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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화 Nov 18. 2020

퀸스 갬빗, 다치더라도 내 탓이니까

어린 시절 트라우마와 정서 불안

넷플릭스에 체스 플레이어의 삶을 다룬 시리즈가 새로 떴다.



'퀸스 갬빗'


오랜만에 아주 마음에 드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를 만났다. 보육원에서 우연히 배운 체스에 천재성을 보인 한 소녀가 우여곡절을 거쳐 글로벌 체스 챔피언이 되는 내용이다.


(*여기부터 스포일러 있습니다. 아직 안 보신 분 참고하셔요.)


사전 정보 전혀 없이 1화를 시작했다. 노크 소리와 함께 프랑스어를 쓰는 남자의 목소리로 시작되었다.


Mademoiselle? Mademoiselle Harmon, vous êtes là? (하몬 양, 거기 계십니까?)


곧이어 'Paris 1967'라는 연보라색 알파벳과 숫자가 화면을 가득 메웠다.


퀸스 갬빗은 첫 시작부터 독특했다. 1화 절반 정도까지도 장르 파악이 안 됐다. 늦잠을 잔 것 같은 주인공이 급하게 호텔방을 뛰쳐나와 경기장에 도착하는 것까지는 체스 이야기인가 싶었다. 중년의 남자와 젊은 여자가 체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똑딱똑딱 시계 소리가 빠른 템포로 이어졌다.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의 여자 플레이어 얼굴이 클로즈업되더니 어린 소녀의 얼굴로 화면이 바뀌었다. 9살 소녀가 처참한 사고 현장 옆에 무표정하게 서 있는 장면이 나오면서 소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는 경찰들의 대화가 들렸다. 사고 현장에서 엄마를 잃은 소녀를 보육원에서 데리고 갔다. 보육원에 도착한 이후 등장하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수상했다. 음악도 화면 분위기도 곧 뭔가 기괴한 일이 일어날 것을 암시하는 듯했다. 장르를 예상할 수가 없었다(퀸스 갬빗 연출자는 배경 음악을 시청자와 밀당을 하는 도구로 참 잘 활용한다).



엄마를 사고로 잃고도 울지 않는 9살 소녀, 베스. 무표정한 얼굴에 앙 다문 입술, 어눌한 목소리. 촥 가라앉은 보육원 공기. 어린 소녀들에게 매일 두 알씩 약을 먹이는 보육원. 알약을 먹자마자 베스는 비틀거리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몽롱해지는데 주변 소음은 더욱 또렷하게 들린다. 한 입 먹자마자 인상이 찌푸려지는 맛없는 보육원 식당 음식. 아동 학대 다큐 같은 전개였다.


연출의 힘이 대단했다. 시종일관 어두 컴컴한 화면, 불안감이 느껴지는 낮은 배경 음악, 짧은 대사, 인물들에 대한 불친절한 소개, 생각보다 잔잔한 스토리. 그런데 집중해서 보게 되는 매력이 있었다. 휙휙 지나가며 던져주는 인물에 대한 실마리들. 정신 상태가 멀쩡해 보이지 않는 엄마와 트레일러 밖에 서 있는 아빠(처럼 보이는 남자)와의 대화. 시리즈 전체 내용 중 엄마에 대한 친절한 소개는 어린 베스가 집어 든 책 제목 하나였다.


'단항식 표현과 대칭 표현, 앨리스 하먼 박스 저, 코넬대학교 수학과'


1960년대 미국은 사회적으로 혼란과 동요를 한창 겪고 있었을 시기이다. 여성의 교육과 사회 진출이 본격적으로 활발해지기 전이다.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수학으로 박사 학위까지 딴 베스의 엄마는 '보통의' '여느' 엄마는 아니었다는 걸 보여주는 장치인 듯하다.


전반적으로 인물 묘사가 독특했다. 감정 표현이 절제돼 있고(주인공 베스는 시리즈 내내 감정 변화가 크게 없다) 인물 소개가 듬성듬성 여기저기 조금씩 흩어져 있다. 딱히 일관성 있게 나쁜 캐릭터도 좋은 캐릭터도 없어서 마치 '실제로 일었던 일 & 인물'인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퀸스 갬빗 연관 검색어에 '실화'가 따라붙는다).


