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과 육아, 본격적인 더 매운 맛 인생
나의 시니컬함이 빛을 발한건 임신부터였다.
불안이라는 것에 겨우 인지만 하고 있을 때,
더더욱 자손번식(?)은 안해야겠다고
어렴풋이 다짐만 하고 있을 때
거짓말같이 나는 엄마가 되었다.
먼저 제목이 굉장히 건방지다. 아기를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수많은 분들이 이번 달에도 다음 달에도 병원에 주기적으로 다니며 몸과 마음 모두고통스러워 하신다는 것을 많이 듣고 보았다. 따라서 이 제목에 대해 많이 생각을 했었다. 주변에도 지인, 친구 등 아주 많아서 시험관 임신 시도를 하는 과정이 얼마나 고되는지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래서 제목을 이렇게 짓지 않으려고 했지만 또 임신의 주체자가 준비되지 않은 임신과 육아는 결이 다른 고비였다. 아기는 예쁘지만 힘들다. 내 몸을 찢어 지켜주고 싶으면서도 나약한 인간인 내 몸이 힘들면 상상으로는 아기로부터 골백번도 더 도망갔다. 하지만 얼굴이 일그러져 커다란 눈물방울이 떨어지는 아기를 보면 내가 미쳤지 하면서 다시 전속력으로 달려가게 된다. 이제 엄마라는 역할은 나의 숙명이 됐다. 더 도망갈수도 그만두지도 못하는 공식적인 직함이 되었다.
임신테스터기의 두 줄을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에이, 잘못 나온거겠지”
와 그 다음으로 바로 든 생각은 만약 맞다면
“그럼 그렇지 내 인생이 이렇게 잘 풀릴 리가”
였다. 막막했다.
먼저 육아를 하고 있는 친구에게 사진과 함께 보내며 물어봤다.
”이거 완전 백프로는 아닌거지? 틀릴 수도 있지?”
“언니. 요새는 정확도가 높아. 게다가 만약 아기가 잘못되는 거라면 자궁외 임신이야. 어차피 수술 해야해. 그냥 정상임신이길 바라는게 지금 최선일거야. “
이러나 저러나 임신은 맞으니 이제 정상 임신이고 착상이 되었기를 바라야 했다. 현실이었다.
아기한테는 내가 아기의 생성(?)을 알고 이런 생각을 했었다는 것을 영원히 비밀로 해야 한다.
근데 정말이다.
나는 내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저 생각이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랐다.
이토록 힘든 인간의 생은 나는 내 대에서 끊어야 하겠다고 늘 어렴풋이 생각해왔기 때문에 힘든 인간의 생을 물려줘야 한다는 사실이 호흡곤란을 일으켰다.
행복의 폭죽은 너무나 찰나여서 내가 축제의 한 가운데에 있다고 느끼기도 전에 번쩍 하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에 반해 고통은 아주 끈덕지게 나와 내 주변사람을 번갈아가며 괴롭혔다. 나를 좀 못살게 굴다가 잠잠하다 싶으면 내 가족 주위를 호시탐탐 노렸다. 잊고 좀 잘 지낸다 싶으면 간밤의 화려한 파티 후 시퍼런 서슬이 드리운 새벽녘의 볕처럼 가감없이 지저분한 현실을 내비춰줬다. 이제 좀 살겠다고 안도의 날숨을 내쉬는 걸 비웃기라도 하는 양 예상할 수 없는 다채로운 구린 이벤트들로 내 베게를 늘 촉촉하게 유지시켜줬다. 불안장애라는 것을 인지하기 전에도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중학교 때부터 무언가가 너무 잘 풀리면 불안했다. 잠깐 마음을 놓는다 싶으면 엄마와 아빠가 다투고 이혼 이야기를 하거나 그게 아니면 집안 경제 위기가 온다거나. 이 중에서 해당되는 것이 없으면 엄마나 아빠 둘중 누군가가 암에 걸리거나(악성이 아니기는 했지만). 이 중 아무것도 아니면 내가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거나. 늘 항상 행복과 고통은 샴쌍둥이처럼 사이좋게 붙어다녔고 동시에 나타나거나 그게 아니면 지킬앤하이드처럼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뒤에 숨긴 무지막지한 얼굴을 드러내어 내 안정과 안위를 꾸준하게 위협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때 잠을 자면서 수도 없이 기도했다. 하나님이 계시면 내일 아침에 저절로 눈이 안 떠지게 해달라고, 그게 아니라면 길을 가다 교통사고로 갑자기 내가 세상에서 없어지게 해달라고. 아무래도 그게 좀 힘들면 갑자기 폭발사고라도 나서 내가 시작하지도 않은 이 지겨운 인생이 속히 끝나게 해달라고.
