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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환초

요동치는 바다

by 류재민

오후까지 고요했던 바다는 밤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파도가 높아졌다. 사람들의 몸은 배가 흔들릴 때마다 기우는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담양 댁은 뱃멀미가 다시 시작했다.

“어이쿠, 이러다 배도 사람도 다 뒤집히겄네.”

담양 댁은 지하실 기둥을 부여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짐씨, 거 조용히 좀 하슈. 가뜩이나 정신도 읍는데, 혼 빠지겄슈.”

엄 노인이 눈을 흘기며 주의를 줬지만, 담양 댁은 아랑곳없이 여기저기를 향해 악다구니를 썼다. 하얘진 얼굴은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간 듯싶었다. 담양 댁뿐만 아니라 어린아이와 어른 모두 멀미를 하기 시작했다. 입에서 나온 토사물은 선실 바닥을 흥건히 적셨고, 저마다 기둥에 바싹 달라붙어 몸을 고정했다. 강한 풍랑은 금방이라도 배를 집어삼킬 듯이 몰아쳤다. 기둥을 놓친 사람들은 바닥에서 데구르르 굴러 반대편 벽과 모서리에 부딪혔고, 그때마다 비명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누구 하나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밖으로 나갔다가는 바람에 날려 바다로 빠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배 안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을 방불케 했다. 뱃머리 선실에 있던 파커 소령은 작은 신음 소리를 냈다. 바다는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컴컴했고, 시꺼먼 물결이 매섭게 다가와 연신 뱃전을 때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천둥 번개가 치더니 비까지 퍼붓기 시작했다.

“소령님, 괜찮을까요?”

파커 소령 옆에 서 있던 스미스 하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가 지금 뭘 할 수 있겠나. 그저 바다의 신에게 운명을 맡길 뿐. 갓 블레스유(God bless you).”

파커 소령은 담담한 말투였지만, 스미스 하사를 비롯한 선원들은 암담한 모습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바다의 신이 과연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면서.

*

바다는 밤새 요동쳤다. 비는 삽시간에 폭우로 바뀌었다. 갑판 위는 바닷물과 빗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사람들의 얼굴은 잔뜩 창백해졌고, 아이들 울음소리는 천둥소리에 섞여 공포감을 고조시켰다.

“이러다 물이 쳐 들어오면 우짠댜? 거시기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겄어?”

순팔이 크게 소리치며 말했다. 동영은 뭔가 결심한 듯 입을 꽉 다물었다. 그리고 흔들리는 배에서 겨우 몸을 일으켰다.

“움직일 만한 남자들은 저랑 같이 나갑시다. 물이라도 퍼내게.”

동영의 제안에 순팔과 엄 노인을 포함해 대여섯이 일어섰다. 그러곤 철제 사다리를 붙잡고 차례대로 갑판으로 올라갔다. 배가 기울어 떨어진 사람도 있었지만, 크게 다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갑판 위에는 미군 병사들이 우비를 입고 빗물을 빼느라 부산스러웠다.

“우리도 돕겠소.”

동영과 일행들을 본 스미스 하사는 삽과 양동이를 건네주며 ‘오케이. 땡큐’라며 삽과 양동이를 건넸다. 조선인들의 옷은 세차게 퍼붓는 빗물과 바닷물에 금세 흠뻑 젖었다. 순팔은 웃통을 벗어젖히고 발목까지 찬 물을 빼는데 혼신을 기울였다. 그렇게 조선인과 미군 병사들은 전쟁보다 무서운 바다와 사투를 벌였다. 사람들의 힘은 서서히 빠져갔지만, 배에 들어찬 물은 좀처럼 빠질 것 같지 않았다. 동영의 체력도 바닥을 드러냈다. 배가 흔들릴 때마다 미끄러지기 일쑤였고, 그럴 때마다 시야가 뿌예지고, 어지럼이 밀려왔다. 혼미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고 있던 동영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혼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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