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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nha Sep 06. 2022

새와 애벌레와 나

먹는 자와 먹히는 자


  회색 구름이 엷게 드리운 날이었다. 퇴근길에 버스를 타러 갔다. 특별히 출퇴근을 소재로 글을 쓰려는 의도는 없다. 단지 사무실에 있는 동안에 재밌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뿐이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온다. 회색 구름이 엷게 드리운 어는 날, 나는 퇴근길에 버스를 타러 갔다.


  회사 앞 화단에는 나무가 몇 그루 심어져 있다. 키가 작고 잎도 무성하지 않다. 바닥에는 초록색 잔디가 깔려 있고, 진한 갈색 데크가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다. 점심시간이면 직원들이 벤치에 앉아 광합성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다. 퇴근시간이다. 그들이 교통체증을 경험하기 위해 회사를 빠져나가고 있을 때, 나는 회사 앞 화단에서 자연의 섭리를 목격했다.


  작고 귀여운 새 한 마리가 데크에 서있었다. 이름은 알 수 없다. 그 앞에는 마찬가지로 이름을 알 수 없는 애벌레 한 마리가 엎드려 있다. 살이 제법 통통하다. 선명한 연두색 몸통을 위로 구부리고 있다. 얼음땡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멈추어 있다. 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애벌레 주위를 뛰어다닌다. 애벌레를 주의 깊게 보고 있다. 그러다가 나의 존재가 신경 쓰였는지 옆에 있는 나무 위로 날아올라 몸을 숨겼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서있었다. 내가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애벌레는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새가 사냥하는 것을 방해하게 된다. 새와 애벌레 사이의 일에 간섭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신이 인간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것처럼. 물론 아주 오래전에는 신이 인간 세계에 관심을 가졌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보아온 현실에서 신의 의도라고 할 만한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가까운 곳에서나 먼 곳에서나. 이름을 알 수 있는 사람에게서나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에게서나. 그렇기 때문에 나는 새와 애벌레 사이의 일에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두 눈은 새와 애벌레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9회 말 역전 기회를 앞두고 마지막 투구를 기다리는 타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내가 어느 정도 멀어졌을 때, 멈추어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새가 다시 내려왔다. 죽은 듯 얼어있던 애벌레가 갑자기 꿈틀거렸다. 갈색 데크를 벗어나 초록색 잔디밭을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운명의 손아귀를 뿌리치려는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새는 고개를 몇 번 갸웃하더니 애벌레를 한 입에 덥석 물었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나무 위로 날아올랐다.


  이름 모를 새는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이름 모를 애벌레를 물고 멀리 날아갔다. 회색 빛 구름과 회색 빛 건물들 사이 어딘가를 향해서. 화단에 홀로 남겨진 나는 손바닥을 마주 대고 비벼 보았다. 축축함이 느껴졌다. 뻣뻣해진 목을 비틀었더니 뚜두둑 소리가 났다. 계단을 내려가 버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새와 애벌레와 나를 생각했다. 우리에게 이름은 필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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