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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ㅎㅇ May 29. 2024

어쩌다 보니, 후지산

밴드라는 플랫폼이 중년층에게 얼마나 강력크한지 체감한 여행에 관해

5월 마지막 주, 5박 6일 도쿄 여행 중이다. 엄마와 함께한 여행이고, 오늘은 마지막 날이다. 30분 뒤면 나리타공항으로 가기 전에 쓰는 글.


그저께, 고엔지에서 고즈넉한 도쿄의 분위기를 느끼고 있는데, 엄마가 나에게 사진 하나를 보여주며 말했다.


“내 친구가 밴드에 올린 건데, 이 편의점을 가면 후지산을 볼 수 있대. 후지산 가고 싶다.”


처음에는 가볍게 무시하다가, 생각보다 끈질긴 엄마의 요구에 ‘후지산 당일치기’를 네이버에 검색했더니, 버스로 2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제기럴. 출발 하루 전 예약이라 버스는 거의 만석이었고 나는 갈지 말지 결정하기도 전에 만석 자리를 보고 마음이 조급해져 왕복 티켓을 예약했다. 그렇게 후지산 보기, 아니다 후지산을 언급한 밴드 글에 댓글을 달기 위한 후지산 인증샷 여행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새벽 6시에 일어나 아침을 간단히 먹고 도쿄역으로 갔다. 버스를 타고 후지산을 가는 내내 날이 흐렸다. 후지산에 가까워지자 우리의 불안은 더 현실이 되어갔다. 후지산은 구름에 껴 보이지 않았다. 가와구치코 역에 내려 후지산이 잘 보이는 스팟 몇 곳을 둘러봤다. 우리가 간 날은 월요일이었는데, 월요일엔 대부분의 상점이 운영을 하지 않았고, 비는 쏟아지고, 후지산은 보이지 않고... 난감한 상황 가운데 열심히 구글지도를 검색하다 운영하는 커피숍을 발견하다(졸라 감사합니다 ㅠㅠ) 그곳은 후지산이 창으로 훤히 보이는 곳이었고, 날이 안 좋아서인지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다. 우리는 후지산이 보이는 가장 편한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우리 엄마의 정말 재미있는 점은(가끔 조금 진절머리 나는 점은) 이런 순간에 갑자기 불쑥 몰랐던 ‘뉴스’를 전하는 일인데, 갑자기 전해 들은 뉴스 한 소식. “내가 연금 때문에 서류를 떼다가 알게 됐는데, 늬 아빠가 20년 전에 너와 동생 양육권을 아예 포기했더라.”


후지산을 보며, 여행하는 중에 양육권 포기 소식요?

네 잘 알겠습니다.


그러든지 말든지 우리는 비가 멈추길 바라며 하염없이 후지산을 바라보다가 이대로 있으면 뭐도 안될 것 같아서 다시 여행 시작지점인 가와구치코 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근처에 있는, 밴드의 그 문제의 친구가 올린! 문제의 편의점을 갔는데... 갑자기 구름이 걷히면서 후지산 밑동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마음이 급해져 연신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지쳐있는 관광객 사이에서 엄마와 나만 부산스럽고, 신나 있었다. 나 또한 후지산이 보이니, 문제의 그 친구를 향한 원망이 사그라들면서 연신 ’ 후지산 모습을 보여줘서 고마워 ‘를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렇게 후지산 여행은 끝났고, 되돌아오는 버스에서 엄마는 베스트컷(당연히 후지산이 잘 나온 사진)을 그 친구 글에 댓글로 남겼다.

친구분은 알까요? 이 댓글을 위해 이 여행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유감이에요 으즈므느.


도쿄에 도착하니, 이곳은 비에 바람까지 불고 있었다. 제기럴. 그런데 이 날은 실제적으로 여행의 마지막 날. 나는 조급해졌다. 나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다행히) 지쳐서 숙소에서 쉬고 싶어 하는 엄마를 숙소에 데려다주고, 나 혼자 시부야에 나왔다. 그런데 비바람은 더 거세지고, 내 우산은 뒤집어지고 사람들은 비바람에 놀라 깩깩 소리를 지르고. 이 날의 행운은 후지산으로 다 썼는지, 나에게 주어진 2시간의 시간 동안 나는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숙소로 올 수밖에 없었다.


엄마와의 후지산 여행에는 속 터짐과 질림과 그리고, 의외의 행운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이 있었다. 다만 그 행운은 후지산에서 다 써버려 내 여행은 망했지만. 행운 총량의 법칙이라도 있나 보지 뭐. 당분간은 후지산의 후 자도 꺼내기 싫고, 후지산만 봐도 고개를 돌릴 것 같다. 그런데 이 진력나는 여행이 글 한 바닥을 만들어주는 거 보면, 역시 글쓰기는 ’화‘에서 시작하는 걸지도.


우리가 본 후지산 사진을 대신하며 여행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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