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마치며
내 상처가 다른 사람의 상처보다 더 아픈 것은
내가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아팠던 기억은 그래도 나를 강인하게 다시
일어설 힘을 주었다.
아빠의 18번 노래 가사처럼 내 아픈 기억은 아쉽게도 연필이 아니라서 지우개로 지우지는 못하지만
그 위에 다시 가장 마음에 드는 펜을 골라 아주 진하게 덮어 쓸 것이다.
좋은 기억들은 최대한 비슷하게 골라서
내 아기에게 모조리 전달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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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으로 가득찬 설레이는 이가슴에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사랑을 쓰다가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히 지워야 하니까~
사랑은 연필로 쓰으세요~
=>아빠의 노래방 18번이다. 아빠는 이 노래를 부를때 유난히도 입을 크게 벌리셨다. 그러면 언뜻 보면 활짝 웃는 얼굴인 것 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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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빠와 동생과 셋이서 집 안에서 숨바꼭질을 했다. 아빠를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동생은 나보다 키도 작고 행동도 느려서 아빠를 더욱 못 찾았다. 내가 결국 먼저 아빠를 찾았는데 싱크대에 가로로 누워계셨다. 아빠는 한껏 설레는 얼굴을 하고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쉿' 이라고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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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동창회 행사에 갔다가 아빠를 잃어버렸다. 한 시간 남짓 헤매다 드디어 아빠를 찾았다. 아빠는 작은 내 손을 꼭 잡았다. 아빠의 손이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그 날 일기장에는 따뜻한 아빠의 손에서 사랑을 느꼈다고 썼다. 삐뚤한 글씨가 아직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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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때 환경이 바뀌면 곧잘 구순염이 생기곤 했다. 그러면 엄마는 피곤해서 그런거라고 본인도 자주 그런다고 그럴때는 씻고 귤을 잔뜩 먹고 자라고 토닥여줬다. 정말 엄마 말대로 며칠을 못 가서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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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늘 나를 자랑스러워 한다. 내 앞에서는 그저 '잘했다' 한마디만 하시지만 나중에 온갖 주변 사람들로부터 내가 잘 한 이야기를 부풀려서 듣는다.
0.
아기와 함께 외출할 때
웃음과 미소로 환대해주었던 수많은 어른들
문을 잡아주는 사람들
과자나 사탕을 쥐어주는 사장님, 직원들
아기가 밥을 잘 먹는다고 칭찬해주는 사람들
그래도 좋은 기억이 더 많다.
0. 어릴 때 우리집은 부자였고 그 사실을 나를 빼고 모든 친구들은 다 알았다. 다들 우리 집을 부러워했고 집에 있는 장난감과 만화책들에 놀랐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순간에는 어리버리하며 지나가다가 나중에서야 어렴풋이 떠올랐다.
또한 나는 어릴때 무언가를 물리적으로 못 가진 적이 없었다. 장난감, 책, 옷.
이런 경험은 현재의 내가 돌고 도는 돈에 크게 집착하지 않게 만들었다.
우리 아기는 내 부모님 못지 않게 나를 사랑해준다.
태교는 태반이 다 했다.
음식물도 내가 먹는 찌꺼기만 먹었다.
일단 내가 만들었고 낳았고 책임져야 하니까
인생은 길고 긴 고와 찰나의 행복이니까
그 찰나들을 열심히 모아붙여
최대한 행복한 소풍이 되보도록 할 거다.
한때는 너무 미웠던
지금도 그저 사랑해줄수만은 없는
유전자에 깊숙히 아로새겨진 불안장애를
모두 다 파내지는 못했지만
잘 달래서 함께 지내봐야지
죽은 가지는 일찍부터 쳐내고
건강한 가지는 더욱 햇볕을 보게 만들고
나의 불안은
불완전한 나의 동력
너무 미워하지만은 말아야지
싸우지 말고 잘 지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