퀸스 갬빗은 196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천재 체스 플레이어의 성장물이다. 미니시리즈의 형태로 총 7개의 에피소드로 구성이 되어 있다. 영화로 만들기는 내용이 길어서 시리즈로 만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2016년 영국 BBC가 제작/방영한 '더 나이트 매니저'라는 6부작 시리즈가 하나 있다. 어벤저스/토르의 톰 히들스턴과 닥터하우스 휴 로리가 주연인 아주 재미난 스파이 물이다. 존 르 카레의 장편 소설 '나이트 매니저'를 영화로 제작하려고 몇 번 제안이 오가다 도저히 두 시간 분량 영상으로는 그 방대한 내용을 담아낼 수 없다며 여러 차례 무산된 바 있다(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감독이자 칸 영화제 심사 위원장 출신인 시드니 폴락에게 영화 제작 제안이 오갔다). 그러다 영화가 아닌 6부작 미니시리즈로 제작되었다(영국식 스파이물 좋아하시는 분들 중 아직 안 보신 분 있으면, 강추드린다).


퀸스 갬빗도 비슷해 보인다. 내용의 흐름 상 시즌제로 갈 것 같지 않고(시즌 2 제작 계획이 없다 했다) 한 편의 영화로 만들기에 내용이 너무 길어서 미니시리즈로 만든 건 아닐까 싶다. 7개의 에피소드가 그만큼 촘촘하게 기승전결의 짜임새를 갖추고 있다. 350분짜리 멋진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다.



천재의 이야기는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단골 소재다. 그런데 퀸스 갬빗은 촘촘하고 전략적인 연출, 실제 그 인물 같은 연기, 꼼꼼한 시대 재연(1960년 대 미국의 패션, 인테리어, 음악 등이 멋스럽고 예쁘게 표현되어 있다), 탄탄한 시나리오, 영특한 배경 음악 사용으로 완성도가, 드물다 싶을 정도로, 꽤 높은 시리즈이다. 그런데 특히나 내 시선을 끌었던 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한 아이의 성장 과정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아주 무게감 있게 그리고 섬세하게 잘 표현했다는 점이다.


발표 불안의 주요 불안 원인 중 하나가 성장 과정에서 겪은 억압, 심리적 위축, 부모의 부정적 양육 태도라고 앞서 다른 글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 원인으로 생긴 발표 불안은 '내 성격이 원래 이렇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서 '극복 가능한 증상'으로 인지하는 데에 많은 용기와 시간이 필요하다. 스스로의 성장 과정을 객관적으로 돌아본다는 게 쉽지 않고 부모님의 양육 태도를 '평가'한다는 건 마음이 무겁고 불편한 일이어서 더욱 그러하다.


사실 성장 과정에서의 억압, 위축, 트라우마는 '발표 불안증'으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전반적인 정서 불안의 원인이긴 하다.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내가 이 증상의 원인과 극복 방안에 대해 깊이 있게 논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하지만 발표 불안의 원인에 대해 파고 파고 파는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이와 관련된 많은 사례들을 접하며 이론을 살펴보고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지 관찰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 발표 불안이든 정서 불안이든 불안증을 느낀 당사자가 이를 극복하고 벗어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성장 과정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자기 연민, 분노, 무기력 등의 감정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상 증상이(여기서 말하고 싶은 불안증은 '순간적으로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긴 하지만 삶 전체를 잠식할 정도는 아닌 일시적인 증상'이다. 이보다 더 깊고 강렬한 불안감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겠다.) 어떤 원인으로 시작된 것인지를 알게 되면 해결/극복 방안의 방향과 가닥을 잡을 수 있다. 그러려면 성장 과정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이 필요한데 퀸스 갬빗은 타인의 성장 과정에서의 트라우마를 들여다보며 제삼자의 시각 가지기 연습을 하기에 참 좋은 재료다.


퀸스 갬빗에는 발표 불안에 대해 글을 쓰고 있는 내 눈에 아주 흥미롭게 훅 들어온 부분이 몇 있다.


1. 아이는 왜 체스에 열중하게 되었을까?



