괌에 이주하기 전엔 우리 아이들이 (그리고 내가) 영어를 못하는 것을 이해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 때문이었을까. 조금 더 부지런하면 영어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는데 여행으로, 또 한 달 살기로 가보았던 괌에선 최소한의 생활영어로도 사는데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자꾸 미뤘다. 독박 육아를 핑계로...
그런데 어느 날, 미쎄쓰땡땡 선생님께서 '우리 아이가 영어를 못해서...'라고 시작하는 나의 이야기(라 쓰고 변명이라 읽습니다. 또르르)에 이렇게 말했다.
"미쎄쓰박, 그런데 너 괌에 '살러'온 거 아니야?"
"네? 네, 그렇죠...."
"나는 어딘가를 살기 위해 간다면 그곳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 아이가 학교에 가면 네가 없이 생활해야 한다는 걸 알았을 텐데 아이가 혼자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영어는 공부해왔다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작년에 우리 반에도 한국에서 새로 온 친구가 있었어. 그 친구는 한국에서 서울에 있는 'English Kindergarten'에 다니다 왔대. 그래서 영어를 아주 잘했었어. 너는 그런 정보를 몰랐니?"
"....Sorry...." (하아... 어무이.....)
한국에서도 유명했던 나의 죄송병은 괌에서도 도졌다. 그리고 그 죄송함의 대상은 비단 선생님만이 아니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너무 미안했다. 죄인처럼 나의 어깨는 점점 좁아져갔다.
영어 못하는 게 자랑도 아니면서 무슨 방패처럼 "우리 아이가 한국에서 와서 영어를 잘 못해."라고 말했던 나. 어떤 이에겐 저렇게 비춰질 수 있구나. 쇼킹이었다. 그리고 이 엄청난 쇼킹을 문화충격이라 생각했다.
올해 여름과 가을 사이. 아이가 1학년이 되었다.
담임 선생님이 누구신지 알게 되는 날 어찌나 떨리던지... 이름도 예쁘고 미소가 아름다운 아이의 1학년 담임선생님은 올해 8월 괌에 입성한 새내기 선생님이신데 굉장히 친절한 스타일이시다. (게다가 그녀는 미국 10위권 대학 출신에 경력이 매우 좋아서 어떤 이유로 연고도 없는 괌에 오게 되었을까 조금 궁금하다.) 온라인 수업에서 아이가 영어로 대답하는 것을 자신 없어할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우진, 너는 한국어를 잘하잖아. 나는 한국어를 못해. 너는 조금 있으면 2개 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텐데,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아니? 자신감을 가져!"
얼마 전 PTC(Parents Teacher Conference)에서도 황송할 만큼 칭찬을 해주셨다.
"수업태도도 좋고, 수업에 참여하려는 우진이의 의지가 너무 자랑스럽다. Hand Writing도 우리 반에서 best야. 너희들이(나와 남편) 걱정하는 communication skill부분은 걱정하지 마. 우리는 말하는 것 이외에도 다른 많은 방법으로 소통하고 있으니까. 집에선 지금처럼 한국어를 쓰는 게 좋을 것 같아. 영어 말하기 실력 향상은 조금 느릴 수 있겠지만 그것이 나중에 아이에게 큰 재산이 될 거야. 난 그가 우리 반 학생이라서 정말 감사하고, 온라인 수업으로 가끔씩 지치는(?) 순간마다 그가 수업에 임하는 자세가 나에게 큰 의미가 되곤 해"
흑흑흑,
역시 문화를 뛰어넘는 건 좀 더 원초적인 사랑, 배려, 이해와 같은 "예쁜 마음"이다.
많은 외국 선생님들이 저학년이나 킨더 학생들을 저렇게 칭찬하고 평가하는 것은 다반사인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따뜻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어찌나 힘이 되는지. 가끔은 답답하고 어색한 이민 생활에 단비는 역시 아이가 행복해할 때, 그리고 아이가 잘 지내고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런 순간들이 괌에서의 2021년, 2022년, 2023년... 미래를 꿈꾸게 한다.
친절한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항상 sorry부터 나오는 *죄송병 심각단계인 내가 드디어 그 병을 고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도 '죄송해요'를 달고 살아서 친구들은 이마에 그냥 '죄송해요'를 써서 붙이고 다니라고 놀린다. 괌에 이주하면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으로(당당한 여자?) 거듭나고 싶었는데 그 병은 더 심해졌었다.)
우리 첫째는 정말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인정 욕구도 강하다. 잘하고 싶어 하고 칭찬받고 싶어 한다. 나도 우리 집 장녀인데 내가 어릴 때 갖고 있던 마음이 아이에게 보일 때 가끔은 안쓰럽기도 하다. 그래서 더 안아주고 싶고 더 칭찬해주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된다. 첫째라서 자꾸 더 채근하고 의지하게 된다.
그래서 더 고맙다. 누구에게도 (심지어 가정에서도) 마음껏 인정받지 못했고, 스스로 계속 눈치 보며 살았을 아이의 1년. 어른도 힘들었던 변화의 과정을 아이는 혼자 이겨냈다.
"애들은 알아서 잘해. 알아서 다 적응해, 걱정하지 마."
라는 말이 참 짠하고 경이롭다.
사랑하는 아들! 주말에 주스와 스낵들고 비치 가자!
불가사리도 보고, 무지개도 보고, 물고기도 만나자.
엄마는 뭐든지 열심히 했던, 뽑기 하나에도 열심이었던 너가 정말 사랑스러워.
맹세코 아이에게 1등이 좋다고 강요한 적 없다. 그럼에도 아이는 훨씬 더 어린 나이에도 1등이 꼴찌보다 좋은 것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축구장에서 달리기 시합을 할 때도 아이들은 누가 시킨 듯이 경쟁적으로 열심히 달렸다. 일부러 못하는 아이, 잘하지 않고 싶은 아이, 칭찬받기 싫은 아이는 없다. 엄마가 말하지 않아도 아이는 이미 누구보다 잘 해내고 싶다.
아이는 작년 담임선생님이셨던 미쎄쓰땡땡 선생님을 좋아한다. 억울할 정도로 참 무뚝뚝했던 선생님이었는데 아이는 너무 좋단다. 이유를 물었다.
"미쎄쓰땡땡 선생님은 항상 똑같아. 화날 때도, 기분 좋을 때도. 그리고 학교 처음 갔던 날 내 손 잡아줬어. 그래서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