 아니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