푹신한 침구, 알맞은 습도와 온도, 숙면을 위한 모든 제반조건이 갖춰졌음에도 불구, 시차적응에 실패한 나/남편과 달리 바로 런더너가 되어 꿀잠 자고 아침 7시에 기상한 아들.
젊음이 부러운 이유가 하나 추가되었다.
그렇게 아들이 타보고 싶었던 런던의 상징같은 2층 버스. 그는 아침마다 까치집을 짓고 늘 2층 버스 맨앞자리를 사수했다.
둘째 날 일정은 따로 잡아두지 않았다. 시차적응도 하고, (아직은) 낯선 이 도시에 적응도 할 겸 여유로이 하루를 소비해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단 눈뜨자마자 시차 적응의 유무와 관계없이 우리 가족 모두는 배가 고팠기에 바로 집 앞에 서는 2층 버스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아침 먹을만한 장소를 한국에서부터 미리 스크랩해 둔 내 돼지런한 준비성 덕분에, 우리는 곧장 아침식사 장소로 오픈런할 수 있었다.
런던의 상징 같은 2층 버스 탑승은 그 자체로 내게 낭만포인트였다.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버스의 흐름에 우리의 몸과 정신을 맡겼다. 버스 층고가 높아 가장 좋았던 점은 탁 트인 시내 전경을 구석구석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출근하는 사람들, 지하철역과 버스정류장 모양새, 건물들의 양식, 마트 위치 등을 관찰하며 타고 있노라니 40~50분의 시간도 지루한 줄 몰랐다. 잎이 무성한 풍채 좋은 나무들에서 뻗어 나온 가지들을 아무렇지 않게 투타타탁 투타타탁 버스가 머리를 들이밀며 스치고 갈 때면, 맨 앞자리에 있던 우리 가족은 마치 놀이기구를 탄 듯 쫀쫀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버스가 크고 높은데 비해 도로는 우리나라보다 좁다 보니 버스의 코너링도 예상치 못한 각도로 돌아서 섬칫섬칫 놀라며 재미를 더했다. 우리나라와 다른 운전방향, 교통 규칙, 도로의 문화 등을 서로 찾고 공유해 가며, 첫 며칠간은 버스로의 이동 자체가 우리에게 큰 재미와 모험으로 느껴졌다.
Victoria House Coffee&Food, 우리의 첫 아침식사 장소로 기억될 이 곳.
버스정류장에 내려 약 10분을 구글 지도를 보고 따라 걸어 찾은 이곳. 우리의 첫 아침식사 장소로 기억될 카페다. 우린 각각 에그베네딕트, 샌드위치, 햄버거 메뉴를 골고루 시켜 맛을 나눠 보았다. 혁이는 에그베네딕트 맛에, 나는 그릴드 치즈샌드위치 맛에 푹 빠졌고, 남편은 우리에게 인기가 없는 메뉴부터 공략하여 후엔 남긴 메뉴까지 모두 맛있게 먹었다.
일상에서 아침은 늘 전쟁 같다. 제한된 시간 안에 해야 할 일의 리스트가 산적해 있기에, (오랜 시행착오로 완성된) 가장 효율적인 루틴에 따라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임무를 완수해야 할 무언의 압박에 동동거린다. 이 때문에 내겐 여행지에 왔음을 가장 실감하는 순간이 바로 아침 식사를 하는 순간이다. 여유롭게 빵을 한입 크기로 작게 썰고 쏙쏙 넣어가며 천천히 맛을 음미하고, 아주 시시콜콜한 일들까지 대화의 소재로 올려 한참을 이야기 나눈다. 그래서인지 커피 한 모금에도 아주 쉽사리 꽉 찬 행복감이 밀려온다. 그 행복감의 근원이 자칫하면 진하고 고소한 여행지의 커피 때문이라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을 커피로 대변되는 여유라는 사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다녀온 지 한 달이 넘은 지금, 그날의 빵 맛도, 커피 맛도 기억나지 않지만, 호사스럽게 누렸던 여유의 맛만은 또렷이 기억난다.
내셔널 갤러리
배부르니 발길 따라 닿은 곳은 바로 트라팔가 광장 앞에 위치한 내셔널 갤러리. 아직 초등 1학년인 아들에게 미술관과 박물관만 전전하는 여행이 얼마나 지루할지, 나는 내 경험으로 감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내 욕심을 최대한 내려놓고 아들과 상의 끝에 두 군데만 엄선했다. 내가 가보고 싶었던 내셔널 갤러리, 그리고 아들이 가고 싶어 했던 과학박물관. 내셔널 갤러리를 가는 것엔 동의한 아들이 하나의 조건을 달았다.
단, 내가 교과서나 영상을 통해 보거나 들어 아는 작품만 보기(몇 개 없다는 것이 포인트;)
다행히(??) 나 역시 미술에 조예가 깊지 않은 터라 흔쾌히 동의했고, 우리는 그 수많은 명작의 바다 앞에 우리 눈에 익숙한 작품만을 찾아다녔다. 거의 모든 전시실을 돌고 돌았지만 정작 우리가 감상한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나는 모네의 수련을 봐서, 아들은 자신이 배운 작품인 고흐의 해바라기를 봐서 그것으로 각자 충분히 흡족했다. 내셔널 갤러리에서 가장 적은 시간을 투자하고도 가장 만족스럽게 나왔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우리는 다음 장소로 향했다.
