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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향 Sep 23. 2020

해갈되지 않는 목마름



큰일이다. 머릿속에는 빨간색 경고등이 어지럽게 깜빡였다. 아무래도 급하게 사랑에 빠진 것만 같았다. 당신과 나는 맨 살에 닿아오는 차가운 에어컨 바람을 가리려 등까지 이불을 끌어올리고 침대 위에 엎드려 각자 가져온 책을 꺼내 들었다. 나는 이병률 시인의 혼자가 혼자에게, 당신은 젊은 작가상 단편 소설집을 가져왔다.

- 그 책, 재밌어?
- 응, 이거 엄청 잘 읽히고 내용도 재밌어. 너도 꼭 읽어봐.

당신의 취향은 이렇구나. 이불 밖의 온도와는 상반되게 내 옆에 닿아오는 온기와 바스락 거리는 이불의 느낌이 참 좋았다. 호텔 창 밖에 보이는 명동의 낡은 건물들 마저도 운치가 있어 보여서 마치 마카오에 온 것 같았다. 낡은 빌딩 숲을 보며 스물한 살에 혼자 다녀왔던 진짜 마카오를 떠올렸다. 여행자들의 시선을 빼앗는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세나도 광장, 아슬아슬하게 입구 쪽 벽밖에 남지 않은 세인트 폴 성당. 수많은 금색의 카지노 호텔들, 반대편에는 엄청나게 많은 회색빛 빈민가. 행복과 절망이 공존했던 곳. 아름답지만 왠지 슬펐던 곳. 나는 마카오를 그렇게 기억한다. 그렇게 스물한 살의 기억을 더듬으며 몇 분을 멍 때리다 이내 가라앉은 기분으로 앞에 있는 책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책에 집중한 지 이삼십 분쯤 흘렀을까, 천천히 잡아오는 손 때문에 순식간에 눈앞에 있는 글자들이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긴장해서 차가운 내 손에 비해 당신의 손은 너무나 따뜻했다. 심장이 쪼그라드는 두근거림에 나는 당신을 쳐다봤다. 당신의 손은 나의 손을 잡고 있지만, 시선은 여전히 책 속에 박혀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나는 너무 좋아서 심장이 아픈 느낌인데. 원망이 섞인 눈초리로 내 마음의 소리가 당신의 마음에 닿길 바라며 나는 당신을 빤히 보았다.

- 너, 눈에서 꿀 떨어지겠어.

내 마음의 소리가 통했는지 당신이 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렇게 쳐다보는 당신이 미워졌다. 순간, 사랑은 구걸이 아니라고 했던 엄마의 위로가 생각이 났다. 직접적인 말만 안 했다 뿐이지 나는 이미 당신에게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당신과는 침대가 아닌 식탁에 앉아 대화를 해보고 싶다고. 적막이 흐르는 호텔방이 아닌 명도가 낮은 편안한 식당에서, 불특정 다수의 대화 소리와, 적당한 웃음소리가 섞여있는 공간에서 함께이고 싶었다. 수저와 식기가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에 우리의 웃음소리가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싶었다. 여느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들처럼 시시콜콜한 사는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시끄러운 사건 사고들, 최근에 봤던 영화 이야기, 당신과 나를 기쁘게 했거나 화나게 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집에 갈 때쯤이면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다 잊어버린 채 가을밤공기처럼 산뜻한 기분만 마음에 남겨질 가벼운 주제만을 가지고 당신과 밤새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럼 내 인생이 참 완벽할 것 같았다.
당신만 내 삶에 들어와 준다면, 완전한 행복일 것 같았다.


- 지향아,


당신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 이름은 상상에서 빠져나오게 된 주문이었다.

행복과 절망이 공존했던 마카오의 풍경이 다시 생각이 났다.

마치 나 같아.



내 손에 닿아있는 당신 손은 여전히 따뜻했고,

당신의 눈길은 여전히 책 속에 있었다.




해갈되지 않는 목마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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