1화 앞부분에 나오는 장면이다. 칠판에 'Math Quiz'라 쓰여 있고 아이들이 시험을 보고 있는 중에 베스는 이미 다 끝내고 팔꿈치를 괴고 앉아있다. 선생님이 베스에게 벌써 다 끝냈냐고 묻고는 베스의 답안지를 살펴본다. 이때 선생님은 미간을 찌푸리며 당황한다. 또래의 다른 아이들이 숨죽이며 집중해서 풀고 있는 문제를 쉽게 다 끝내고 멍하게 있는 아이에게 선생님은 미간을 찌푸리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남다른 뛰어난 모습을 보인 아이에게 그 어떤 '칭찬'도 없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눈빛으로 선생님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베스에게 선생님은 당황한 얼굴로 지하실로 가서 칠판지우개를 털고 오라 한다.


터벅터벅 걸어 내려간 다용도실처럼 보이는 지하실에서 소녀는 혼자 체스를 두고 있는 보육원 관리인 샤이벌을 만난다. 마음 둘 곳 없는, 집중력 넘치고 관찰력 좋은 아이의 눈을 사로잡은 체스, 그리고 그 체스를 두고 있던 샤이벌 아저씨. 아이가 처음으로 무언가를 요구했다.


'Will you teach me?' '가르쳐 주시겠어요?'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샤이벌 아저씨에게 체스를 배우는 과정에서 소녀는 처음으로 웃었다.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아주 빠른 속도로 체스를 배우던 아이가 어느 날 이런 질문을 했다.


'Am I good enough now?' '제가 충분히 잘하나요?'


To tell you the truth of it, child, you are astounding. 얘야, 솔직히 말해서 너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단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한 문장이 아이의 인생을 바꿔놓지 않았나 싶다. 이 한 마디 덕분에 아이는 체스에 더욱더 열중하게 된 거라 생각한다.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집중력 좋은 소녀 머릿속을 가득 채운 체스라는 게임. 아이를 동정 어린 눈으로 보지 않는 유일한 어른이자 아이를 Miss Harmon이 아닌, 엘리자베스가 아닌 child, 얘야,라고 불러준 단 한 사람의 어른. 그리고 아이가 보육원에 와서 들은 '첫 칭찬'.


베스는 그렇게 체스에 몰두하고 빠져들게 된다.


'칭찬 샤워'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샤이벌 아저씨의 칭찬이 너무 짧긴 하다. 그렇지만 그 짧은 칭찬 하나가 무엇에도 의욕을 보이지 않던 어두운 표정의 한 아이에게 아주 깊고 큰 동기부여를 해주었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할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기도 한다.


무대 울렁증으로 의욕이 저하되고 괴로울 때 발표 모임에 얼른 참석해서 칭찬 샤워를 온몸으로 받아 보시길 추천드린다.


2. 트라우마


아이는 성장 과정에서 많은 일들을 겪었다. 아빠로 추정되는 남자를 찾아간 엄마는, 딸이 듣고 있는 걸 알았는지 몰랐는지, 더 이상 딸을 키울 수가 없다며 대신 맡아 달라는 슬픈 말을 늘어놓았다. 그걸 들은 아빠는 매몰차고 무책임하게 아이를 데리고 오면 어떡하냐며 엄마를 돌려세웠다. 엄마와 아빠 두 사람 모두에게 외면당한 9살 아이의 심정은 어땠을까.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있던 어린 딸에게 눈을 감으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마주 오는 트럭 앞으로 질주해 동반 자살을 시도한 엄마. 사고 현장에서 엄마는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고 아이만 살아남았다. 이 사건들만으로도 9살 어린아이가 감당하기는 충분히 벅찼을 게다.


그런데 베스에게 더 큰 트라우마는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 못한 엄마 그 자체라 생각한다. 수학으로 박사 학위까지 받았지만 낡은 트레일러에서 딸과 단둘이 사는 엄마. 우울해 보이는 엄마의 눈빛. 정상적이지 않은 행동들. 매회 틈틈이 회상 씬이 나온다. 초조하게 체스 시계가 똑딱이는 소리와 함께 엄마가 베스를 혼자 호숫가에 두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사라지는 장면. 다섯 살 남짓 되는 아이는 놀래서 울음을 터뜨리고 엄마는 물 밖으로 나와 손을 흔들고. 여러 장면에서 엄마는 아이를 불안하게 만든다.


