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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이 나도 모르게 나왔다. L 선생은 노력파이다. 수업 준비에다 학습관리에 많은 시간을 쏟아부으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이들의 평가는 바닥. 잠시 생각에 잠기다 웃음이 터졌다.
“장은아 선생님, 잠깐 내려오세요”
자신만만한 발걸음으로 부원장실로 들어갔다. 강의 평가 직후였다. 강의 평가에서 몇 등을 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학원의 경우는 정기적으로 강의 평가나 만족도 평가를 통해 고객들의 불편사항을 보완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강사들은 강의 평가가 나오는 날 더욱 예민해지곤 한다. 특히, 학생들의 강의 만족도에 따라 교사들의 상대적 평가가 되는 것이기에 민감할 수밖에 없을 뿐더러 교사들 사이에선 어느새 미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곤 하는 것이다. 누가 더 잘했을지 잘하지 못했을 지의 마치 등수 매기듯.
“선생님, 선생님 평가가 좋을 줄 알았는데요”
쿵. 무언가 쿵하고 떨어졌다. 그럼 결과가 안 좋다는 말 아닌가? 다음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리는 데, 입술이 바짝 말라가고 있었다.
“전체 선생님 들 중에 하위에 속해요”
“네?”
하위라면 어느 정도란 말인가? 정신이 번쩍 들면서 미간이 찡그러지고 있었던 건 자신만만했던 나 때문이었다. 내가 맡은 반 아이들은 표정도 좋았고, 학습 수행률도 좋았으니까. 순간 멍해져 표정관리가 안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이죠? 솔직히 말해주세요.”
“전체 강사들 중에 꼴등이에요”
우리 둘 사이에 잠시동안 침묵이 흘렀다. 더 열심히 하겠다고 문을 열고 나오는데 다리에 힘이 풀렸다. 꼴등이라니. 주먹이 자연스레 쥐어졌다. 다음 수업을 들어가야 하는데, 미소가 지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웃으며 내게 안 좋은 평가를 내렸던 아이들의 눈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난감했다. 그래서 5분 늦게 수업에 들어갔다. 아이들의 눈빛이 다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왜 내가 느낀 것과 실제 평가 결과가 다른 건지 궁금해서 안달이 나고 있었다. 평상시 친한 아이를 수업 후에 따로 불러 물어보았다. 비굴하기 짝이 없었고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알아야 고칠 수 있었으니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학생 앞이라 최대한 의연함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선생님, 솔직히 얘기해도 돼요?”
“그럼, 당연하지”
망설이다 그 학생이 입을 떼었다.
“선생님은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열심히 설명하시니 뭐라 하기도 그렇고 잘 따라가는 척해요. 모두 그런 거 같아요. 선생님께는 죄송해서.”
그랬다. 내가 초보였지만 학생들의 눈에도 나는 초보로 보인 것이라는 걸 그 때 알았다. 과외 강사로만 이름을 날리던 나였고 당시 자신감에 가득찬 나 였으니 당연히 잘 할 것이라는 자신감은 어느새 자만이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일까. 스스로를 향한 믿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해 준 학생에게는 고마웠지만 인정하고 알겠다는 너그러움은 보이지 못했다. 그날 집으로 가서 맥주 한 캔을 마구 들이키고 독한 마음을 먹었다.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었으니까. 다시 시작해야 했다.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다음날 출근을 하니,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았다. 꼴등이라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비장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수업 준비를 시작했다.옆 책상에 있는 선생님이 말했다.
“장선생, 눈이 너무 많이 부었어요”
못 먹는 술을 들이켜고 자서 그런지 눈이 한껏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쥐구멍을 찾는 일은 다시는 없어야 했으니까.
그때부터 난 단식이 습관이 되었다. 먹는 시간을 줄여 수업 준비를 했다. 결국, 심한 빈혈과 위출혈로 병원에 입원한 일이 생기고 말았지만 나로서는 당연했다. 수업을 잘하는 교사가 되고 싶었으니까.
다음 강의 평가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 하필 말이다. 너무 어지러워서 엄마에게 머리를 감겨달라 부탁했었던 그 시절, 엄마의 말씀이 모두 잔소리로만 느껴졌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걸 잃는다는 그녀의 말이 왜 그 때는 이해하지 못했었는지. 그저 좋은 교사가 되고 싶은 나의 애달픈 노력을 이해하지 못한 엄마의 말이 한없이 원망스럽기만 했었다. 가장으로 돈을 더 많이 벌어야 겠다는 일념이 지금 입원까지 하게 된 처지를 만들어 준다는 걸 당신이 아느냐고 원망했던 당시의 나였다. 물론 지금은 안다. 엄마의 심정은 더 타들어가셨을 것이라는 걸. 나의 심드렁하며 상처 되는 말들에 그녀가 더 속상했다는 것을.
퇴원 후, 다시 새로운 강의 평가지가 책상에 놓여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려서 열어 볼 수가 없었다. 용기를 내어 열어보니 1등. 대학교 입학 발표날만큼 기쁘고 감격스러웠다. 노력이 결과로 돌아오던 순간 그때 어렴풋이 알았다. 자신의 잠재능력에 대해서. 난 포기하고 싶고 더 이상 못할 때까지 독하게 노력해야 성과가 나오는 타입이란 걸 말이다. 태생이 유머로 장착되어 있거나 언변이 출중한 선생님이야 나보다 애를 덜 써도 같은 결과가 나오겠지만, 난 몰아붙여서 더는 못할 때까지 노력해야 성과가 선물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강의평가에서 1등을 한 난 학원 내에서의 입지와 평가가 달라졌다. 원장님도 “장은아 선생처럼 수업 준비하세요”라고 회의시간에 얘기해서 난처하기까지 했다. 동료강사의 시기와 질투가 새로운 스트레스 요인으로 등장해야 했다.
집에 가서 엄마에게 상처 주었던 말에 대해 사과를 건네며 다시 월급봉투를 내밀었다. 그건 단순한 월급봉투가 아니었다. 아픔과 맞바꾼 시간의 결실이었다. 포기하지 않았던 인내의 결과이기도 했으며 앞으로 쉽게 자만하지 않겠다는 결심이기도 했다. 위궤양과 바꾼 월급봉투는 따뜻했다.
나도 꼴등이었다. 20년 전에 그 강사처럼.
그것을 잊어버렸었다. 그 강사를 다독거리며 , 격려를 하는 게 내 역할인데도 말이다. 그 강사 덕분에 예전 기억이 났다. 어서 격려를 해주러 그 선생 강의실에 들러야겠다. 나를 돌아보는 기회가 주어짐에 감사하면서..