우버보트를 타고 그리니치 천문대로 향하는 길
세계 표준 시의 근원이 되는 그리니치 천문대를 구경해 보기 위해 우버보트를 탑승했다. 짙은 갈색의 템즈강물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았지만, 우버보트를 타고 가며 보이는 런던의 랜드마크들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관람차에 지나지 않는 런던아이가 왜 그리 낭만적인지, 사진으로 이미 수없이 봐서 별 감흥이 있을 리 없는 타워브리지는 또 왜 그리 내 가슴을 뛰게 하는지 굳이 이유를 찾지 않고 그저 즐겼다. 내가 런던에 와 있음을 계속해서 실감케 했던 랜드마크들을 하나씩 스치며 우리는 그리니치 천문대를 향해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리니치 파크와 천문대를 오르며
크고 잎이 무성한 나무들이 가득한 그리니치 파크를 지나 한참을 오르다 보니 드디어 그리니치 천문대에 도착했다. 굉장한 무언가가 있을 줄 알았던 그곳에는 그저 세계 표준시의 기준이 되는 선이 그어져 있었고, 세계 주요 도시들이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더해지는지 바닥에 분필로 적은 것처럼 희미하게 적혀있었다. 천문대 그 자체는 아쉽게도 우리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지만 그것을 향한 여정이 더 재미났기에 충분한 의미가 있었다. 여행과 삶이 비슷한 점은 그런 것이 아닐까. 결과나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향한 과정,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점.
6월의 녹음을 가득 느낄 수 있었던 그리니치 파크와 런던 전경을 볼 수 있었던 천문대. 그러나 그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초록색 간판의 베트남 쌀국숫집이라는 아이러니.
천문대로부터 길을 따라 내려오다 아들이 급히 화장실을 찾았는데, 때마침 점심시간이기도 해서 예정에도 없던 근처 식당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집이 우연히도 혁이가 좋아하는 메뉴인 베트남 쌀국숫집이었고, 게다가 맛집일 줄이야. 우연과 필연이 겹쳐져 완전 러키비키잖아. 기분 좋게 한 그릇씩 든든히 채우고 다시 시내로 이동했다.
눈이 휘둥그레지던 아들의 최애 장소들
시내로 다시 돌아오니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을 소화하고 집에 갈 생각에 긴장이 살짝 풀어졌다. 당초 계획은 여행의 첫날이기도 하고 많이 지쳐있을 혁이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아들이 가장 좋아할 만한 상점 세 곳(레고 스토어 - M&M’s 스토어 - 햄리스 장난감 박물관)을 가벼이 둘러보고 집에 갈 참이었는데, 예상과는 다소 다르게, 쉽사리 집으로 향하지 못했다. 세 군데를 돌며 아들의 동공이 점점 커져갔고, 아드레날린이 과하게 분비되어 광기 어린 에너지를 발산해 버린 것이다;
레고 스토어의 규모도 놀라웠지만 남편과 나까지 눈이 휘둥그레진건 M&M’s 스토어였다. 초콜릿 하나로 정말 이럴일인가 묻고 싶었다. 누군가 상품 마케팅을 실전에서 공부하고 싶다 하면 강력하게 엠엔엠즈 스토어를 추천하고 싶다. 마케팅이란 결국 상품 그 자체로써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고, 타 유사 상품과의 차별점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창의력이 범벅된 신박한 판매 기법인데 그것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곳이 이곳이 아닐까 싶다. 이미 하루의 에너지를 다 소진하여 지쳐버린 우리 부부에게도 충분히 눈돌아갈만 공간이었고, 하마터면 이성의 끈을 놓고 필요도 없는 엠엔앤즈 컵, 모자, 쿠션, 골프공 등을 다량구매할 뻔했다.
겨우 정신을 차려 초콜릿 상점을 나와 오늘 여정의 마지막 장소 햄리스 장난감 박물관으로 향했다. 아들이 이제 많이 커서 장난감에 그리 관심 가질까 싶었는데, 이곳 역시 장난감에 진심인 미친 광기의 공간이었다. 1층부터 5층까지 샅샅이 훑는 아들의 눈이 번뜩이던 탓에 지친 우리 노부부는 그를 말릴 에너지도, 의욕도 없었다. 시종일관 즐거워하는 그를 옆에 두고 구석에 앉아서로 하품을 번갈아 하며 우리는 그렇게 아들에 대한 애정을 공유했다.
가볍게 시내 구경이나 하자던, 애초의 목표는 잊은 채 하루종일 정말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걷고 또 걸었던 날이었다. 아마도 열흘간의 여행 중에 가장 힘들었던 날로 기억된다. 그러나 이제와 돌아보면 그날의 힘듦은 다만 예정에도 없던 2만보를 걸어서 때문만은 아닌것 같다.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도시에 갑자기 뚝 떨어진듯 상륙한 우리 가족에겐 다름에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블로그, 유튜브 등을 통해 그리고 상상하던 도시과 내가 직접 두발로 꼭꼭 밟아내며 느낀 도시, 그 사이의 간극. 그것을 우리는 그날 하루종일 온 도시를 두발로 직접 누비며 메꿔갔던 것 같다. 그렇게 둘째날이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