나는 그래서 늘 불안한 집을 벗어나 어서 빨리 독립하고 싶었다. 부던히 노력한 결과 스무살 이후로는 독립 아닌 독립(경제적 독립이 아닌 물리적 독립)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새벽까지 내가 어떻게 하면서 돌아다녀도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고 새벽 한시가 넘어서도 이렇게 거리가 밝고 여러사람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서울이 내게는 별세계처럼 느껴졌다.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자유를 마음껏 맛보고 즐겼다. 그렇게 본가(원가족)에게서 아무런 나쁜 소식이 몇 개월째 들리지 않게 되자 이제는 그 고요가 너무나 불안하게 느껴졌다. 올라갈 곳이 없으면 내려갈 자리만 남아있다고 인터뷰하는 가요대상 1위 가수의 겸손한 멘트가 머리를 스쳤다. 그래도 1등을 거머쥔 가수는 본인 노래로 1등이라도 했지, 그때의 나는 안정되고 편안한 상태가 오히려 불안하게 느껴졌다. 마음이 편안한 적이라곤 없으니 내 안정이 내것이 아니고 잠시 부잣집 친구의 명품 잠바를 빌려입은 것처럼 늘 좌불안석이었다.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안정이라는 단어는 흔적도 얼룩도 남기지 않고 빠른 시일내에 원래 주인에게 돌려줘야 할 것 같았다. 나의 모래성같은 안정은 고작 5평 남짓한 자취방 안에서만 초라하게 지켜졌다.
결혼한 후에는 내 일기장을 아무 때나 훔쳐보는 부모님도, 내 행동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사람도 없어서 도리어 편안했다. 나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내가 결혼하고 난 후에 가장 행복하고 안정되보인다는 말을 건넸다. 그때는 그 말도 달갑게 들리지 않았다. 때로는 “니가 뭔데 내 인생을 판단해?”
라는 말로 다투기도 했다. 듣기좋은 꽃노래도 한 두번이지 너무 여러번 반복해서 여러 사람에게 들으니 이제까지 그들이 보아온 내 인생은 얼마나 개판이었을까 하는 삐딱한 마음이 들어서 그런 칭찬도 고까웠다.
결혼 전에는 임신에 대한 생각을 그냥 어렴풋이 했다. 아무도 생명을 만드는 이 막중한 책임감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주지 않았다. 육아가 얼마나 고되고, 아이 키우면 시간을 뺐기고 어쩌고 이런 것들에 대해서 관심도 생각도 없었다. 나는 그저 새로운 내 가정을 이루고 싶었다. 그리고 그저 결혼하면 애 한둘은 쑴풍 낳고들 잘들 사는 것 같았다. 그러나 K-시가는 만만하지 않았다. 신혼 초기부터 시가 어른들의 다양한 말에 다각도로 상처받았다. 내 부모님은 나를 돌려 깠다면 시가 어른들은 대놓고 깠다. 결혼 후 첫 명절때부터 점점 발동이 걸려 나의 분노는 점점 끓는 듯이 두터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분노를 조절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다. 시한폭탄처럼 언제 터질 줄 몰랐다. 그 불똥은 고스란히 세대주에게 갔다. 자해도 했다. 세대주가 보는 앞에서 머리를 주먹으로 마구 쳤다. 손톱으로 손과 팔을 세게 긁어 피가 나기도 했다. 너희 가족들 때문에 내가 마음의 상처를 입었으니 너도 상처를 받아야 한다는 마음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세대주가 보는 앞에서 내가 나를 꼬집거나 물고 곧 재건축을 앞둔 아파트라 마음 편히 벽에도 머리를 미친듯이 박았다. 당연히 너무 아팠지만 아파하는 나를 보며 괴로워하는 수동적인 원인제공자를 보면 이상한 쾌감이 느껴졌다. 자해는 점점 심해졌고 폭언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몇 번을 집에서 나갔고 세대주는 그러지 못하게 하면서 점점 서로 버거워졌다. 그래도 사랑이 없어진 건 아니었다. 뭔가 잘못되어간다 싶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내 부모님의 고향이자 내 학창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고향지역의 이름이 붙은 은행(왜들 지역이름을 딴 상호명은 왜그렇게 많은지)의 간판을 테헤란로 사거리에서 보고 펑펑 울기도 했다. 어느 날은 대로변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내가 그토록 미워하고 경계했던 부모가 보고싶어서 우는 내가 추하고 찌질했다. 비빌 언덕이라고 또 생각나서 우는 것이 한심했다. 내 부모는 진라면 매운맛이었다. 결혼을 하니 시가 어른들은 불닭볶음면이었다. 그래서 세대주에게 언제든지 결혼생활을 끝낼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고 협박을 하려면 무기가 있어야 했다. 애 셋 딸려서 결국 하늘로 못 올라간 선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가 선녀는 아니지만 딸린 새끼가 없어야 했고 나는 그것을 빌미로 딩크를 주장했다. 세대주는 물론 꾸준히 반대했다. 그 반대의 힘이 나의 안일함과 경쟁 끝에 이긴 결과로 나는 결혼 4년차에 임산부가 되었다.