한 인터뷰에서 베스는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다. 어떤 이들에게는 체스가 강박과 중독의 대상이기도 하며 천재와 미치광이, 창의성과 정신병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어린 나이에 세계적인 체스 선수가 된 베스는 어린 시절 엄마에 대한 기억 때문에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엄마의 불안정해 보였던 정서 상태 그 자체가 아이에게 트라우마가 되어서 자신도 곧 비슷한 증상을 겪게 되지 않을까 불안해한다.


소녀가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하고 사로 잡혀 있던 가장 심각한 트라우마는 엄마의 양육 태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The strongest person is the person who is not scared to be alone.' '정말 강한 사람은 혼자인 걸 두려워하지 않아.'


'Someday, you are going to be all alone. So you need to figure out how to take care of yourself.' '언젠가 너는 혼자가 될 거야. 그러니 자신을 돌보는 법을 알아야 해.'


엄마가 어린 베스에게 한 말이다. 부모가 아이에게 정서적으로 물리적으로 '건강한 울타리'가 되어 주지 못할 때 아이는 일찍 어른이 된다. 9살 베스는 또래 아이 같지 않았다. 수많은 감정이 담긴, 인생 2회 차 살고 있는 듯한 '나는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어' 눈빛.


나를 보호해주고 보살펴 주고 사랑해주는 부모의 품 안에서 아이는 안심하고 세상에 자신을 그대로 내놓는다. 아직은 여리기만 한 감정 근육이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까지고 부딪히고 긁히면서 단단해지고 튼튼해지며 성장한다. 그런데 심리적으로 온전히 보호받지 못한 환경에 놓인 아이는 감정에 보호막을 치게 된다. 말랑말랑하기만 한 감정 근육을 뚫고 들어온 누군가의 날카로운 말 한마디, 마음에 찰과상을 입힐 정도의 사건 사고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어린아이가 혼신의 힘을 다해 쳐둔 차단막은 다 큰 어른이 되어서까지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있다. 베스가 그랬다.


'혼자 잘 있어요.'


정서 불안은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두려움, 불안함, 외로움 등의 감정이 해소되지 않은 채로 있다 곪아서 생기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부모에게 의지할 수 없었던 어린 베스는 불안함, 외로움을 어린아이답지 않게 혼자 감당하다 내면에 깊은 분노가 쌓이게 되면서 감정 조절이 어려워지게 된다.


'You've got so much anger in you. You will have to be careful.' '네 안에는 화가 너무 깊어. 조심해야 할 거다.'


트라우마는 소녀에게 정서 불안을 안겨주고 소녀는 약물과 술로 불안증을 해소하면서 스스로를 망가 뜨린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한 소녀의 인생을 어떻게 좀 먹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시리즈다.


3. 신경 안정제



주인공 베스에게 큰 위로와 편안함을 주면서 동시에 아주 강력한 걸림돌이 되는 아이템이 등장한다. 신경 안정제이다. 이 신경 안정제는 두 명의 엄마와 연결이 돼 있다.


시리즈 초반에 아빠로 추정되는 인물이 베스와 엄마가 살고 있는 트레일러 문 앞에서 아이를 보자고 애원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에서 아빠가 엄마에게


'You are not taking care of yourself.' '당신은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라고 하자 엄마가 손에 들고 있는 약병을 바닥에 툭 던져 버린다. 아주 잠깐 그 약병이 화면 한가득 클로즈업되는데 바로 그 초록색 약이다. 보육원에서 아이들에게 매일 두 알씩 먹이던 신경 안정제.  


'Green is to even your disposition.' '초록색은 너의 성품을 온화하게 만들어줘.'


베스는 매일 한 알씩 지급되는 초록 약을 며칠 동안 먹지 않고 모아 두었다가 마음이 어지럽거나 잠이 잘 오지 않는 날이면 여러 알을 한 번에 먹곤 했다. 주 법이 바뀌어서 아이들에게 안정제가 더 이상 지급되지 않게 되자 베스는 금단 현상을 겪는다. 그러다 멘탈이 살짝 붕괴되면서 초록 약이 보관되어 있는 곳의 문 잠금쇠를 강제로 따고 들어간다.  


