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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Sep 10. 2020

졸업생이 아니고, 노동자입니다!

열네 번째 소란

어떻게든 잘 알아서 하기에는 전달받지 못한 일들이 너무 많았다.

글쓴이. 이사




“졸업생이고, 네가 성실했던 거 아니까 특별히 너에게만 부탁하는 거야. 이거 하려고 줄 선 애들 많은 거 알지?”


 이 말은 대학에 막 들어갔을 때부터 어느덧 고학년을 바라보게 된 때까지, 약 2년간 나의 재갈이 되었다. 대학에 붙어서 기쁜 마음으로 전화를 드렸을 때, 선생님은 아르바이트 생각이 있냐는 질문을 넌지시 던졌다. 마침 할 일도 없었고, 주변에서는 다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수많은 졸업생 중 선택받았다’라는 생각도 들어 우쭐한 마음에 냉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아르바이트를 했던 그 2년 동안, 월급날을 제외하고 나의 발언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업무는 간단했다. 오히려 ‘꿀알바’라고도 할 수 있었다. 토, 일요일, 주말에 아침부터 밤까지 카운터에 앉아서 학부모들의 전화에 응대하고, 수강생들의 숙제와 수험생들의 모의고사 답안지를 채점했다. 수업이 끝난 뒤에는 강의실 칠판을 깨끗하게 닦고, 프린트 복사를 하면 된다.


 그리고 선생님은 첫날 나를 보고 ‘어떻게든 알아서 잘하면 된다’고 하셨다. 일은 간단하니, 너에게 맡긴다고. 하지만 너무 간단해서 문제였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엄연한 노동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역할은 ‘심부름하는 조교’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했던 업무 외에 선생님들이 틈틈이 시키는 심부름도 맡아야 했고, 쓰레기통에 쓰레기가 차면 이를 비우고 새로운 봉투를 씌워야 하는 것도 내 몫이었다. 물론 빵빵해진 봉투를 묶어서 버리는 것도 포함. 칠판 외의 학원 바닥 청소도, 걸레를 빨아와야 하는 것도, 커피가 담긴 컵들의 내용물을 비우고 설거지를 해야 하는 것도. 어떻게든 알아서 잘하기에는 전달받지 못한 일들이 너무 많았다.


 토요일은 오후 2시부터 10시까지, 일요일은 아침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 공휴일에도 학원은 운영하기에 사실상 휴일이 존재하지 않는 아르바이트였다. 그리고 21시간이 길다고 생각될 틈도 없이 채점을 하고, 전화를 받고, 남는 시간에 또 심부름을 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다 지나 있었다. 업무시간은 10시까지였지만, 10시에 수업이 끝난 수강생들의 수강료를 결제하고 텅 빈 강의실로 들어가 뿌옇게 칠해진 칠판을 걸레로 문지르다 보면 어느새 30분이 또 훌쩍 지나가 있었다. 그렇게 집에 돌아가면 12시였다. 말 그대로 하루 종일 그 자리에서 계속 앉아 있었던 셈이다. 이 아르바이트를 과연 ‘꿀알바’라고 할 수 있을까.


 주말에만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단 이틀 동안 근무한 시간은 총 21시간이었다. 교대도 없었다. 일주일간 15시간 이상 근무해야 하는 주휴수당 기준을 충족하였기에 주휴수당을 받을 자격에는 해당되었지만, 주휴수당을 받은 적이 없었다. 애초에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근로계약서도 작성하지 않았기에 그저 근무한 시간에 임금을 곱한 돈을 문자로 알려주면 통장에 입금되는 형식이었던 탓도 크다. 


 그리고 이렇게 노동을 한 건 ‘졸업생’이라는 이유가 컸다. ‘어차피 오래 본 사이고 졸업생인데 우리 사이에 뭘 굳이 깐깐하게 계약서를 쓰냐’는 게 학원의 입장이었다. 그 말에 나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졸업생은 사실이었고, 오래 본 사이라는 것도 맞는 말이었으니까. 설령 내가 그만두더라도 바로 할 수 있는 애들이 넘쳐나는 만큼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내는 게 아닐까, 이런 일에도 그냥 웃으며 넘어가는 졸업생이 내 자리를 대체하지 않을까. 비정규직인 만큼 나는 내 한마디에, 내 실수에 쉽게 대체될 수 있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두려웠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2년을 보냈다.


 2년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왜 아이 성적이 안 나오냐’는 학부모의 컴플레인을 들은 날에는 억울해서 집에 오면서 울었고, 원장님의 여성 혐오적인 발언에 반박했다가 그만두기 직전까지도 ‘시끄러운 애’, ‘페미 하는 애’로 불렸다. 여성 혐오적인 농담에 모든 선생님이 웃었지만 나 혼자 웃지 못했다. 식사 시간이 보장되어 있지 않는 만큼 점심과 저녁을 먹지 못해 잠깐 1층에 내려가 음료수만 들고 오는 건 일상이었다. 바로 이전의 아르바이트를 했던 남자 졸업생과 나 사이의 임금 격차가 무려 2000원이나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고 나서 선생님께 말씀드렸을 때, 그저 시선을 회피하던 그 얼굴도 아직 생생히 기억한다.


 만약 내가 아직까지도 그 카운터에서 전화를 받고, 쓰레기를 치우고 있었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불안한 위치에서, 돌을 씹듯 불편하게 넘어갔을 것이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나는 ‘아는 사이’고, ‘학원을 나온 졸업생’인 ‘알바생’이니까. 하지만 나는 노동자이기도 하다. 평등하게 노동을 하고,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으며, 정당하게 보장되는 휴식을 취할 권리가 있는 노동자. 언제든 대체 가능한 부품이 아닌, 직장에서의 안정을 보장받아야 하는 노동자. 기본적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고, 마땅히 보장받아야 하는 노동자.


 이미 질릴 대로 질려 더 이상 연락을 하지도 않고, 할 생각도 없지만 딱 한마디 말만 하고 싶다. 그 2년 동안 내 입에 물렸던 재갈을 이제 풀 때도 되었으니까. 제발, 뒤에 들어온 후임에게는 그러지 말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저는 졸업생이 아니라, 노동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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