가족이라는 단어의 색은 너무나 오색빛깔이라 그 어떤 사람에게서도 완벽하게 같은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참 요상한 존재다.
내가 생각하는 가족은
‘숨막힘’
‘감시’
‘속박’
‘평가’
‘언어폭력’
‘불안함’
등.
그리고
나의 세대주가 생각하는 가족은
‘따뜻함’
‘아낌없이 주는 나무’
‘용돈’
‘챙김’
'반찬통'
'맛있는 냄새'
등. 내가 생각하는 가족의 이미지가 이런데 나는 연애나 결혼은 괜찮았지만 한 가족을 꾸리는 것에 있어서 큰 거부감이 있었다. 시트콤이나 드라마에 나오는 화목한 가정은 작위적으로 꾸며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혼을 해서 맺어진 시가 가족들이 지내면서 나누는 대화와 분위기는 정확하게 너무 추석특선 명랑가족시트콤이었다. 거기서 나만 쏙 빠져나오면 그대로 '액션' '슛' 하고 프레임에 담을 수 있는 레디메이드 홈 스윗 홈이었다.
결핍을 채우려고 결혼한 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결국 나는 내가 가지지 못했던 화목하고 따뜻한 이 가정이 갖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결혼을 하고 나서 번갈아 양쪽 집에 들리게 되니 그 모습이 더욱 더 극명하게 비교되기 시작했다. 그것도 모자라 점점 세대주에게 질투심까지 느껴졌다. 내가 상담 선생님에게 주로 호소했던 것은 바로 ‘박탈감’ 이었다. 박탈감은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을 뺏겼을 때 느끼는 감정 아닌가?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내가 가진 적도 없는 그것을 날 때부터 가진 나의 새 가족구성원이자 0촌인 배우자를 보고 느꼈다. 나는 없는 그것, 나는 가져본 적이 없어 어떻게 만드는 줄도 출처도 경로도 모르는 그것을 너무 당연하게 가진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해왔지만 그것을 직접 내 눈으로 보니 그것 또한 상상만 하는 것 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괴로웠다.
어린 시절에 얼어붙은 집 분위기를 느끼지 않고 자랐단 말이야? 다이아수저가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아주 내 옆에 가까이에 있었다. 그것에 굶주린 나는 그걸 또 어찌 알고 이 사람을 만났을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고 직접 비교하고 오랜 시간 깊히 고통받으려고?
어느 날 시누와 각기 다른 방에서 누워있었다.
시아빠가 회를 뜨고 새우를 사오셨나보다.
"공주들, 일어나서 새우 먹어야지요~"
시누는 도대체 언제부터 집에서 공주 취급을 받았던 걸까.
나는 갓난쟁이때부터 누군가의 향단이었던것 같은데.
나는 내 새로운 가족을 완벽하게 만들 조감도도 만들지 못한 채 아니 의지도 생각도 없이 갑자기 아기를 가지게 되었다. 더욱이 그 시기는 내가 개인적으로 하고 있었던 상담사업을 확장하려고 마음을 먹었던 그 시기였다. 사무실을 내고 더 체계적으로 하려고 부동산을 보고 계약을 하기 직전이었다. 아마도 같은 달에 나는 두 줄을 만났다. 두 줄을 보고 난 감정은 내가 이 챕터의 초미에 썼던 것과 정확하게 같다.
다시 상상하고 또 되돌려보고 앞으로 감아 낱낱이 뒤져봐도 같다.
잘못된 거 아니야?
말도 안 돼. 나 다낭성증후군 다 나은거야?
와 살 엄청 찌겠네 어쩌지
나는 아기에게 상처주지 않을 자신이 없는데
어쩌지
아름다운 것만 보여줄 자신이 없는데
행복하게만 해줄 수 있는 자신이 없는데
마음에 드는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고 반짝거리는 물이 달린 연필로 머리를 때려서 그것이 아이의 얼굴에 주륵주륵 흘렀던 기억을 잃을 자신이 없는데
버릇없는 행동을 했다고 내가 너를 죽였어야 했다고 저주의 말을 들은 것을 잊을 자신이 없는데
거짓말을 하고 독서실에 가지 않았다고 경멸하는 눈빛과 말과 행동을 완전하게 머리에서 지울 자신이 없는데
어쩌지
망했다.
이번 생은 망했다.
내 인생도 버겁고 힘들어 죽겠는데
내가 남의 인생도 책임져야 하다니
그것도 아주 잘 책임져야 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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