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유리알 유희 - 헤르만 헤세 (2011년, 민음사)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을 읽고 나서, 그의 책을 한 권 더 읽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기왕이면 대표작이 좋겠다는 마음에 '유리알 유희'를 덥석 집어 들었다. 마치 공항에 가서 아무 곳이나 당장 출발하는 비행기 티켓을 달라고 하는 것처럼 얼마나 무모한 선택이었는지 책을 읽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제목만 보고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기대했던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소설은 '요제프 크네히트'라는 인물의 전기와 그의 유고로 구성되어 있다. 시간적 배경을 뚜렷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이른바 ‘잡문시대’(20세기)를 지나 큰 전쟁(1,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그로부터 20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살았던 '요제프 크네히트'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2400년에 기록으로 남긴다는 설정이다. 작품이 발표된 시기가 2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당시로서는 미래사회의 이야기이다. 전쟁의 참상과 인류의 비극을 다루기보다는, 정치적 혼란과 사이비 문화가 만연한 잡문시대를 거론하고, 전쟁 후의 사회를 역사의 흐름에서 관망하고 있다. 문장이 대체로 차분하고 담담하지만, 그 충격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도배된 여느 전쟁영화보다 강하다. 인류 최악의 전쟁이 한창이던 상황에서 그 너머의 세상을 볼 수 있었던 헤르만 헤세의 혜안에 감탄하게 된다.
모든 시작에는
이상한 힘이 깃들어 있어
우리를 지켜 주고
살아가도록 도와준다.
(요제프 크네히트의 시 ‘단계’ 중에서)
'유리알 유희'는 작가의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서, 글의 전체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고도의 정신세계를 위한 무엇이거나 종합예술에 가까운 것으로 묘사된다. 본래 철사줄에 유리알을 끼워서 악보처럼 사용하던 것에서 시작되었다지만 음악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법칙과 기호로 이루어져 있지만 수학이나 과학도 아니다. 방법적인 면에서 보면 명상수련에 가장 가깝지만, 그 형식과 내용을 기록하여 여러 사람이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와 같은 설정은 책을 읽는 내내 궁금증을 유발한다. 도대체 '유리알 유희'란 무엇인가. 실체가 분명하지 않다 보니, 소설 속 '유리알 유희'를 기존의 종교나 철학, 조선의 성리학 등과 비교해보며 읽을 수 있었던 점은 이 책이 주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 인간의 정신과 사상에 대해 헤세 님과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었다. 결국은 '저는 별생각 없이 즐겁게만 살고 있습니다'라던지, '저는 짧고 자극적인 잡문이 좋습니다. 작가님은 말씀이 너무 많으시네요.'라는 대답밖에 할 게 없어서 괴로웠지만.
주인공 ‘요제프’가 연구생 생활을 마치고, 조직(유리알 유희를 신봉하는 영재 집단인 ‘수도회’를 말한다. ‘카스탈리엔주’를 근거지로 하고 있다.)으로부터 받은 첫 번째 직무는 카톨릭 수도원에 파견되어 '유리알 유희'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야코부스 신부’를 만나게 된다. 야코부스 신부는 교황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교황청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던 카스탈리엔 지도부는 요제프에게 비밀 지령을 내린다. 그것은 바로 야코부스 신부를 그들에게 우호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카스탈리엔과 카톨릭을 대표하는 두 사람은 서로를 가르치고 배우게 된다. 야코부스 신부는 ‘유리알 유희’가 그들만을 위한 유희에 지나지 않다고 지적한다. 깊이 있게 연구하고는 있으나, 그 또한 유희를 위한 것일 뿐이고, 형식과 틀로서의 단편적인 역사만을 바라볼 뿐 정신과 사상의 흐름으로서의 역사를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요제프는 야코부스 신부와의 만남을 통해서 카스탈리엔과 현실세계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한편, 현실세계는 다시 흔들리려 하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카스탈리엔이 막대한 예산만 축내는 불필요한 존재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카스탈리엔 지도부는 이러한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황폐해진 정신세계를 회복하는 역할을 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태생의 목적을 잊고 현실세계로부터 멀어져 버린 것이다. 요제프는 카스탈리엔과 세속의 사이에서 자신의 역할을 고민한다. 마침내 그는 유리알 유희 명인의 지위를 버리고 카스탈리엔을 떠난다.
죽음의 순간에조차 아마 우리는
젊게 새로운 공간으로
넘어가는지 모른다.
생의 부름은 결코 그치지 않으리니…
그러면 좋아, 마음이여,
작별을 고하고 건강하여라!
(요제프 크네히트의 시 ‘단계’ 중에서)
다윈의 진화론처럼 인간의 역사도 늘 나은 방향으로 발전할 거라 믿었던 시대. 그 어느 때보다 이성의 힘을 키우고, 발달된 과학기술로 자신감이 충만했던 시대. 그 문명의 정점에서 벌어진 야만의 전쟁을 지켜보면서 헤르만 헤세는 소설 '유리알 유희'를 써 내려갔다. 비극적인 역사를 반복하지 말라고, 정신줄 똑바로 잡으라고 미래세대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남겼다. 미래세대는 현재가 되었고, 여전히 정치인들은 본질을 숨기려 하며, 언론은 몰라도 그만인 뉴스를 무한 반복한다. 자극과 혐오로 넘치는 21세기 (신)잡문시대를 보면서, 미래를 예견한 '헤르만 헤세'의 경고를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