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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마루 Sep 16. 2022

내가 나로서 오롯이 존재하는 힘

자존감에 관한 고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떠오르는 추석, 아직 연휴가 하루나 더 남아있지만 추석 때 느낀 단상들을 곱게 잡아 붙잡아 두기 위해 노트북을 켜게 되었다. 횟수로 치면 결혼 후 어느덧 아홉 번째 맞이하는 추석이다. 돌이켜보면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해서 새로운 문화에 당면했음에도 마치 원래부터 오래도록 알고 지낸 것처럼 남편은 우리 가족에, 나는 남편의 가족에게 부대낌 없이 스며들었던 시간들이었다. 한 명씩 한 명씩 아이들을 낳고 넷째인 막내가 갓난쟁이 었던 작년 추석을 지나 이제는 제법 걸음마를 할 수 있게 된 올해는 유독 기쁨과 감사로 충만했던 시간이었다. 추석 전날과 당일은 동서 부부와 술 한잔을 곁들여 그간 나누지 못했던 속 얘기도 실컷 나누고, 오늘은 친정 부모님네 집에 방문해 엄마표 음식을 만끽하면서 비로소 명절다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의 맑은 웃음들, 짓궂은 셋째의 정신없는 움직임, 이제 막 피어나는 막둥이의 작은 걸음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꿈만 같고 감동으로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내가 너무 현실감 없이 너무 해맑기만 한 것인가?라는 질문이 가끔 올라오기도 한다. 인생이라는 게 결코 마냥 모든 게 좋을 수는 없는데 나는 입만 열면 감사를 외치곤 하니 말이다. 이러한 내 마음의 배경에는, 엊그제 스쳐 지나간 단상에 중요한 단서가 있었다. 그 단서의 키워드는 다름 아닌 '자존감'- 지금은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원래 나는 남의 눈치도 많이 보고 남들이 나를 어찌 평가할까, 남들의 시선 속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까를 무척 많이 고민하던 사람이었다. 분명 누구든 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 그럴 테지만 말이다. 그랬던 내가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한 뒤에는 내 존재 자체 그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점점 커지면서 자연스레 나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도 서서히 올라갔던 것 같다. 그 전에는 늘 외모에 대해 민감하고 예민할 수밖에 없고, 자신이 없었으며, 그 누군가에게 잠재적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스트레스 아닌 스트레스가 분명 있었던 반면 지금은 일단 외모에 대한 평가로부터 굉장히 자유로워졌다. 이쁘든 못생겼든 살이 쪘든 그렇지 않든 나의 '조건'과 상관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한결같이 사랑을 줄 남편이라는 존재가 옆에 든든히 버티고 있기 때문에, 안에서부터 훨씬 더 단단한 존재로 빚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비단 외모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누군가에게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도 정말 많이 희미해졌다. 갓 결혼을 한 뒤에는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누군가에게 구구절절 납득을 시켜야 할 것만 같은, 대상을 알 수 없는 그 누군가에게 마치 빚진 것 같은 마음도 분명 있었다. 과하게 나를 포장하고자 별 쓸모도 없는 학벌과 과거 이력을 들이대야 할 것도 같았고, 그냥 아이만 키우는 '애엄마'가 된 것이 아니라 굉장히 근사하고 멋진 비전이 있는 비즈니스를 운영한다는 것을 어떻게든 어필해야만 나라는 존재가 인정받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지금은? 추리한 차림에 유모차를 끌다가 누구를 만나도 나는 그 어떤 판단과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상대방에게 나를 납득시키고 인정시키려 노력함에 앞서 이미 나 스스로가 나의 존재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누군가의 인정을 바라는 것은 실상 나 스스로 나를 인정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지금의 내 모습으로 충분하다. 그 어떤 타이틀이나 포장지가 더는 필요하지 않다. 나의 본연의 모습으로도 나는 충분히 빛나고 사랑받을만하며 그런 내가 꾸려나가는 삶이라는 작은 둥지가 그 누구의 것보다 단단하며 의미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역으로 다른 사람도 그 어떤 외부적 요소로 결코 쉽게 판단하지 않는다. 한 가지를 가졌다고 삶이 마냥 행복한 것도 아니고 보이는 모습이 결코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찰리 채플린의 그 유명한 말이 떠오른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그 유명한 문장이 말이다. 셰익스피어의 맥배스를 읽으면서도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바로 그 말에 담긴 진리 한 조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명도가 선명해진다.


  당장 내일, 당장 내년보다는 어쩐지 자꾸 10년 뒤, 20년 뒤의 나와 가정의 모습을 그리고 상상해보게 된다. 바로 어제 10년 후의 나를 그리며 글을 써놓고 오늘은 거기에 10년을 더 점프해 '오십에 읽는 논어'를 집어 들어 음미했던 이유다. 개인적으로 미래는 항상 미리 생각하고 구상해놓아야 다른 누군가가 구상해놓은 결과에 편승하지 않게 되다고 믿는 바인데 어쩜 책에서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늘 가까이에 근심이 있다' 고 말한 공자의 구절이 같은 결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현재의 주어진 것들을 충만히 누리고 감사함과 동시에 저 멀리에 있는 나 자신의 삶과 비전을 세밀하게 조립해나가는 과정은 항상 양립해야 한다고 믿는다. 어쩌면 인생이란 매 순간 공중전과 지상전을 이중으로 치러야 하는 지난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늘 말하지만, 치밀하고도 치열한 공중전과 지상전을 동시에 치르면서 만나게 된 서른 살의 나 자신이 참으로 애틋하고 소중하고 기대가 된다. 그 누가 뭐래도 내가 나로서 오롯이 존재할 수 있는 나면의 힘을 가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힘을 원동력 삼아 남은 3개월 동안 더 많은 귀한 삶의 열매들을 맺게 될 내 자신을 셀프로 응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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