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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화 Mar 23. 2023

신데렐라, 자취를 감추다

나는 더이상 발표가 불편하지 않다 

퇴사 후 유학을 간 전 직장 동료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회사에 다닐 때는 ‘나는 뭐 회사 다니는 게 그리 나쁘지 않아. 할 만한 거 같아. 스트레스가 없지는 않은데 이 정도는 누구나 다 겪는 거잖아’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몸 여기저기가 아프더라고. 너무 아파서 견디기 어려운 날이면 병원에 갔는데, 갈 때마다 딱히 아픈 데는 없대. 이상하긴 했지만, 아픈 곳이 없다니 그런가 보다 했지. 그런데 회사를 그만둔 지 1년 정도 지나니까 알게 되더라. ‘아, 나는 직장 생활이 엄청 힘들었구나’라고. 벗어나기 전에는 몰랐어. 그런데 그 자리를 떠나서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보니까 당시에 내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직장 생활이 얼마나 버거웠는지 알겠더라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발표 불안에서 탈출하고 나서야 비로소 느꼈다. 내가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는지. 사실 스트레스나 불안은 비교 대상이나 판단 척도가 딱히 없다. 혈압처럼 기계로 측정해서 수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피가 나거나 눈으로 보이는 상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내가 ‘선을 넘은 상태’, ‘빨간 불이 들어와 있는 상태’인지 아닌지 알기가 어렵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고 힘들 때마다 나 역시 ‘그런가 보다’ 했다. 성격 탓이려니, 누구나 이 정도의 불안 증상은 있으려니 했다. 그런데 불안증을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되고 1년가량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아, 정말 힘들었구나.’ 


발표 불안에서 벗어난 후 내 인생은 질적으로 차원이 달라졌다. 발표를 앞두고 마음을 졸이며 잠 못 이뤘던 시간과는 안녕을 고했다. 아무리 중요한 발표 자리가 있어도 예전처럼 전전긍긍하며 걱정하는 대신, 발표 내용 준비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세상을 보는 눈, 다른 사람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전에 없던 여유가 생겼다. 가벼운 두통과 소화 불량을 달고 살았는데 그마저 없어졌다. 물론 이 모든 게 단순히 발표 불안에서 탈출해서라기보다는 내 마음을 살펴보고 내 감정을 헤아려 보는 과정에서 나에게 ‘편안한 마음’을 안겨주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깨닫고 어떤 순간이나 상황에서도 마음 편한 걸 우선순위로 두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유야 무엇이 되었든 발표를 고통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삶의 질이 좋아진 건 사실이다.


작년 여름에 한강 세빛섬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했다. 각각 다른 리그 소속의 유럽 축구 두 팀이 한국에서 친선 경기를 치렀는데, 내한한 한국의 파트너와 관계자를 위해, 한 리그 측에서 주최한 파티였다. 파티 중간에 별도로 마련된 장소에서 리그 임원진과 미팅이 있었다. 나는 리그와 한국 회사 사이에 진행 중인 IT 개발 프로젝트에서 양사의 의견 조율과 조건 협상 역할을 맡고 있었고, 그 미팅은 리그 임원진과의 첫 대면 자리였다. 세계 3대 축구 리그의 회장, 대표이사, 아시아 총괄 임원, 한국 주재원이 참석하는 미팅이었다. 원래 그 미팅을 주도할 예정이었던 에이전시 담당자는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참석하지 못하고, ‘발표 과제’는 내 차지가 되었다.

 

예전의 나였으면 그 자리에 안 나갔을지도 모른다. 발표 불안인이었을 때의 나는 갖은 핑곗거리를 만들어 내기의 고수라 별의별 창의적인 방법으로 발표 자리를 피해 다녔다. 자유인이 된 지금의 나는 그 고수 자리를 허공에 양보했다. 12시 땡, 하면 유리구두를 신고 열심히 도망가던 신데렐라는 자취를 감추었다. 어렵고 귀한 자리라 긴장하고 떨리긴 했지만, 그렇게 괴롭고 불편하고 고통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미팅 날이 기다려졌다. 실제로 만나면 어떨지,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했다.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대신 착석 후 서먹서먹하고 어색할 분위기를 어떤 식으로 깨뜨릴지, 자리 배치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선물은 어떤 걸 준비하고 포장은 어떻게 할지, 예상치 못한 질문이나 상황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준비했다. 


미팅은 순조롭게 잘 마무리되었다. 돌발 상황도 딱히 없었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굽이 높은 구두를 너무 오래 신고 있어서 종아리가 아팠다는 걸 빼고는 괜찮은 시간이었다. 미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아, 이제 이런 자리가 더 이상 힘들지 않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행복하다’는 감정이 잔잔히 온몸으로 퍼지는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발표 불안과 작별을 고하면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적잖게 달라진다. 타인을 대하는 마음가짐도 변한다. 전에 없던 ‘여유로움’이 생긴다. 삶이 훨씬 더 행복해진다.




책이 출간되기 전, 책 내용의 일부를 브런치에 연재 중인데 출판사와 브런치 공개를 협의한 부분에, 구체적인 발표 불안 극복 방법이 그리 많이 담겨 있지 않다는 걸 깨닫고 있는 중이다. 꼭 전하고 싶은 발표 불안 극복을 위한 주요 팁 몇 가지를 어떤 방법으로 공유하면 좋을지 고민해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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