나는 베스가 초록색 약통을 열어서 약을 훔쳐 나올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예상이 빗나갔다. 베스는 약통을 열자마자 약을 한주먹 집어서 허겁지겁 삼켰다. 들키지 않게 조심스럽게 숨죽이며 들어간 모습과는 다르게 약통에서 약을 마구마구 꺼내서 입에 집어넣고 양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러는 사이 온 바닥에 초록 약이 낭자하게 떨어졌다. 몽롱하게 약 기운이 도는 상태에서 비틀 거리며 약통을 통째로 들고 나오다가 '엘리자베스!'라고 외치는 원장님 목소리를 듣고 혼절하기 전 작은 목소리로 지나가듯 뱉은 한 마디 대사에 숨이 턱 막혔다.


바로 '엄마'였다.


아이는 엄마가 손에 쥐고 있었던 그 약통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일까. 엄마가 먹던 약을 먹으면서 엄마를 느끼며 위로받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하이톤의 엄마 또래 여자 목소리에 단순히 반응을 보인 것일까. 친절하지 않은 연출은 내 의문을 풀어줄 명확한 장면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베스는 엄마가 먹던 그 약을 기억은 하고 있었을 것 같다. 결국 그 약은 엄마와 베스를 이어주는 매개체 같은 것이었을까.


베스는 15살이 되던 해 입양이 되는데 양어머니가 어느 날 베스에게 약 심부름을 시킨다. 처방전을 들고 드럭 스토어를 간 베스는 약을 받아 들고는 눈에 빛이 반짝 났다. 그 초록 약이었다. 잠 못 드는 밤 위안이 되어주었던 초록 약은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켜줄 뿐만 아니라 체스 경기에서 집중력을 높여주기도 했다. 베스는 체스 경기에 본격적으로 참가를 하면서 양어머니의 처방전으로 몰래 초록 약을 사서 숨겨 두고 복용했다. 양어머니는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미성년인 베스에게 꾸준히 안정제를 '공급해주는 사람'이 되었다.


오랫동안 베스는 이 약에 의존하게 된다. 불안증을 느낄 때 이 약을 먹는다. 집중을 하기 위해, 잠을 자기 전, 마음이 어지러울 때, 위로가 필요할 때마다 이 약을 먹는다.


마지막 화에 이르러서야 베스는 이 안정제 중독에서 벗어난다. 오랫동안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샤이벌 아저씨의 사랑과 관심을 알게 되고 보육원 친구 졸린으로부터 베스도 가족이 있었음을 깨닫게 되면서 스스로 불안증을 털어내고 이겨낸다. 일생일대의 결승전을 앞두고 극도의 긴장감이 밀려와 약이 필요하다 느꼈을 때 베스는 안정제 대신 그 자리를 소련 선수단을 물리쳐줄 미국인 군단(보신 분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실 듯)의 든든한 지원과 응원으로 채운다.


정서 불안은 나를 본바탕 그대로 고스란히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 크게 도움이 된다고 한다. 7화에서, 가족에 대한 사랑에 늘 목말라 있던 베스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는 이들로부터 '가족애'를 느끼고 스스로를 망가 뜨리던 술과 안정제 중독에서 벗어나게 된다(아, 동료애와 이성에 대한 설렘도 부록으로 딸려 온다). 집요할 정도로 승부에 집착하며 자신을 질책하고 약물과 술로 불안함을 달래던 베스는 '타인과의 교류, 공감, 사랑, 관심, 응원'으로 마침내 어둡고 컴컴한 터널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마음 둘 곳 없는 상처 가득한 외로운 소녀의 눈을 사로잡은 64칸으로 이루어진 세계. 베스는 스스로가 주도하고 통제할 수 있으며 예측이 가능한 체스에 매료되었고 그 안에서 안전함을 느꼈다.


'다치더라도 내 탓이니까'



내가 잘못하지 않은 일로, 내 탓이 아닌 일로 수많은 상처 받으며 살아온 베스. 성장 과정에서의 트라우마와 정서 불안, 그리고 그 불안증을 극복해 나가며 진정한 '퀸'이 되는 천재 체스 플레이어의 이야기. '타인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들여다보며 제삼자의 시각 가지기 연습을 하기에 참 좋은 재료다'라고만 말하기에는 너무 수작이다. 강추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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